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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란잔 Jul 22. 2018

잘 가고 있는 거죠?

꽁치의 맛(An Autumn Afternoon, 1962년 作)


'잘 가고 있는 거죠? - 꽁치의 맛(An Autumn Afternoon, 1962년 作)'

 

1. 가정


인물 한 명, 한 명을 원 쇼트로 담아내는 카메라의 부단한 노력의 이유가 궁금했고, 인물들을 카메라 앞에 호명하는 이유는 결국 각각의 인물들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우선적으로 몇몇 인물에 대한 나이를 어렴풋이나마 추론해보는 것으로 글을 시작하려고 한다. 대전제로써 1962년 나온 영화이니 영화 속 시점을 60년대 초반으로 잡겠다. 참고로 이 시기는 일본에서 전후 복구와 경제성장의 결과가 눈에 띄게 드러나기 시작하는 해이다. 먼저 슈헤이 히라야마(류 치슈). 그는 2남 1녀의 아버지로서 장남은 이제 막 결혼 3~5년 차에 접어 들은 것으로 보이고, 둘째 딸은 24살의 숙녀이다. 이로부터 슈헤이는 대략 50대 중후반의 혹은 그 이상으로 이제 곧 노년의 길에 접어들 인물로 추정할 수 있다. 아마도 약 20년 전 제2차 세계대전(1939 - 1945년) 당시 그는 30대 정도였을 것이다. 과거 그의 선원이었던 요시타로 사카모토(가토 다이스케)와의 조우(遭遇)로써 우리가 알게 된 사실은 그가 전시(戰時)에 해군 함장이었다는 이력이다. 즉 그는 2차 세계 대전을 관통한 인물이다.


다음은 표주박이라는 별명을 가진 사쿠마(토노 에이지로). 그의 딸의 외모, 슈헤이와 친구들의 학창시절 스승이었다는 정황으로 추정해본다면 그는 슈헤이에 비해 적게는 10살 많게는 20살가량 많은 인물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나이를 60대 중후반 혹은 그 이상으로 추정해 볼 수 있겠다. 약 50년 전 그가 10대였을지 20대였을지 확실하지 않으니 그의 제1차 세계대전(1914 - 1918년) 출전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는 시류(時流)를 인지할 수 있는 나이에 그 시기를 목격한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마지막으로 슈헤이의 장남 코이치(사다 케이지). 그는 30대 중후반쯤으로 보이며, 이제 1962년 이후의 일본을 관통하게 될 인물이다. 말하자면 사쿠마 - 슈헤이 - 코이치로 이어지는 세대의 흐름을 조명하는 것은 결국 일본의 20세기 전체를 관통하게 되는 것이다.


'무엇을 쓸 것인가? 하는 물음에 대하여 나는 항상 그 인간이 처해 있는 현실을 써야 한다고 대답한다.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물음에 대하여 나는 가급적이면 그것(즉, 인간이나 인간의 존재를 드러내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재현해야 한다고 대답한다. 끝으로, 왜 그것을 그렇게 쓸 것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 나는 소신을 가지고 대답한다. 어떤 것, 즉 인간과 인간이 처해 있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기만 하면 대부분의 경우 상당한 미적 가치를 갖는다고 나는 믿는다.'


위는 소설가 하일지가 그의 소설 <경마장 가는 길>의 작가의 말에 담은 이야기를 발췌한 것이다. 결국 <꽁치의 맛>은 딸을 시집보내는 이야기이다. 단지 집안 일일뿐일 수도 있는 소사(小事)를 2시간 남짓 그대로 재현하는 이 영화의 미학을 나는 하일지의 말에서 찾는다. 그리고 내가 인물의 나이를 추론해가면서까지 이들을 중심으로 하는 소사를 일본의 역사라는 대사(大事)로 확대하려는 것도 같은 맥락의 이유 때문이다. 여기까지가 확대해석이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는 내용의 글을 써 내려가기 위한 일종의 나의 변명이다.


2. 권위의식(1)


