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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world Apr 24. 2024

빌라에 사시겠습니까?

우리의 신혼집은 빌라였다.

지어진 지 15년 정도 된 크림색 빌라. 엘레베이터가 없는 건물의 3층 1호. 방 세 개와 작은 거실이 딸린 20평짜리 집. 


전세로 시작하더라도 신혼집 분위기는 내고 싶다며 방마다 색색의 벽지를 직접 골랐고, 화장실의 변기와 세면대도 모두 새 것으로 교체했다. 도배만 됐을 뿐 아무 것도 없는 빈 집 한가운데서 신랑은 새로 산 공구세트로 이케아에서 산 트롤리를 조립했다. 신혼 가구가 하나씩 집으로 들어올 때마다 무채색의 집에 활기가 한 켜 한 켜 쌓이는 느낌이었다.

  
몸만 겨우 빠져나올 수 있을 정도로 담벼락에 바짝 붙여 주차를 하면서도 차를 긁지 않아 다행이라며 낄낄대던 우리였다. 무섭게 싸울 때도 있었지만, 부부싸움은 칼로 물베기라며 우는 신랑 품에 쏙 안겨 내가 더 미안하다고 오열하며 극적 화해를 하기도 했었다. 고구마가 딱딱해 손질하기 어려운 재료인 것도 모르고 쓱쓱 썰다 손가락을 다쳤던 곳, 마음껏 먹자며 냉장고 한 쪽 벽을 메가톤바로 가득 채운 곳, 그 곳이 우리의 아늑한 신혼집이었다.


그래서일까. 집주인이 바뀌고 전세계약 만료일이 다가왔을 때, 이사를 가야 할 상황에 몰렸을 때, 우리는 현실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했다. 실은 언제든 쫓겨나갈 수 있는 세입자였는데도 말이다. '우리'로서 함께한 모든 시작이 담겨있는 공간을 떠나는 건 신혼생활의 추억 한 챕터를 고이 접어두는 것과 같았다. 우린 이 챕터를 접을 생각이 없었다.


집을 사서 이사갈까. 다시 전세로 이사갔다가 쫓겨나듯 이사하게 되면 진짜 마음아플 것 같은데.


어디로 이사를 가야할지 막막해 풀이 잔뜩 죽어있던 날. 의기소침한 내 목소리에도 별 반응이 없던 신랑은 얼마 뒤 핸드폰을 불쑥 내밀었다.


집 사서 가자. 이 집 전세금으로 살 수 있는 방 세 개 짜리 집 여기 있네.


말도 안 돼. 전세 보증금으로 이 동네 방 세 개 짜리 집을 어떻게 사. 


진짜 있다니까. 여기 매물 올라와있잖아. 지금 부동산 한번 가보자.


현재 살고 있는 방 세 개짜리 집의 전세보증금으로 같은 동네 방 세 개짜리 집을 매매할 수 있다니. 솔깃한 옵션이었다. 매물은 정말 올라와있었다. 우리 동네에 있는, 방 세 개짜리 집이, 현재 전세 보증금에서 조금만 더 추가하면 매수할 수 있는 매매가로. 


눈에 띄는 점은 매물로 올라온 집이 신랑의 나이보다 더 오래되었다는 것과 평수가 지금 사는 곳보다 7평 정도 더 작다는 것, 그리고 사람들이 기피하는 오래된 빨간 벽돌 빌라라는 것이었다. 

반신반의하며 방문한 부동산에 들러 현재 비어있는 집을 보고, 너무나도 허름한 집 상태에 좌절하고, 인테리어 업체를 수소문해 집을 싹 개조하고, 신혼집 가구를 다시 옮겨 이사를 하기까지는 5개월이 채 걸리지 않았다.




어휴. 밖에서 볼 땐 625 피난 때도 살아남은 집 같더니만 안으로 들어오니까 완전 새 집이네.


이삿짐을 옮겨주시던 아저씨가 이마에 땀을 닦으며 한 마디 하셨다. 젊은 사람들 둘이 살기 아주 그냥 딱 좋다. 감사해요. 저희도 새로 싹 인테리어하니까 진짜 내 집같고 좋네요. 우리는 아저씨 말을 진심어린 칭찬으로 받아들였다. 


좁아지고 답답해졌지만 왠지모르게 편안하고 아늑한 이 집 거실에서(사실 거실이랄 곳도 없다. 그냥 주방 앞 작은 공간일 뿐) 짜장면을 시켜먹으며 신랑이 말했다. 이제 이사다니지 않아도 돼. 여기서 우리가 원하는 기간동안 쭉 살 수 있어. 라고.


나야 아파트에서도 빌라에서도 살았던 사람이라 빌라 거부감이 없다. 그런데 쭉 넓은 아파트에서만 살았던 신랑이 이토록 좁고 작은 빌라에 만족해할 줄은 몰랐다. 주차공간도 딱히 없고 겉으로 보면 625시절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허름한 이 집이 이 사람은 정말 좋은걸까. 


자기 정말 이 집이 좋아? 


나는 좋아. 앞으로 여기서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날 것 같아. 주차야 근처 유료주차장에 월주차하기로 했고, 싱크대며 수납장이며 조명이며 전부 우리가 원하는대로 만들었잖아. 자긴 안 좋아?


나도 좋았다. 비록 전에 살던 집보다 20년도 더 오래된 집이지만. 신혼집의 거실 하나 정도 공간이 뚝 떼어져나갔지만. 식탁을 둘 공간이 여의치 않아 접이식 식탁을 샀고, 손님이 올 때마다 테이블과 의자를 다시 세팅해야하겠지만. 


이젠 계약 만료일까지 남은 기간을 세며 이사를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 이젠 층간소음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오래된 집이라 소음이 잘 전해지지 않는다). 이젠 사통발달 다 열리는 커다란 창을 모두 열고 환기시킬 수 있다(신혼집은 창문이 작고 환기가 잘 안됐다). 


응. 나도 여기가 더 좋아. 


우리는 누가 들어도 촌스러운 이 빌라 이름 뒤에 우리 맘대로 센트럴자이리버아이파크 라는 해괴한 이름을 붙이며 낄낄대고 웃었다. 공동현관에 붙여둔 "저희 이사왔어요, 잘 부탁드립니다" 메시지에 이웃 분들이 "환영합니다. 떡과 마스크 잘 받았어요."라고 답글을 달아주신 종이는 고이 접어 앨범에 넣어두었다. 


우리의 본격적인 빌라 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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