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is - St. Jean Pied de Port
프랑스는 낯설었다. 다른 나라 처음 가는 도시도 곧잘 익숙해졌는데, 이번엔 달랐다. 겨울의 바르셀로나보다 여름의 프랑스가 쌀쌀했다.
같은 테이블을 프랑스 사람들과 공유할 때, 그들은 혼자 닭고기를 썰고 있는 동양인에게 프랑스 요리를 설명해주었다. 프랑스 사람들은 어떤 음식을 많이 먹고, 어떤 방법으로 먹는 것이 더 맛이 좋은지. 어떻게 내가 이곳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할 땐 마음이 많이 담겨서 떨리는 목소리가 나왔다. 순례하려는 내게 용기가 있다고 추켜세우며, 많이 배울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낯선 이에게 이토록 순수하게 '- 하길 바란다', '기도한다'의 단어를 사용하는 것에 적잖이 놀란다. 한국이라면, 웬만해선 처음부터 같은 테이블을 공유하지 않고, 대화도 하지 않을뿐더러, 그렇다고 해도 알던 사이처럼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게 불과 15분 전에 만난 사람에게 기도하고 바라는, 희망적인 단어를 듣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이유였으면 좋겠다.
갈색 홍채가 도드라진, 에메랄드빛 바다가 둘러싼 하늘색 눈동자에 진심을 담는다. 감동했지만 이상하게 그 말들이 마음에서 동동 떠다닌다. 오히려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이에게 동질감을 느낀다. 언어가 통한다는 이유만으로 오랫동안 알아왔던 것처럼 마음을 주고 지나치게 믿은 걸 보면, 외로웠던 것 같다.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마음을 주는 만큼 버려진 느낌이 수반된다.
프랑스 파리에서 바욘으로, 생장 피 드 포트로 기차를 타고 이동한다.
야간열차의 침대칸을 예약했다. 의자에 앉아서 가는 편을 선호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그나마 나을 것 같은 가장 위쪽 침대를 골랐다. 무거운 가방(이때까지만 해도 12kg인 줄 몰랐다)을 들쳐 메고 사다리를 올라가는데 뒤로 쏠려서 자빠질 것 같았다. 아래 침대에 있는 아이가 다칠까 봐 걱정스러워서 더 강하게 사다리를 움켜쥐었다. 올라가는 건 어떻게든 올라가는데 내려갈 땐 어떡하나 싶다. 가방을 짐칸에 꾸역꾸역 밀어 넣는다. 가방 부피가 큰 탓에 들어가기가 버겁다. 천장을 바로 보고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누웠다. 천장이 심하게 가깝다. 도미토리의 이층 침대에서 잘 때도 천장이 낮다고 생각했는데, 여긴 삼층 침대라 천장이 손 뻗으면 닿을 위치에 있다.
잘 수 있는 시간이 한참 남았음에도 바욘 역에서 일어나지 못할까 봐 좀처럼 잠이 오지 않는다. 글도 쓸 수 없고, 천장만 바라보다가 눈을 감는다. 깊이 잠들지 못해 꿈과 현실이 뒤죽박죽이다. 이 자그마한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이 내가 아닌 것 같다. 내가 바욘 역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도 믿기지 않는다. 무작정 한국을 떠났는데, 파리를 정처 없이 돌아다닌 며칠이 지나고 벌써 내일이면 순례길을 걷는다. 순례하는 것 자체도 믿기지 않는데 이미 생장으로 향하고 있다.
잠을 설치고 바욘 역에 도착했다. 기차는 정시에 도착했다.
기차를 오래 타서 버스를 타려고 했지만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길을 모르겠다. 가방이 무거워 더는 헤매고 싶지도 않다. 왔던 길로 되돌아가 기차표를 샀다. 몇 시간이나 남아서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바욘 역 인근을 잠시 구경했는데, 바를 제외하고는 사람이 거의 없다.
하루 정도 식사를 못해서 허기진데도, 먹고 싶은 것보다 사람이 번잡한 곳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다시 역으로 돌아가서 파리에서 샀던 본 마망 레몬 타르트를 먹으며, 네이버 카페(까미노 친구들 연합)에서 동행(이하 : O)을 구했다. 혼자 걷는 게 무섭기도 했고,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외로웠다. 같은 곳을 가는 것 같은 사람이 있기에 말을 붙였고, 함께 출발하기로 했다. 그분 (이하 : K)의 가족들은 먼저 걷고 계시고, K는 뒤따라 왔기 때문에 피레네를 넘고 난 후에, 레온으로 점프할 계획이었다.
K와 이야기하며 생장으로 갔다. 그때가 되어서야 준비가 정말 안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꽤 큰 도시(!)라는 레온이 어디에 있는 줄도 모르고(유일한 대비는 가이드북이다), 카드를 잃어버릴 수도 있는데 그 가능성에 대해선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고, 힘들다는 건 알았는데 얼마나 힘든지 적은 글을 읽은 적도 없었다. 한 순례자의 블로그를 전부 보고, 책을 봤지만 순례의 일상을 파악했을 뿐 각각의 지역과 특색이 기억에 남진 않았다. 준비를 거의 하지 않았는데 그마저도 '순례'보다는 스페인에 맞춰서 한 것 같았다. 순례 오기 직전, '스페인을 걷는 거니까!(해맑)' 하며 순례와 관계가 깊지 않은 『스페인 기행 -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읽고 있었으니.
시력 검사 그림 같은 풍경을 보면서, 아무 생각도 없다가 앞으로가 걱정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