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entosa - Santo Domingo
익숙해지는가 싶더니 그런 생각은 섣부른 것이었다는 걸 느끼게 된 날. 도착할 때쯤은 체력도 떨어지고 날씨가 흐리고 꾸물꾸물해져서 기분도 안 좋았던 날.
아침에 간단하게 요기를 하려고 단 한 군데 열려있는 카페에 들어갔다. TV에서는 생방송으로 다른 지역에서 열리는 산 페르민 축제 영상을 틀어주고 있었다. "저거 아직도 하네"하며 카운터에서 아침을 주문했다. 준비된 빵이 없어서 일하시는 분이 급하게 주변 마트에서 빵을 사다 주셨다. 추워서 출발할 때부터 입고 있던 우비와 메고 있던 가방을 그대로 벗어 놓고, 크로와상을 베어 물며 따뜻한 우유 한 모금을 홀짝거렸다.
이상하게도 걸을 땐, 마라톤 할 때처럼 다리가 습관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먼 거리를 뛰면 그 속도를 유지하려고 뛰던 그 보폭대로 발이 자석처럼 땅에 내디뎌지는데 걸을 땐 그렇지 않았다. 한 걸음을 걸어도 열 걸음을 걸어도, 그 이상을 걸어도 각 걸음에 쏟아야 하는 힘이 같았다.
하염없는 밀밭에서, 바람이 부는 순간에 밀이 서로서로 부딪히는 소리를 담으려고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꼭 바람이 안 불었다. 그 소리를 제대로 담지 못한 게 아쉬움이 남는다. 사진에서는 이토록 정적인 밀밭이 흔들릴 때는 얼마나 역동적인지, 밀밭이 내는 '사라락' 소리가 어떤지 다시 느끼고 싶은 마음이다.
더러워도 정말 맛있어
산티아고 길에 있는 메세타 고원은 평탄하고 밀만 가득한 지역이라 나무가 한 그루도 없어서 그늘이 한 점도 없고, 그냥 주변에 아무것도 없다. 우리 동행은 그 전날 저녁에 다음 날 점심에 먹을 각각 1유로짜리 햄이나 치즈를 함께 샀다. 아침에 산 빵에 햄과 치즈를 넣어 간단하게 점심을 먹기 위해서다. 그렇게 하면 점심을 1인당 2유로쯤에 끝낼 수 있다.
그늘을 발견하면 서로 신호를 보내다가 가방을 내려놓고, 가방을 깔고 앉거나 맨바닥에 앉는다. 먹을 물도 짊어지고 다니는 우리 순례자들은 당연히 손을 씻을 물도 없다. 아침부터 스틱을 짚고 다니던 손으로 빵 가운데를 가른다. 맨 손으로 햄과 치즈 가장자리를 살포시 짚어 하얀 속살을 드러낸 빵에 올린 후 반으로 접어 덥석 입에 문다. 그토록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먹는, 거의 든 게 없는 그 샌드위치가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
힘든데 행복하다
목표한 도시에 도착했는데 좌절했다. 도시에 사람도, 숙소도 편의시설도 거의 없어서 도시 전체가 황폐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다음 도시까지의 거리가 걷지 못할 정도가 아니어서, 다음 도시까지 힘을 내서 조금 더 걷기로 했다.
다음 도시인 Santo Domingo로 향하는 길엔 약간 높은 언덕이 있어서 그 언덕에 올라갈 때까지는 헉헉거리며 불평했다. 그런데, 그 언덕에서 내려오게 되는 순간에 펼쳐지는 풍경이 장관이었다! 파아란 하늘엔 솜처럼 팡팡 흩어진 하얀 구름이 가득했고, 밀밭이 사방으로 펼쳐져 있어 시야가 뻥 뚫려 있었다. 그 풍경에 가슴속까지 개운해지고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멋진 풍경이라, 힘든 게 힘듦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도리어 이 풍경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고, 마음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는 기분이었다.
길 위에 있다
막판에 날씨는 흐리고 걸음은 더디고, 너무 힘들어서 괜히 짜증이 났다. 익숙해졌다고 수 차례 말했던 것 이상으로 편안하게 생각했었나 보다. 집 생각이 났다. 집에 가고 싶은 게 아니라 예전 생각이 났다.
지금 나 스스로를 돌아보면 과거의 내가 기대했던 나와 너무나도 달랐다. 베스트셀러였던 '꿈꾸는 다락방'에서 끊임없이 세뇌시키는 R=VD(생생하게 꿈꾸면 현실이 된다)는 공식을 일부러 되뇌며 외웠다. 바라면 실제로 이루어진다고 믿고 싶기도 했고, 그 하나만은 외워야 책을 읽었다는 느낌이 들 것 같아서였다. 시간이 흘러 아버지는 '성공의 비결'을 담은 종이를 프린트해서 내 책상 유리 밑에 끼워넣으셨다. 꿈은 동기부여가 되고, 생생하고 열렬히 원하고, 노력하면 이뤄진다는 내용이었다. 믿지 않았다. 말로만 하는 이런 멋들어진 문구는 꿈을 이루는데 하나도 보탬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특별할 것 없는 학창 시절을 거쳐 지금의 내가 되었다. 지금의 나는, 적어도 과거의 내가 기대한 모습은 아니었다. 어렸던 내가 바랐던 미래의 모습은 한층 더 전문적이고, 어떤 쪽으로든 가닥이 잡힌 모습이었다. 시간이 지나 보니까 그렇진 않다.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하나씩 했음에도 오히려 한층 더 흔들리고, 갈수록 막막하고 앞으로의 길이 흐릿하다. 과거에는 다섯 갈래의 길이 있다고 예상했다면, 지금은 100가지의 길이 있는 것만 같다.
그래서 아직까지는 생생하게 꿈꾸면 현실이 된다는 말이 와 닿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원하는 상이 분명치 않아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게 어떤 것이든 지향점으로 향하는 길 위에 있는 거였으면 좋겠다. 비록 지금 헤매고 정처 없이 갈지라도 마지막에는 모든 순간들이 의미 있었다고 느끼길 바란다.
아침부터 30km를 걸어 숙소에 도착한 뒤 지친 몸을 이끌고 장을 보고 밥을 해먹었다. 시집을 읽고 일기장을 펼쳐보고, 짐을 싸고 평소처럼 하루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