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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선영 Dec 21. 2018

진짜 베를린은 중정에서 만났다.

베를린 중정에서 서울의 골목이 떠올랐다.

Intro.


도시의 블록 크기가 작을수록 걷기 좋은 도시라 한다. 길이 촘촘하고, 교차로가 자주 나타나는 동네가 걷기 좋다는 의미이다.(블록은 도로로 둘러싸인 구역이다.) 교차로가 자주 나타나다 보니 자동차는 서행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걷기 편해진다. 블록이 작다 보니 건물 규모도 작다. 아기자기한 건물에 다양한 상가들이 입점한다. 걸으면서 구경하는 재미도 커진다.


걷기는 기본적인 이동 수단으로써, 보행자는 최단거리로 이동하려는 경향이 있다. 블록의 크기가 클수록, 우회거리가 늘어나고 경로의 선택지가 줄어들어 걷기 불편해진다. 반면 블록의 크기가 작을수록, 지름길을 통해 갈 수 있게 되고, 경로의 선택지도 다양해진다.


걷기 좋다고 알려진 유럽 도시들은 블록의 길이가 60m~80m 정도로 100m가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서촌이나 북촌, 가로수길, 익선동 등 골목문화로 핫한 동네들도 주로 50~60m의 블록 크기를 갖고 있다.




베를린에 지내면서 이런저런 동네를 구경했었다. 대부분 대중교통이나 자전거, 보행으로 이동했었고, 동네를 구경할 때에는 걸어 다녔었다. 걸으면서 불편하거나 위험했던 적은 거의 없었고, 거리를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이따금씩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고, 그럴 겨를 없이 볼거리가 풍부했던 적도 있었다.


베를린을 걷기 좋은 도시라고 생각하냐고 묻는다면,

조금 갸우뚱해보겠지만 '대체로 그러하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베를린에는 흔히 말하는 걷기 좋은 블록에 비해 큰 블록들이 많다. 비교적 작은 블록들이 많은 도시의 중심지에도 대규모 블록이 섞여 있다. 베를린 힙스터들이 모이는 동네, 크로이츠베르크(Kreuzberg)는 200~300m의 규모이다. 하지만 실제로 거리를 걷다 보면 블록 크기가 크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할 때가 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중정(court yard)'에 있다. (중정은 사방이 건물로 둘러싸인 가운데 공간을 의미한다.)


블록 크기가 크더라도, 걷다 보면 중정의 입구로 사람들이 들어가고 나온다. 입구를 들여다보면 뭔가 재미있어 보인다. 100m 단위 또는 그 보다 짧은 거리마다 중정의 입구가 있고, 그 안에는 서점, 레스토랑, 편집숍 등이 영업 중이다. 중정을 들어가 구경하고 다시 나올 수도 있고, 중정을 통해 반대편으로 가로질러 나갈 수도 있다. 중정은 대로변보다는 비교적 저렴한 임대료로 영세한 사업자들이 들어올 수 있고, 덕분에 도시 기능은 다양해진다. 또한 또 다른 이동경로를 제공하여, 골목길, 지름길 기능을 하고 있다. 실제로는 큰 크기의 블록이지만, 중정 덕분에 다양성, 투과성, 접근성, 이동성이 높아져 걷기 좋은 여건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러한 대규모 블록과 중정은 19세기 베를린의 산업화 및 도시화로 인해 만들어지게 되었다.

베를린은 19세기 도시의 급격한 인구 증가로 주택부족 문제에 시달렸고, 그 해결책으로 최소 크기의 중정을 가진 '막사형 임대주거'가 대대적으로 건설되었다. 초기에는 주거환경이 굉장히 열악하였으나, 점차 시설이 향상되었다. 베를린시 계획에 따라 대규모 블록 부지가 양산되면서 '중정형 집합주거단지'라는 형태로 발전해 나갔다. 중정도 '막사형 임대주거'에서는 단순 채광과 환기를 위해 최소한으로 확보한 공간이었으나, 정원, 텃밭, 커뮤니티 공간, 놀이터 등 주민들의 생활공간으로 발전해 나갔다. 이러한 주거양식은 현재 베를린 도시 특성을 형성하는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베를린의 핫플레이스는
중정에 있었다.

베를린으로 떠나기 전, 한국에서 미리 가보고 싶은 곳을 몇 군데 찾아놨었다. 베를린의 크리에이티브 장소, 힙스터들이 가는 곳, 현지인들이 가는 곳들을 찾았다. 블로그 후기나 여행 기사를 통해 정보를 얻어 리스트업 했었다. 아마 그 숍들은 베를린 여행을 준비해본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눈여겨봤던 곳들일 것이다.


베를린에서 바람 쐬러 가야겠다 싶어 질 때면 그 리스트를 들춰보곤 했었다. 그날 기분에 따라 정하고 구글맵으로 위치를 확인해보면, 길에서 떨어진 건물 안 쪽에 핀이 꽂히곤 했었다. 중정 내부에 위치해 있었던 것이다.




