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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낌 Nov 27. 2016

2일, 천천히 가도 된다면

Roncesvalles - Zubiri

엊저녁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뚫고 3층에서 1층 밖으로 뛰쳐 내려가 널었던 옷가지를 허겁지겁 걷었다. 한 아름 안고 들어온 옷가지 중에서 수건과 양말을 골라 각각 침대 난간과 사다리에 널어두었다. 비가 온 탓에 자고 일어나니 몸이 으슬으슬 떨리고 닭살이 돋아있다. 비틀어도 물이 떨어지지 않는 빨래의 축축함이 찜찜하다. 몸을 일으키고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셈한다. ‘오늘 몇 시간을 잤지?’ 적어도 7시간 동안은 눈을 붙였을 텐데 한숨도 자지 않은 것처럼 어깨가 묵직하고 종아리 뒤쪽이 저릿저릿하다. 가족을 만나러 가는 K와 작별인사를 하고 J와 6시 반에 길을 나섰다.



해가 뜨지 않고 잔뜩 낀 안개가 개지 않아서 가시거리가 짧다. 어젯밤 내 아래 침대를 사용하신 캐나다 아주머니와 J와 줄지어 도시를 지났다. 걷는 속도가 느린 편이라 바삐 걸어도 거리가 점점 벌어졌다. 




마을을 지나고, 폐허 같은 공장을 지나 모래가 깔린 길을 걸었다. 한 발자국씩 땅에 디딜 때 자박자박한 정도의 물에 담긴 모래가 버석거리는 소리를 냈다. 라라소아냐까지 가라고 가이드 북에 쓰여있었는데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무리하지 않고 갈 수 있는 만큼만 가고 싶다.



계획중독자(J의 표현을 빌자면)인 내 목표는 매일 오후 1시에 마을에 도착하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하루에 20~25km씩 걷는다는 이 길에, 나는 출발하기 전 하루에 15km만 걷겠다는 소박한(!) 생각으로 순례 후의 계획도 일부러 세우지 않았다. 15km는 비교적 시간이 적게 걸리기에 1시까지 충분히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1시까지 도착하고 싶은 이유는 여유를 즐기려는 것이었다. 걷고 알베르게에 도착해서 씻고 빨래하고 간단한 식사를 한 후, 일기를 쓰고 책을 읽겠다는 소소한 로망이 있었다. 까미노 길의 생활을 담은 책에선 걸어야 할 길을 마친 후의 커피 한 잔의 행복을 말했고 그 여유로움을 즐겨보고 싶었다. 그 여유로움에 대한 로망과 기대가 가득했다. (쓰고 보니 여유로움을 위한 계획을 끊임없이 세운다는 점이 모순적이다)




엎치락뒤치락하다 서서히 거리가 벌어지면서, J가 앞장서고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이 익숙해졌다. 어쩌다 만나면 이야기를 하고 다시 멀어지면 멀어지는 대로 걸었다. 보조를 맞추려고 노력했지만 기본적인 속력 차이가 나는 탓에, 함께 가기 쉽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편의를 봐주는 게 익숙했다. 지인이 혼자 밥을 먹어야 하는 상황에는 일부러 그 앞에 가앉아서 기다리곤 했던 것처럼. 그런 까닭에 상대와 관계없이 오로지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낯설었다. 이 길에서는 내 힘으로 지탱하고 삶을 혼자 꾸려가야 한다는 것이 절절하게 다가오면서 외로워지고 설 곳이 없어지는 느낌이었다. 혼자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장점을 느끼는 동시에 기존 여러 개의 조직으로 충족하고 있던 안정감과 유대감을 잃었다.





어제 피레네에서 만난 J와 나란히 걸으면서 이야기를 했다. 일반적인 여행이 아니다 보니 왜 이곳에 왔고,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등 인터뷰하듯 서로에 대한 질문을 이어나갔다. 공통된 이야깃거리를 알게 되어 그 중심으로 대화가 이어졌다.





비가 온 다음 날이라 집을 나온 민달팽이도 있다. 조그만 친구들부터 어림잡아 7센티에 이르는 친구들까지 크기가 다양하다. 행여나 밟게 될까 봐 땅바닥을 주의 깊게 살펴보며 한 발자국씩 디뎠다.





심리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편하지 않은 상황에 이르게 되니,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는 막연한 믿음과 분명한 목적의식의 중간에 있던 나는 모든 게 희미해졌다. '힘들 걸 알면서도 왜 사서 일을 벌였을까?',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여기까지 왔을까?' 싶으면서 왜 지금 걷고 있고, 왜 걸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마음이 좀처럼 잡히지 않아서 혼란스러웠다.


나 외엔 아무도 없는 길을 오래 걸으니 세상에  나 혼자밖에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떤 것도 신경 쓸 겨를 없이 도망치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처럼, 나아갈 길이 없는 막막한 느낌이었다. 실제로 그런 길을 마주한 적이 종종 있었고 그런 때엔 어김없이 옆으로 난 길이 있었다. 갈 곳이 없다고 지레짐작으로 판단하고 가지 않았다면, 발견하지 못할 길이었다. 그 길을 따라 걸으면 J의 뒷모습이 멀리서 보이고 안심이 되었다. (의도치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심적으로 J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한 달여를 함께 걸으며 그렇게 되었다)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경험을 반복했고, 걷다 보니 길에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어떤 사람도 보이지 않는 건, 지금 굽이굽이 굽은 길에 서있어서 그렇다. 보이진 않지만 가까운 거리에 사람들이 있다. 곧 앞에 나올 골목을 돌면 사람들이 나올 것이다. 외로워할 필요가 없다. 혼자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조금 위안은 된다.





J에게 생장에 도착한 첫날 만든 명함을 주었다. J가 마음에 들었는데, 반대로 J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는데 막상 명함을 쓰게 되니 조언해주신 그분께 감사한 마음이 생겼다.


다음 도시까지 갈지 망설이다가, 더 이상은 걷고 싶지 않고 빨래도 해야 하고 두 시가 지난 터라 J를 보내고 가까운 마을인 주비리에서 쉬기로 했다. 이 작은 마을에서 O를 다시 만나 정보를 얻고, 다음 날 숙소를 어렵게 예약했다. 지금 팜플로나는 축제 기간이어서 알베르게를 구하기 어렵다고 했다. 산 페르민 축제를 보고 싶은데, 가능할지는 도통 모르겠다.


Albergue Zaldiko, Zubiri, Spain




'여기 사람들은 분수에서 물을 떠서 먹는구나.' 여기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마을을 돌아다니며 구경했다. 아침에 만난 아주머니와 슈퍼에서 아이스크림 사 먹고 강가에 가서 산책도 같이 했다. 한국 부부 분들과 아주머니들을 O가 도와드린 덕분에 저녁과 야식을 함께 먹었다. 내일은 아주머니들과 O와 함께 출발하기로 했다.





오늘도 한 편의 시를 읽었다.


여인숙 - 잘랄루딘 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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