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느낌 Nov 01. 2016

#6. 준비 안 돼도 시작해야 하니까

St. Jean Pied de Port

기차에서 내렸다. 준비가 안 되어 있다는 사실로 인해 착잡해졌다. 기분은 울적한데 날씨는 왜 이렇게 좋은지. 막막하고. 어떻게 준비해야 하나 싶고. 원칙상 한 알베르게에서 이틀을 묵을 수 없다는 걸 알지만, 하루 정도 준비하고 모레 출발하면 좋겠다.


순례자 사무실로 향하는 길




다른 사람들을 따라가면 순례자 사무실이 나온다고 해서 쫄래쫄래 따라갔다. 사무실에서 순서를 기다리며 가방 무게를 재본다. 망했다. 너무 무겁다. 12kg이다. 어쩐지 무겁다 했다. 가이드북에서 몸무게의 10%가 적당하다고 그렇게 신신당부해서 필요 없는 건 다 빼놓고 왔는데(파리에서 산 도록 2개만 빼고). 아직 물도 안 담았고, 지갑과 여권 등을 넣은 조그만 가방도 안 넣은 상태인데 어쩌지? 멘탈이 조각나는 소리가 벌써부터 들리는 것 같다. 순례할 때 배낭의 무게가 인생의 무게라는데 욕심이 과한 건가 싶기도 하고. 시작도 안 했는데 한숨부터 나온다. 비슷한 무게인 K의 가방에는 가족들이 가져다 달라던 미니 밥솥이 들어있어서 그렇다 치지만, 난 왜 이렇게 무거울까. 도록을 빼면 필요한 것 밖에 없는데 그 이유를 모르겠다.



순서를 기다려 순례자 여권을 발급받고 한국에서 받아간 대학 순례자 여권에도 세요를 받았다. 다가올 여정의 고도, 알베르게 정보, 내일 코스 설명이 적힌 종이와 마을 지도를 건네주신다. 흐릴 때는 나폴레옹 루트로 갈 수 없다고 하니, 날씨가 좋은 것도 운이다. 첫날이 제일 힘들다고 하더니, 종이를 보니 왜 그런지 이해가 된다. 얼핏 봐도 현저하게 가파르다.





알베르게를 추천받고 사무실을 나섰다. 추천받은 곳은 가깝지만 기다려야 했기에 K의 가족이 묵었다던 다른 곳을 가기로 했다. 그늘이 드리운 길바닥에 배낭을 베고 누워 알베르게가 열리기를 기다릴 때, 아래로 내려다보는 관광객의 시선에 괜스레 초라해지는 느낌이었다. 오늘부터 나는 순례자니까 그럴 수 있다고 나 자신을 위로했다.


30분을 기다려도 좀체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되돌아왔다. 가방을 내려놓고, 음식을 구하러 마을로 나간다. 길은 몰라도 왠지 익숙해서, 집 앞 슈퍼로 먹거리를 사러 어슬렁어슬렁 나가는 것 같다. 햇살이 뜨겁고 배는 고파서 미간이 자꾸 굳어진다. 피로가 얼굴에만 쌓이는 것 같은 기분이다. 굳어지는 표정을 풀기 위해 양 눈썹을 들었다 놓기를 반복한다.


한국인 순례자가 두 번째로 많다더니, 한글로 '무료(거꾸로 된 ㄹ) 침대'를 써놓은 입간판도 보인다.




까르푸는 일요일이라 닫았다. 사람을 우연히 발견하면, 무척이나 반가운 얼굴로 "익세큐제므아? excusez-moi"로 운을 떼고는, "불랑제리?", "바게트?", "크루아상?", "브레드?" 하고 차례로 물었다. 하나라도 알아들을 줄 알았는데, 난색을 보이며 좌우로 고개를 젓는다. 길을 모르거나, 빵집이 없거나 말을 못 알아듣거나 셋 중 하나겠지. 프랑스는 주식이 빵이라던데 아무것도 찾을 수 없는 것에 투덜대며, 빵집 찾기를 포기하고 시내로 갔다. 정말 맛없어 보이는 식당은 망설이며 지나치는데, K가 한 소시지 가게에 들어가자고 한다. 다행히 그곳에 빵이 있다. 당장 먹을 하몽이 끼워진 바게트와 내일 먹을 빵을 몇 개 더 산다.


먹을 곳이 없어서 주차장과 인도를 나누는 낮은 턱에 나란히 다리를 쭉 펴고 앉는다. 배고플 때 먹으면 맛있을 법도 한데, 놀랍게도 전혀 맛있지가 않다. 주린 배를 채우려 딱딱한 바게트를 기계적으로 씹는다.



그게 뭐라고 허기가 조금 달래진다. 앉아있는 동안 이곳에 여행 오신, 오래전에 순례하셨다는 한국 분을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헤어질 때 얇은 종이에 인쇄한 명함을 건네주신다. 바뀐 정보도 손글씨로 적어놓으셨다. 다른 나라에서 명함을 받는 것 자체가 신기했고, 그분의 밝은 에너지와 강렬한 기운이 기억에 남는다. 자유로운 삶을 사는 것도 인상적이고, 반드시 한 방식으로만 살아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이번 여행에 처음 그분을 통해 느꼈다. 그분처럼 명함을 만들겠다고 다짐한다. 숙소에 돌아가서 한국에서 가져간 일기장 뒤쪽 2장을 조심스레 찢어 명함을 만들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도톰한 종이로 멋지게 하나 뽑아야겠다.





O를 기다리는 동안 K와 맥주를 한 잔 한다.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켜니 시원한 기운이 온몸에 퍼지는 것이 상쾌하다. 성당도 구경하고, 몇 번이나 돌아다녔던 길을 다시 걸었다. 같은 길을 몇 번이나 오갔는데도 길을 도무지 찾지 못하겠다. K가 알려주는 대로 따라간다. 숙소에서 쉬고 있는데 O에게서 연락이 왔다. 마중 나갔더니 프랑스인 친구를 만들어서 왔다. 넷이서 맥주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한국인 셋에 프랑스인이 하나. 그를 배려해 영어로 대화한다. 순례길은 한국에도 있다고 우리 중 한 명이 말했다. '올레길이 순례길인가? 성지순례보다는 도보여행의 성격이 강한 것은 아닌가?' 선뜻 입을 떼지 못하면서 내가 지식이 없는 것인지, 애국심이 없는 건지, 비슷한 특성을 가진 것들을 연결짓지 못하는 것인지 생각해본다. 확신이 없는 것에 대해 선뜻 말하지 못하겠다. '독도는 한국 땅'이지만 왜 그런지, 구체적으로 어떤 사료가 이 사실을 증명하느냐고 물으면 말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외국에선 한국인이 민간 외교사절단인데,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지 못하는 게 부끄럽다.


통상적으로 8시간이 걸린다고 했는데, 빨리 걸을 자신이 없으니 시간을 앞당기자고 제안했다. 내일 아침, 넷이 함께 5시에 출발한다.

드디어 하룻밤만 지나면 순례를 시작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5. 무작정 시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