크로이츠베르크의 중정, 핫플레이스의 성지


집에서 크로이츠베르크는 꽤 멀었다.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40분가량 걸렸다. 베를린 도시 규모를 생각할 때 정말 먼 거리였다. 집에서 직선거리를 그리 멀지 않은데, 대중교통은 어딜 가든 중심가를 거쳐야 했다. 그렇게 멀리멀리 도착해서 버스에서 내려서 만난 크로이츠베르크는 다소 황량했다. 기사에서처럼 핫하고 쨍한 분위기의 가게들이 메인 거리에서 보이지 않았다. 처음에는 역을 잘 못 내린 건가 당황했었다. 일단 구글맵을 보면서 걸었다. 지도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옆으로 보이는 입구로 들어가야 했다. 긴가 민가 하며 통로를 따라 들어가 보니, 갑자기 뭔가 다른 분위기의 공간이 나타났다.


아, 이렇게 꽁꽁 숨겨져 있었구나.

버스, 자동차가 다니는 메인 가로는 절도 있는 파사드로 카리스마를 지키고, 무표정한 파사드 뒤편으로 이렇게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공간들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뭔가 겉으로 보기에 무뚝뚝해 보이지만, 막상 인사하고 얘기해보면 정 많은 독일 할머니 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겪어봐서 조금이라도 안다고 얘기할 수 있는 독일 사람은 같은 주택에 사는 할머니분들이 시라, 전반적인 독일 사람 느낌이라고 확대해서 말할 순 없었다.)



보난자 커피 BONANZA COFFEE
커피가 정말 맛있어서, 베를린에 있으면서 종종 원두를 사 갔던 곳이다. 지도를 보며 찾아가면서, 도무지 유명한 카페가 있을 것 같지 않은 한적한 동네인데 잘못 찾은 건 아닌가 걱정을 했었다. 거리의 작은 간판을 보고 들어가 보니 조용하지만 무게감 있는 공간이 나타났다. 카페 공간은 비교적 작았고, 로스터리 공간이 넓직히 확보되어 있었다. 카페 앞 테라스 자리가 오히려 넓었고, 많은 사람들이 커피와 태양을 즐기고 있었다.

베를리너들은 여기에 다 숨어 있었구나.


보난자커피 테라스/ 햇빛을 찾아다니는 베를리너들. 나는 햇빛알레르기때문에 그늘에.



솔라 피자 ZOLA PIZZA
솔라 피자는 언니네 식구와 주말 나들이로 크로이츠베르크의 괴를 리체 공원에 갔다가, 남쪽으로 걸어 내려와 저녁을 먹었던 식당이다. 구글맵을 보고 찾아가다가 이 작은 간판과 입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입구를 못 보고 그냥 지나칠 뻔했다.) 입구의 통로를 통과하여 들어가 보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피자와 맥주를 즐기고 있었다. 밖에서 입구를 통해 볼 때는 전혀 알 수 없었던 이 반갑고 산뜻한 분위기!

겉으로 볼 때와 안에 들어갔을 때의 이 반전. 이런 매력이 참 컸던 것 같다.


지나칠 뻔한 쏠라피자의 입구/ 중정 입구를 통해 볼 때에는 딱히 뭔가 있어 보이지 않았다.
들어와서 보니, 이런 공간이! / 플랜트박스로 둘러싸여진 쏠라피자의 테라스 공간. 피자와 맥주를 즐기는 흥겨운 분위기였다.





미로 같은 중정이 매력적인 하케셰호프 (Hackescher Höfe)


하케셰호프는 중정 복합단지 (courtyard complex)이다. 총 8개의 중정이 연결되어 있으며, 작은 상점과 갤러리, 카페, 레스토랑, 극장, 문화기관, 오피스, 주택까지 도시의 모든 기능들이 복합되어 있다.

하케셰 호프의 공간 도면 (핑크색 건물, 노란색 중정 공간)   (출처: 위키피디아)


베를린 도심 미테에 위치하여, 베를린 관광객들이 반드시 들르는 장소 중 하나이다. 하케셰 마크트에서 열리는 시장, 로젠 탈러 스트라쎄, 오라니언부르크 스트라쎄의 거리도 굉장히 흥미롭고 재미있지만, 하케셰 호프로 들어가면 정말 색다른 공간이 펼쳐진다.


중정을 따라 걸으며 구경하다 보면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 있곤 했다. 가게들도 아기자기했고, 파사드(건물의 입면)를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무엇보다 넓어졌다 좁아지는 공간들을 구경하는 것이 정말 재미있었다. 버스와 자동차, 자전거가 달리는 정신없는 대로에 있다가, 이 곳으로 들어오면 갑자기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듯했다. 다들 쉬엄쉬엄 걸으며 구경하거나, 중정에 앉아 쉬었다.


