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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낌 Nov 08. 2016

1일, 피레네 산맥

St.Jean Pied de Port - Roncesvalles

4시 20분쯤 일어났다. 순례의 첫날인데도 고난도에 속하는지라 새벽에 출발하기로 한 것이다. 늦게 온 그들은 다른 알베르게에 묵었고, 그들의 숙소가 까미노 길에서 가까웠기 때문에 그쪽에서 만나기로 했다. 소리를 최소한으로 맞추고 잠이 들었는데, 자다가 벨 소리가 들려 피해가 될까 봐 황급히 알람을 껐다. 잠들기 전에 아침에 입을 바람막이, 양말, 마스크 등 일습을 미리 준비했는데, 막상 준비하니 생각보다 조금 더 걸렸다. 준비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헤드 랜턴을 장착하고, 스틱을 양손에 쥐고, 가방을 메고 허리띠를 강하게 졸라맸다.


기분이 이상했다. 시작하는 것에 줄곧 익숙해지지 않았다. 처음은 매번 낯선 느낌을 동반한다. 여행을 왔다는 것도 아직 익숙해지지 않았는데 어느새 일주일이 지나 순례를 시작한다는 게, 오늘이 끝날 때쯤엔 스페인에 도착한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국경을 넘어서 넘을 수 있다는 것도 체험해보지 않아서 어떤 느낌일지 궁금하다.


해가 뜨지 않아 어두컴컴한 거리를 가로등의 주황빛이 밝히고 있다. 등산 스틱을 짚고 걷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 도움이 되지도 않고 스텝만 꼬인다. 울퉁불퉁한 돌바닥의 모서리에도 종종 발이 걸린다. 함께 가기로 한 그들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출발할까요?" 묻고는 걷기 시작한다. 까미노 길부턴 가로등이 없고, 안내 표지판이 빛을 반사해 형광 노란빛을 띤다. 오르막길을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걷는 그들을 숨 가쁘게 쫓았다. 프랑스 친구는 배낭을 메고 산에 오르는 연습을 했고, '스틱을 쓰면 속도가 두 배가 된다'더니 특히 더 빠르다. 어느 순간 더는 쫓아갈 수 없어서 그들을 먼저 보내고 K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었다. 헷갈리는 길목에서 고맙게도 그들은 우리를 기다려주었다. 헤드 랜턴을 비추지 않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O의 등산화에 부착된 반사 소재가 형광 빛을 반짝이면 안심이 되었다. '그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구나.'





7시쯤이 되자 동이 터오기 시작했다. 새벽 2시간을 쉬지 않고 걸으니 꽤 높은 곳까지 올라 있었다. 땅만 보고 걸어 올라간 그 길에서 뒤돌아 서면 펼쳐지는 아찔한 광경이 웅장해서 감탄사가 저절로 쏟아진다. 일찍 일어난 보람이 있다.

 



꽤 걸었으니 많이 왔겠다 싶은데도, 걸어가는 길은 계속 오르막길이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스칠 때, KEEP GOING이라는 문구가 보인다. '내 마음을 어떻게 알고, 저런 문구를 써놨대' 감탄하며,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다잡는다. 출발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나 스스로가 의지박약으로 느껴지고, 이대로 산티아고까지 갈 수 있을지 걱정된다.


Saint michael, France


휴식차 순례길에 온 것도 있지만 생각할 시간을 갖고 글을 쓰는 목적도 있는데, 어떤 생각이든 하려고 해도 정작 몸이 힘드니까 점점 생각이 없어진다.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소용이 없고, 그저 머릿속이 캄캄해져 온다. 생각을 안 하면 주변을 볼 수 있고, 생각하면 주변이 안 보이는 건 아이러니다. 그런데도 순례길의 풍경은 다큐멘터리다. 길 옆에 난 풀을 뜯어먹는 말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길 한가운데엔 온기를 풍기는 말똥도 낯설지 않게 놓였다. 익숙하지 않은 말똥보다 이 높은 곳까지 아스팔트가 있는 게 새삼스럽다.




