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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world Apr 24. 2024

선의였을까, 방어였을까

미국, 워싱턴DC

워싱턴DC의 겨울은 추웠다. 겨우내 아픈 적 없던 내가 미국까지 와서 지독한 감기에 걸린 건 그 추위를 예상치 못하고 워싱턴기념탑 앞 찬바람을 정면으로 맞은 탓일 것이다.



내복에 외출복에 두꺼운 코트까지 껴입고 이불 속을 파고들었지만 이놈의 추위는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차게만 느껴지는 호텔방 안에서 앓는 소리를 내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맴, 지금 당장 카운터로 내려와서 추가 요금 내세요. 

무슨 추가 요금을 말씀하시는 거죠?

룸 업그레이드 비용 내야죠, 맴.



룸 업그레이드 비용.
한국에서 이 호텔의 '갤러리뷰 룸'을 예약할 때, 나는 단순히 야외 갤러리가 보이는 룸이라고 이해했었다. 시티뷰나 레이크뷰보다는 덜 멋진, 그냥 야외 갤러리 건물이 바라다보이는 뷰. 그런데 호텔에 체크인한 후 갤러리뷰 룸에서 보게 된 풍경은 야외 갤러리가 아니라 호텔 실내 갤러리였다. 창 너머로 햇살 하나 비치지 않는 답답한 이 방을 무려 1박에 30만원씩 내고 예매한 셈이다.
결국 나는 1박에 100불이라는 멍청비용을 추가로 지불하기로 하고 '야외'가 보이는 룸으로 옮겨갔다. 그러니 직원의 말대로 룸 업그레이드 비용은 내야 하는 게 맞다. 하지만.. 극심한 감기로 방을 옮기자마자 땀을 비오듯 흘리며 이불 속에 있었던만큼 외출을 하려면 정비시간이 필요하다. 적어도 양치는 하고 머리는 빗고 카운터에 내려가야 하지 않는가.



네. 알겠습니다. 10분 후 내려갈게요.



하지만 직원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에게 큰 소리를 냈다.



맴. 지금 당장 내려와요. you owed to us.

아.. 네. 그런데 제가 지금 몸이 많이 아파서 쉬고 있었어요. 정비 좀 하고 바로 내려갈게요.

맴, come to the counter RIGHT NOW. 



내가 뭐라고 답을 하기도 전에 전화는 끊어졌다. 그간 미국에서 다양한 금액대의 호텔에 묵어봤지만 이런 무례한 경우는 또 처음이다. 안 내려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10분 뒤에 내려가겠다는 사람을 죄인 취급해? 

안그래도 지난 며칠간 이 직원의 표정과 말투 등 전체적인 응대에서 인종차별의 냄새를 맡고 있던 차였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나는 바로 호텔 카운터로 내려갔다.



전화 받고 바로 내려왔어요. 추가 금액 모두 지금 지불하겠습니다. 

맴. 기다려요. 서류 준비하고 있잖아요.

네, 기다리고 있어요. 천천히 하세요.



직원은 나를 한 번 쳐다보고 히죽대더니 혼잣말을 했다. 입 속에서 웅얼거려 무슨 말인지 정확히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좋지 않은 말임은 분명했다. 이 흑인 여직원 안되겠다. 한 번 짚고 넘어가야겠다.



지금 나를 보고 웃었어요? 왜 웃었죠? 



직원은 서류 작업을 멈추고 나를 응시했다.



내가 웃겨요? 지금 이 상황이 웃긴가요? 돈을 낸다고 했고, 내러 내려왔습니다. 웃긴 요소가 있나요?



race discrimination, 

당장이라도 이 단어를 내뱉고 싶었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 참았다.

모두에게 민감한 단어는 섣불리 입밖에 꺼내 좋을 게 없다.

특히 미국에서는.



내가 웃긴가요? 사람 앞에 두고 비웃지 마세요. 결제에 필요한 일만 안내해주시죠.



정색을 하며 따졌더니 직원은 약간 당황해하며 표정을 고치기 시작했다. 그리곤 이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듯 뜬금없는 스몰토크를 시작했다.



조지타운대학교 학생인가봐요? 공부하러 왔어요?

아뇨. 전 졸업한 지 오래된 한국사람이고 지금 필드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 하세요? DC는 어떤 일로 왔나요?



나는 방문 목적을 간단히 말했다. 순간 직원의 놀라는 표정을 나는 봤다. 그 표정을 급히 감추는 모습도.



그렇군요. 아까 몸이 안좋다고 들었어요. 지금은 괜찮나요?

아뇨. 여전히 아픕니다. 당신이 10분도 참을 수 없다고 해서 바로 내려왔지만 사실 카운터에 내려오는 것도 망설일 정도로 온몸이 불덩이네요.

그럼 월그린에서 약이라도 사오세요. 두통이랑 발열 특화 약들이 좀 있을거예요.

따뜻한 티도 한 잔 마셔요. 감기엔 티가 좋아요. 우리 호텔 레스토랑에서 한 잔 만들어줄게요.



직원은 갑자기 빛의 속도로 결제를 끝내더니 나에게 따뜻한 티를 한 잔 주겠다고 했다. 이런 급작스런 태도 변화는 영 부담스럽다. 나는 필요하면 내가 티를 사마시겠다고 단칼에 거절했다. 그리고는 오들오들 떨며 호텔 근처 월그린으로 향했다. 




애드빌과 물, 과일을 사들고 터벅터벅 돌아오는 길. 통유리 너머 호텔 로비를 보니 카운터 근처에서 직원들이 동그랗게 모여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업무 교체 시간이라 인수인계라도 하는 걸까. 하긴, 이제 저녁 6시니까 한 번 교체될 만도 하지.
아무쪼록 그 흑인 여직원은 앞으로 볼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호텔 안으로 들어섰다. 그 때 누군가가 내 앞으로 휙 나타났다. 그 여직원이었다.



아까 티를 안마신다고는 했지만 내 마음이 영 편치 않아서요. 레스토랑에 특별히 부탁해서 차를 우렸어요.
감기 낫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차 한 잔을 건넸다. 
카모마일 티에 커다란 레몬 한 조각을 얹은, 단순 차라고 하기엔 조금 더 성의가 담긴 티였다.



아..네. 잘 마실게요.

No problem. 방에서 푹 쉬어요.



그녀는 내가 탄 엘레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 웃으며 손을 흔들어줬다. 일본공항에서 비행기가 이륙할 때 지상의 직원들이 손을 흔들어주듯이.




사람의 친절이 호의인지 방어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때가 종종 있다. 맥락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 이를테면 특별할 것 없는 정보 전달 이후로 친절도가 급격히 달라질 때 구분의 난이도는 더욱 높아진다. 

갑자기 친절 모드로 돌아선 그녀의 행동 맥락은 명확하지 않다. 고로 그녀가 베푼 친절의 의미를 구분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선의였을까, 방어였을까.


어찌됐든 따듯한 레몬티가 터질만큼 쓰라리던 목통증을 줄여준 것은 확실하니,
그녀의 다소 억지스러운 친절을 이번만큼은 선의로 해석해줘야겠다.



워싱턴DC에서의 내 컨디션을 책임진 애드빌.
레몬이 들어간 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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