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네베르크 시립수영장 Stadtbad Schöneberg
Intro.
수영장은 나에게 조금 특별한 공간이다.
몇 년 전, 수영에 꽂혔던 적이 있었다. 당시 칼퇴 가능한 직장을 다니고 있었다. 지방 출장이 잦았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정시 퇴근이 가능했고, 업무강도도 높지 않았었다. 가치로운 일이었지만, 나의 100%를 활용하지 않는 느낌이 들었었다. 의미 있고 재밌는 일이었지만, 나에게는 부족했나 보다. 마음이 허했다. 이런저런 것들을 찾다가, 수영에 정착했다.
그때까지 내 인생에 수영은 없었다. 언젠가는 배워야지 했던 것을 미루고 미뤘었다. 영화 '카모메 식당'의 주인공이 개구리헤엄으로 수영장을 유유히 누비는 장면을 보고 배울 결심을 했던 기억이 난다.
신촌에 위치한 스포츠센터의 지하 2층 실내 수영장에서 약 3년 동안 일주일에 최소 3번은 수영을 했다. 언제든지 자유수영을 할 수 있는 회원권을 구입하여, 머리가 복잡해지거나 심심하면 수영장으로 향하곤 했었다. 25m 레인을 왔다 갔다 반복하다 보면 복잡한 것들은 가라앉고, 세상을 말갛게 마주 보게 되는 기분이 들었었다. 수영을 통해 몸을 쓰고 나면, 세상이나 사람들을 선입견 없이 바라보게 되는 효과를 얻었고, 이 때문에 수영장을 참 자주 갔었다.
지금은 수영에서 요가로 넘어와서, 요가를 통해 그 효과를 얻고 있지만, 수영은 처음으로 내가 규칙적으로 하게 된 운동이었다. 수영을 하면서, 몸을 움직이는 일이 얼마나 내 정신에 이로운지 알게 되었다. 덕분에 꾸준히 운동을 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언젠가 베를린에 가면 조카와 수영장에 가야지
나의 조카는 물놀이를 좋아해서 한국에서도 수영장을 자주 다니더니 베를린에 가서도 수영장을 자주 갔다. 그 소식을 들어왔던 나는 언젠가 베를린에 간다면, 조카와 함께 실내수영장에 가봐야지 생각하고 있었다. 조카와 함께 물놀이를 하고 싶기도 했고, 한국의 실내수영장과 어떻게 다를지도 궁금했다.
그리고 날 좋은 5월, 갓 태어난 둘째 조카와 언니의 배웅을 받으며 형부, 조카와 함께 근처 시립수영장으로 향했다. 옆 동네인 쇠네베르크에 위치하여 수영장 이름도 '쇠네베르크 시립수영장 Stadtbad Schöneberg'이다.
처음 수영장 건물 앞에 섰을 때, "이게 수영장이라고?" 하는 의문이 들었었다. 내가 지금까지 보아온 수영장 건물들은 마치 수영장 수면을 형상화한 듯한 실버 계열의 차가운 건물이었는다. 그런데 이 건물은 일반적인 주거, 상업, 업무 건물들과 다를 게 없었다. 그야말로 '도시적 건축'이었다.
오피스나 주택으로 보이는 이 건물이
수영장 건물이라니.
도시설계의 입장에서 좋은 건물, 도시적 건축물이란, 주변과 조화를 이루고, 외부공간을 규정해주는 건물, 그리고 변화하는 도시 기능을 담을 수 있는 유연한 건물이다. 한번 지어진 건물을 100년 사용한다고 했을 때, 100년 동안 얼마나 많은 변화가 있겠는가. 경기가 좋을 때는 1층이 상가로 쓰이다가 2층까지 상가로 쓰일 수도 있고, 경기가 나빠지면 1, 2층 모두 주거로 전환하게 될 수도 있다. 갤러리로 쓰일 수도 있고, 스튜디오로 쓰일 수도 있다. 건물 내부의 용도가 바뀌더라도, 도시 가로 경관은 크게 바뀌지 않는다. 도시적 건축은 그렇게 도시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시대에 따른 다양한 용도를 수용할 수 있는 건축이다. (사실 이런 차원에서 한국의 단지형, 타워형 아파트는 도시건축이라 하기 어렵다.) 도시적 건축이 구현된 도시는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불확실성이 점점 증가하고, 변화의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지금, 그리고 앞으로를 대비하려면, 우리 도시에는 '도시적 건축물'이 많아져야 하지 않을까.
쇠네베르크 시립수영장 건물은 1930년 건축가였던 시청 공무원이 설계한 건물로, 보호 건축물로 지정되어 있다. 세계대전을 거쳐오면서 황폐화되었고, 1989년에 폐쇄하게 된다. 이후 리모델링, 결함 발견, 또다시 리모델링 등을 통해 2012년이 되어서야 재개장을 하였다. 재개장하면서 독일의 방송인인 "한스 로젠탈(Hans Rosenthal)"의 이름을 수영장 별칭으로 붙이게 된다.