Orisson, France


쉬다 걷기를 수차례 반복해, 3시간 정도가 지난 7시 48분에 오리손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바닥에 퍼질러 앉아 어제 사서 가방에 달고 다니는, 한층 더 딱딱해진 바게트를 먹었다. 바게트 끝이 비닐봉지를 파고들어 바닥에 질질 끌린 것처럼 봉지가 닳아있었다. 조금 더 지나면 빵이 봉지를 탈출할까 봐 걱정되지만 아직은 괜찮다. 지금까지 전체 고도의 절반을 올라왔는데 벌써 버겁다. 남은 700m는 너무 높고, 쉬기에는 아직은 괜찮아서 한참을 고민했다.




어차피 가야 하는데 가자, 호기롭게 출발했지만, 역시나 얼마 가지 못했는데 힘들다. 여태까지 온 게 아까워서 돌아가지도 못하겠고, 자연스레 배수진(背水陣)의 상황에 놓여 계속 걸었다. 도무지 못 걷겠어서 K를 먼저 보내고 가방을 힘겹게 내려놓고 바닥에 벌러덩 누웠다. "어이구, 누워서 보니까 진짜 많이 올라왔네." 혼잣말을 하면서, 부지런히 걷는 사람들을 보았다. 오르막길이어서 사람들이 걸어오는 게 다 보인다. '오늘 론세스바예스까지 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목표는 오후 1시여서 새벽에 출발한 건데 목표 시간에 도착하기는 진작에 글렀다.



벌써 5시간이 지나 10시가 다 되었는데, 갈 길은 많이 남았다. 빨리 가야겠다는 생각에 허둥지둥 걸었다. 오르막길에서 나를 지나친 사람들은 너무 빨라서 도무지 따라잡을 수가 없다. 아무리 보폭을 넓게 잡아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거리는 벌어졌다. 따라잡으려는 생각은 그만두고 걷는 데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오늘 하루 동안 걸어야 하는 거리는 정해져 있는데, 걸음이 느리니 마음만 점점 바빠진다. 천천히 생각하며 걷는 일은 나중으로 미룬다. '어쩔 수 없지, 뭐' K를 보내고 바닥에 누워있던 시간은 길지 않았는데 막상 따라잡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K는 나를 기다릴 겸 성모상이 있는 언덕에서 쉬고 있었고, 사진만 금방 찍고 쉬지 않고 바로 출발했다.




그렇게나 많이 걸었는데 아직 10km나 남았다는 게 놀랍지만, 무엇보다 끔찍한 건 앞에 보이는 길이 대놓고 오르막길이라는 거다. "어휴 - " 소리가 자연스럽게 나온다. K와 나는 오르막길을 앞에 두고 잠시 쉬기로 했다. 누워 있는데 유쾌한 이탈리아 남자들이 키득대며 지나간다.


Col de Bentarte, France


좌절의 순간은 도착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오두막 때문이었다. 집 모양으로 생긴 표지를 보고 알베르게가 3km 남았다고 여기고 기쁘게 걸었는데, '도착인가? 어? 어?' 하다가 표지가 나타내던 그 건물을 실제 봤을 때의 실망은 엄청났다. 사람이 살지 않는 헛간 같은 조그만 건물인데 어떻게 봐도 알베르게일 리가 없었다. 기대가 한순간에 깨졌다. 다시 오르막을 오른 후에 실망을 준 오두막을 바라보며 나란히 앉아 마지막 남은 과자를 하나씩 먹었다.



죽을 것 같지만, 또 막상 올라가면 괜찮다. 이때까지만 해도 오르막이 가장 힘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5km가 남았을 때부터는 말도 안 되는 내리막길이 펼쳐졌다.




론세스바예스가 얼마 남지 않은 길은 차근차근 쌓은 1,400m의 고도를 깎아지른 급경사였다. 내려가는 길에선 속도를 내기도 좋지만, 동시에 무릎과 발목에 무리가 더 가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더군다나 가방이 무거워 중심이 잘 잡히지 않았다. 빛이 잘 들지 않아 어두침침한 산에서 돌을 하나씩 밟고 헉헉거리며 내려갔다. 돌이 미끄럽기도 하지만 무릎이 좋지 않기 때문에 다칠까 봐 긴장되었다. 순례자가 이곳에서 사망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지도 많았다. 좋지 않은 날씨에 출발했다거나 강도를 만났다거나 죽음에 이르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어떤 이유든 바로 이 지점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건 긴장을 만드는 요소였다. 처음엔 묵념하고 지났지만, 세워진 십자가들이 많아 이후에는 멈추지 않은 채 마음속으로만 고인의 명복을 빌며 걸음을 이었다.