대로변으로는 도시 중심가답게 유니클로, 무지, 나이키 등 글로벌 브랜드의 매장들이 있었다. (글로벌 브랜드의 매장에 대항하기에는 도시의 정체성은 힘이 너무 약하다.) 반면 이곳으로 들어오니, 처음 보는 새로운 매장들이 있었고, 공간 분위기도 달랐다. 이 곳이야말로, 정말 베를린다운 장소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었다.


* 하케셰호프는 1906년, 주거와 상업, 업무, 문화 등의 도시 복합단지로 조성되었다. 2차 세계대전에도 큰 피해를 입진 않았지만, 분단 시절 방치되면서 황폐해졌었다. 통일 후, 1993년 복원을 시작하여 1997년 완료하였다.

* 1층은 바, 카페, 레스토랑, 소매점 등이 있어고, 그 위로는 사무실이나 주택으로 보였다. 주택이 면해있는 중정은 저녁이면 문을 닫고, 극장이 있는 중정만 상시 오픈해놓는다고 한다.


정문으로 들어가면 만나는 첫번째 중정/ 아르누보 파사드가 유명하다.
깊숙이 들어오니 만난 귀여운 가게
8개 중정 중 하나, 조용했다.
중정에서 다른 중정으로 넘어가는 통로






베를린에 지내면서, 찾아갔던 좋은 장소들은 이렇게 숨겨진 안쪽에 위치한 곳이 많았다. 나는 이 공간들이 주는 조용함과 아늑함이 좋았다. 그리고 중정에 위치한 힙한 카페나 레스토랑, 편집숍 들을 구경하면서, 우리나라의 골목과 그 골목에 위치한 위트 있는 상점들이 생각났다.


우리의 골목은 베를린의 중정과 참 많이 닮았다.

서울에서도 가장 핫한 곳은 익선동, 을지로 등 골목이다.

베를린의 중정은 소규모 크리에이티브 비즈니스들이 모여 있다. 작은 상점들이 모여서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중정을 통해 블록을 통과할 수도 있다. 자동차 접근이 어려운 보행자 중심의 공간이다.

서울의 골목 또한 비슷하다. 작은 독특한 가게들이 밀집해 있어, 골목만의 문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 막다른 골목도 있고, 골목을 통해 블록을 가로지를 수도 있다. 이 골목들은 두 사람이 걷기에도 좁은, 자동차 접근이 어려운, 휴먼스케일의 공간이다.


우리의 골목은 그들의 중정과 다르면서도 참 닮은 구석이 많다. 그래서 베를린의 중정을 구경하면서, 서울의 골목 생각이 정말 많이 났다. 이렇게 저렇게 더 좋아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골목문화를 지켜나가는 것이 서울의 경쟁력을 키우는 방향이라는 생각이 더 또렷해졌다.






이런 차원에서, 최근 발표된 세운 3구역의 재개발 소식은 정말 안타깝다. 진짜 서울의 모습을 담고 있는 을지로 골목이 아파트 단지로 바뀐다고 한다. 물론, 을지로의 건축물이 하케셰호프만큼의 건축적 가치를 갖고 있거나, 그만큼 튼튼한 건물들은 아니다. 너무 오랫동안 관리되지 않아 노후도가 심각하고, 안전문제가 시급한 건물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노후된 건물 그 자체가 아니라,

제조업, 인쇄업을 수용했던 그 건축적 양식과 패턴, 외부 골목공간과의 관계, 건물과 골목의 관계이다.


우리의 골목은 하케셰호프와는 다른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유럽의 사례보다는 가까운 중국 상하이의 산업유산 활용 사례를 참고해보면 좋겠다.


전통적 건축 양식을 복원하여 역사와 현대가 어우러지는 관광명소로 재탄생한 신텐디,

미적 가지나 역사적 가치가 없는 사각형 건물을 창의적 아이디어로 재활용하고 있는 우자오창 800호,

보잘것없는 건물을 보존하면서 지역 활성화를 이끌어낸 티엔즈팡 등.


상하이의 재개발 사례처럼 을지로의 역사적, 산업적, 도시건축적 공간 패턴을 재활용하고,

하케셰호프의 복합용도처럼, 기존 제조업 및 인쇄업에 주거, 문화, 리테일, 오피스 등의 복합용도지역을 꿈꾸는 것은 지나치게 이상적인 생각일까?



*참고 자료

- 최규학 외(2004), 베를린의 중정형 집합주거단지의 성립과 발전에 관한 연구, 한국주거학회 학술발표 논문집 제15권, 2004년.

- 베를린 시 홈페이지

- 하케셰호프 위키피디아

- 김경민, 박재민, <리씽킹 서울>, 2013, 파주,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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