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ubiri - Cizul Menor
론세스바예스에서 처음 마주쳤는데, 주비리에서 다시 만났기에 다섯 명이 줄지어 걸었다. 시간이 지나자 속도가 비슷한 한 분과 걷게 되었다. 어머니뻘 되는 분과 걸으니 엄마와 여행하는 것 같아 느낌이 묘했다. 어떤 이야기를 꺼내면 좋을지 생각하다가, 가장 궁금한 시작하게 된 계기와 진행 과정을 여쭤보았다. 기존 계획이 무산되고 출발 2~3주 전에 급하게 비행기 표를 끊으면서 준비를 시작한 나와 달리 배낭을 메고 등산하는 것까지 완벽하게 준비하셨다.
특히 좋아하는 순간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핵심을 발견할 때다. 잠깐으로 삶의 궤적을 파악할 수는 없지만, 특정한 질문이 의미 있는 답을 끌어내는 순간이 있다. 지뢰 찾기 같아 묻기 전엔 어떤 것이고 어떤 지점인지 알 수 없지만, 그 계기가 인생의 전환점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 지점들이 모여서 한국에서의 삶, 가족과 구성원 간의 관계, 사건을 대하는 태도와 사고방식을 추측하게 한다.
내 경우엔 '하고 싶은 일'이 전환점이었다. 예상보다 낮은 성적에 맞춰 대학을 선택하면서 전공은 하고 싶은 일의 범주 안에서 골랐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도 다른 것들도 포기하지 않으려고 여러 측면에 관심을 쏟았다. 이렇다 할 무언갈 얻거나 성취한 적은 없지만 하고 싶은 일을 찾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좋았고, 세상을 보는 또 다른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미래를 알 수 없는 기로에서의 내린 결정이 터닝포인트가 되었다.
순례자를 위한 주님의 기도
우리의 길 위에 계신 우리 아버지
당신의 숨결이 우리에게 오시며
우리 순례자를 돌보시며
당신의 뜻이
추위 안에서와같이
우리가 쉴 때에도
이루어지소서.
순례의 길에서 넘어지는 사람들을 우리가 도와주듯이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소서
우리를 마음의 고통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모든 악에서 우리를 구하소서.
이야기하며 여러 가지를 느꼈다. 사회에서 '해야 한다'고 규정지어진 것 (가령 일정 수준의 교육을 받고, 가정을 꾸리고 특히 아이를 가져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등)의 사회적인 통념은 그 모든 경험을 하기 위해서, 이해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자식으로서 부모의 마음을 추측할 뿐이지만, 아이를 낳아 기를 때에 비로소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삶은 믿는 대로 흘러간다. 원하는 대로 믿고 바라면 그렇게 될 것이다. 여러 이야기를 듣고 말했다. 어려움이 있음에도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었다. 뜻을 품었던 대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지금 이 길에 왔듯이, 뜻이 있으면 원하는 대로 흘러간다. 그렇게 믿을 것이다.
쉬면서 땀이 난 발도 말릴 겸, 신발과 양말을 벗은 맨발을 등산화 위에 얹었다. 발가락 사이로 바람을 느끼며 하늘을 바라보다가 10분 정도 눈을 붙였다. 도무지 걸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순간에, 원할 땐 어디서든 쉴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점이 행복하다. 이 순간에 행복이 가까운 곳에 있다는 걸 느낀다.
스페인 4대 축제인 산 페르민 축제는 바스크 지방 전역에서 열린다고 했다. 팜플로나에서 축제가 크게 열리는데, 이전 마을부터 축제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팜플로나에 도착하니 흰옷을 입고 빨간 스카프를 두른 인파로 거리가 가득 찼다. 거리에 모든 사람이 축제 기본 복장을 모두 갖춘 것으로 열정을 엿볼 수 있다. 등산복에 무거운 배낭을 메고, 스틱을 짚은 틀림없는 내 순례자 복장이 신경 쓰였다. 팜플로나에서 묵는다면 흰옷을 사 입고 순례 중인 것도 잊고서 밤새 파티를 즐길 텐데.
팜플로나 숙소는 이미 예약이 다 차서 다음 도시까지 가야 한다.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온통 거리를 메웠다. 크리스마스에 명동 거리를 걷는 것처럼 방향을 바꿀 수도 없어서 강물을 구성하는 물방울이 된 것 같다. 화살표를 잃은 지도 오래고 흘러가는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축제를 만끽한다. 물을 뿌려달라고 소리치면, 집 안에 있던 사람들이 양동이에 물을 받아와 발코니 아래로 뿌린다. 사방으로 흩뿌리는 물을 맞으면서 불쾌해하기는커녕 웃으며 즐거워한다. 눈부시게 밝은 흰옷은 와인으로 얼룩져 있기도 하고, 물로 젖어있기도 하다. 이들은 옷이 더럽혀지는 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이 즐거운 대열에 끼어있다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다. 알베르게를 찾아가는 게 어렵다는 것만 제외하고.
폭신한 흙길보다 딱딱한 아스팔트 길이 많아서 발바닥이 불타는 고통이 지속됐다. 혼자 걸었으면 원래 목표했던 지점까지 가지 못했을 텐데 새벽부터 하루가 끝날 때까지 신경 써주시고 배려해주시는 덕에 많이 배우고 생각하며 걸었다. 힘들었는데 나와 함께여서 다행이었다고 말씀해주시는 덕분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다른 사람에게 힘이 되는 존재가 될 수 있어서 기쁘고,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하다.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점점 이 생활에 적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