나뭇잎이 빛을 가린 어둑어둑한 숲길에서 K와 쉬고 있는데, 몇 번 마주친 친절한 캐나다 아주머니를 만났다. 아주머니는 우리가 그때까지 보지 못한 사람을 봤느냐고 물었다. "그런 사람이 있어요?" "내가 아까 마주쳤으니까 아마 곧 내려올걸?" 계속 이야기를 하는데 조리를 신고 산길을 스키 타듯 엄청난 속도로 내려오는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이 캐나다 아주머니가 이야기한 그 사람(이하 : J)이었다. J와 나는 앞으로의 여정을 함께하게 된다. 여태까지 못 만난 것도 그렇고(몇 시간 전 뒷모습만 봤을 땐, 그저 짐을 참 잘 쌌다고 생각했다), 돌이 많은 이 산길에서 조리를 신은 게 신기하고 다칠까 걱정이 돼 J에게 말을 붙였다. "왜 조리 신으셨어요? 발 안 아프세요?" 내리막길이라 등산화 앞코에 발가락이 계속 부딪쳐서 그편이 더 고통스럽다는 거였다. J는 산길에서 스키를 타는 빠르기를 가졌기에 곧 K와 나를 지나쳐서 지나갔다. 기본적인 속도가 다르기에 J와 앞으로 같이 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숲길은 당장 귀신이 나온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아름드리나무들이 몸통에 형광 노란색으로 혹은 새빨갛게 길을 나타냈다. 귀신이 숨어 있을 것만 나무들의 모습이 기괴했다. 무서워서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고등학생 때 어두운 열람실에서 조그만 불빛을 켜놓고 친구들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들려주던 무서운 이야기도 그냥 듣지 못할 정도로 겁이 많기도 했다. 너무 무서운데 나뭇가지로 만든 십자가는 사방에 붙어있고, 화살표가 분명하게 표시되지 않은 곳도 있어서 길을 잃을 수도 있다는 걱정까지 더해 점점 두려움은 커졌다. 이미 시간은 늦어져 가고, 숲에서 밤을 새울 수는 없는데 무릎이 터질 것 같아서 빨리 갈 수도 없었다. 어떻게 혼자 순례할 생각을 했는지 이해되지 않지만, 분명한 건 아는 게 없어서 용감했다.




심리적인 고통 속에 걸음을 재촉하니 드디어 마을이 모습을 드러냈다. 숲을 빠져나오니 비가 오기 전처럼 구름이 하늘을 메워 어두침침한 느낌이었다. 다른 곳을 헤매다가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생장에서 새벽 5시에 출발해 론세스바예스에 오후 5시에 도착했다. 12시간 만이었다. 숲길을 내려올 땐 죽을 것 같더니, 막상 오늘 걸어야 할 거리를 다 걷고 나니 '뭐 이 정도면 괜찮네, 할 만하네!' 싶다.


Real Colegiata de Santa María de Roncesvalles, Spain


12시간을 다 걸어냈다고 하루가 끝나는 건 아니다. 땀을 흥건하게 흘려 소금기로 절여진 몸을 씻어내고 빨래를 하고, 순례자 메뉴를 먹고 성당으로 향했다.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나서, K는 레온으로 가는 차편이 있는지 물었다. 밖에 빨래를 널었는데, 갑자기 굵은 빗발의 소나기가 쏟아져 후닥닥 달려나가 빨래를 걷어와 조금이라도 마르기를 기대하며 침대 난간에 널었다. 내일을 준비하며 짐을 다시 꾸리고 나서, 책에 적힌 내일 일정을 확인했다. 초록색 바람막이에 달린 모자를 쓰고 얼굴과 닿는 부분의 끈을 졸라매고 다소곳이 누운 J에게 다가가, 출발할 시간을 조율했다.


22:00

일기를 쓰고 있는데 알베르게의 불이 자동으로 꺼졌다. 길고 길었던 오늘이 끝났다. 어떤 생각도 쉽사리 들지 않던 오늘을 걸을 때는 어제 읽었던 '초대'라는 시가 종종 떠올랐다. 눈을 감을 땐 함께 걸은 K와 기다려준 그들에게 고마움이 솟았다. 평소의 불면증은 자취를 감췄다.


초대 - 오리아 마운틴 드리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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