유대인이었던 한스 로젠탈은 나치 시절 수영장 출입이 금지되어 어린 시절 수영을 배우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25세 되던 1950년에서야 수영을 배울 수 있었다고 하는데, 그때 그가 수영을 배운 곳이 '쇠네베르크 시립수영장'이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수영장 별칭으로 그의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수영장 입구에 검은색 글씨로 "Hans Rosenthal"이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출처)
수영장 건물에 들어가 바로 티켓팅을 했다. 하루 이용권이 10유로였다. 아마 시간이 정해져 있는 이용권은 7유로 정도였던 것 같다. (고양시 수영장이 4천 원이었던 기억이 나, 시립시설 치고는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찰구를 지나, 형부는 남자 탈의실, 나와 조카는 탈의실로 입장했다. 탈의실은 꽤 컸다.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짠! 실내 수영장에 들어가고 나서 나는 또 한 번 놀랬다. 너무 좋아서!
자연광이 들어오고 밖이 보이는 실내수영장
1층에 아이들 풀과 야외 풀, 썬배드, 미끄럼틀이 있었고, 2층(3층 높이 인 듯) 올라가면 3미터 깊이 풀이 있었다. 다양한 풀과 시설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사방에서 자연광이 들어온 다는 점이었다. 바깥의 푸른 나무들과 하늘을 볼 수 있었다.
한국에서 매일 지하 실내수영장만 이용하다가, 딱 한번 1층에 위치한 고양시 수영장을 가본 적이 있다. 그때 실내수영장에서 자연광을 느끼며 수영하는 기분이 너무 좋았는데, 그때 생각이 났다. 그리고 그때보다 더 다양한 공간이 보여서 더욱 좋았다.
야외 풀장은 실내에서 놀다가 잠깐 나가 공기와 햇볕을 즐기기에 굉장히 좋았다. 선배드 뒤쪽으로 일반 건물이 있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학교 건물이었다.) 수영장을 둘러싸고 있는 건물과 나무들. 참으로 도시적이고 일상적인 공간이다. 이런 곳에서 수영복을 입고 물놀이를 하고 있다니. 장소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고 있는 기분이랄까. 그러고 보니 리조트 수영장에서나 느껴 봤던 공간감 같기도 했다. 한국에서 다니던 수영장과는 확실히 다른 기분이었다.
사진을 찍지는 못했지만, 다른 쪽 창문으로 보이는 중정은 주택과 공유하는 부분이었다. 중정 건너편 주택의 주민들은 테라스에 의자를 내어놓고 책을 읽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과 유리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는 수영복을 입고 물놀이를 하는 중이었고.
한쪽에서는 지극히 일상적인 생활을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특별한 놀이를 하고 있고. 서로 슬쩍 구경할 수 있다는 것이 참 신기하면서도, 이런 복합용도야 말로 도시에서만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재미라는 생각도 들었다.
제대로 된 수영을 하는 것이 아닌, 그저 물에서 조카와 첨벙첨벙 소소하게 노는 것밖에 하지 않았는데. 그 일도 3시간을 하니 굉장히 허기가 졌다. 2층에 위치한 매점에서 요기를 하기로 했다. 역시 맥주의 나라답게 실내수영장 안에서도 맥주를 마실 수 있었다. 조카가 좋아하는 감자튀김과 배를 채워줄 피자를 주문했다. 인스턴트를 데워주고 튀겨주는 정도의 음식이었지만, 너무 허기져 있던 터라 허겁지겁 먹었다. 맥주를 마시고 빨개진 얼굴을 식히느라 썬배드에 누워 쉬었는데, 어찌나 좋던지.
이 수영장이 특별하게 느껴졌던 것은 단순히 지상층에 위치해 햇빛이 들었고, 공간 구성이 다양해서만은 아니었다. 수영복을 입고 물놀이를 하면서, 창밖으로 보이는 일상적인 도시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이 이곳을 특별하게 만들었다. 주변 환경과 맥락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어서 특별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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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에 개장하여 이런저런 부침이 있었지만, 재개장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쇠네베르크 시립수영장. 이제 곧 100년이 가까워지고 있다.
지금 우리 도시에 있는 수영장도 100년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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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더 놀자던 조카 덕분에 장장 5시간 반 동안 물놀이를 했다. 녹초가 되어 나오는 데, 이 수영장 전체를 한국에 가져가고 싶었다. 좀 비싸긴 하지만, 우리나라의 시립수영장이 이렇게 만들어진다면, 진짜 수영 많이 하러 갈 것 같다.
:D
*** 이제 수영장 내 핸드폰 반입이 금지 됐다네요. 혹시 방문하실 분들 참고하시길 바랍니다.(2019.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