슈헤이는 첫 등장에서 프레임의 좌측 끝단에 위치해 있다. 그는 사내 여직원이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는데, 아직은 자신의 딸과 동갑인 여직원의 결혼 소식으로부터 딸의 결혼까지 연상하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딸이 출가외인이 되는 것은 아직 자신에게 먼 얘기라는 속내일까? 그는 그의 친구 슈조 가와이(나카무라 노부오)의 딸의 맞선 주선에도 영 시큰둥해 보인다. 일종의 수미상관 구조를 취하며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도 슈헤이가 있다. 차이가 있다면 첫 등장 때와 데칼코마니를 이루며 프레임의 오른쪽 끝에 놓여있는 그의 위치 선정이다. 오늘은 딸 미치코 히라야마(이와시타 시마)를 시집보낸 날이기 때문인지, 그는 어둠 속에서 눈물을 보이고 있다. 시작과 끝의 프레임 속 그의 위상과 감정을 180도 뒤바꿔 놓은 것은 무엇인가? 그의 '영역' 내의 변화는 우선은 딸의 존재의 유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딸의 존재가 얼마나 거대했길래 시종일관 표정에 미소를 머금고 있던 사람이 끝내 눈물을 보이는 것인가? 주야장천 술을 마셔도 흔들림 없던 사람이 왜 이토록 취해버린 것인가? 인간은 어차피 외로운 존재라는 사쿠마 선생님의 말처럼 그도 이제 외로워 보인다. 처연해 보이기도 했고, 그 모습에 나도 같이 슬퍼지기도 했다. 집안에 남아있는 사람이라곤 철부지 막내아들뿐인데, 이제 그의 남아있는 노년은 어찌 될까 안타깝기도 했다. 그런데 좀 너무한다. 뭔가 큰 오산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본인 집에 들일 냉장고 사기 위해 돈 꿔달라고 얼굴 비추는 장남에게는 군소리 없이 돈을 보내던 사람이(심지어 그는 골프채를 살 돈까지 더 빌려 간다), 좋아하는 여인이 버스 안내양이라는 막내아들의 실없는 대답에 아무렇지 않게 수긍하던 사람이 정작 집에서 가족을 위해 뒤치다꺼리를 다한 딸이 시집을 가니 키워봐야 소용없다고 앙앙댄다. 나는 서두에 '영역'이라는 표현을 했다. 자신의 영역이 표시되어 있는 곳에 암컷을 묶어두고 심지어 암컷에게 사냥까지 맡기는 수컷 사자들처럼, 슈헤이는 딸에게 소유격을 들이대며 집안을 지킬 것을 당연시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집안을 카메라가 담아낼 때는 항상 가족 구성원들이 잠깐이라도 함께 놓여 있었다. 그런데 딸이 출가하는 날 처음으로 완전히 빈 공간인 체로 카메라에 담긴다. 딸의 부재가 주는 허전함의 공기를 우리에게 고스란히 전달해주겠다는 듯이, 공허한 비어있음의 정서를 스크린을 뚫고 우리에게로 스며들게 하려는 듯이, 그녀의 존재는 이 곳에서 그만큼 밀도 있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이렇게 <꽁치의 맛>에는 '집 안'의 중심에 여자가 있다. 슈헤이의 집에 딸이 있었듯이, 아들의 집에는 며느리 아키코(오카다 마리코)가, 슈헤이가 친구들과 자주 가는 선술집엔 주인집 여자가, 사쿠마 선생님이 운영하시는 라멘집엔 선생님의 딸이, 사카모토에게 이끌려 가게 된 바에는 주인 마담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사무실에 처음 들어오는 사람도 사무실 정리를 해주는 여직원이었다. 60년대 일본에서는 집안의 살림살이를 지키고 있는 것은 모두 여성이다.


그런데 주도권은 여성에게 없다. 자신의 남아있는 여생의 막막함 해결이라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이유로 딸의 결혼 유무를 정하는 것은 남성들이고, 시집을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한들 결혼 상대와 시기를 결정하는 것 또한 남성들이었다. 우리는 이와 관련된 두 가지 사례를 영화 속에서 찾을 수 있다. 부인과 사별하고 부인의 대체자로 딸을 자리매김 함으로써 딸의 시집을 불가하게 했던 사쿠마 선생님의 모습이 첫 번째 예가 될 것이고, 미치코의 마음속 정인 미우라 유타카(요시다 테루오)에게 의중을 묻는 일에 개입하는 대리인으로서의 역할을 아버지와 오빠가 하였다는 것이 두 번째 예가 될 것이다. 심지어 일은 다 벌여놓고 뜻대로 안되니 한다는 말이 '그래도 담담해 보여 다행이다'라니, 24년을 키운 자신의 딸의 심리도 헤아리지 못하는 무지를 뽐내기 일쑤다. 이렇듯 이곳 남자들의 온화한 미소의 내면에는 본인들도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은 '권위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결론적으로 서두에 상정했던 삼대(三代)를 거치면서 뚜렷이 보이는 공통점은 '집을 지키는 여성'이며, 조금씩 희석되곤 있지만 그것을 당연시 여기는 '남성들의 저변의 권위의식'이다.




3. 권위의식(2)


비단 이러한 권위의식은 그 대상이 여성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 또한 두 가지 사례를 거론할 수 있겠는데 슈헤이는 자신의 스승인 사쿠마 선생님의 라멘집 라면이 맛없다며 조롱성의 발언을 하는 요시타로의 언행에도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내 마음을 조마조마하게 한 쇼트는 결혼할 사무실 여직원에게 쥐어 주리라 예상되는 돈 봉투에 서슴없이 돈을 넣는 행동을 등 뒤에서 찍은 쇼트이다. 만약 이것이 감사 인사를 전하기 위해 사무실까지 찾아온 사쿠마 선생님의 시점 쇼트였다면 끔찍하다. 사쿠마에게 쥐여'준' 돈 봉투와 여직원에게 쥐여'줄' 돈 봉투를 동일시하는 행위는 결국 사쿠마를 자신의 손 아랫사람으로 자리매김하는 행위이지 않겠는가?


여성에게 향하는 권위의식의 뿌리를 한국 못지않은 일본의 오래된 남존여비에서 찾겠다는 구태의연한 이야기를 해볼 수 있다면, 선생님에게 향하는 권위의식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두 갈래로 생각해 본다면, 먼저 말할 수 있는 것은 돈의 맛이다. 말하자면 회사 간부, 교수 등 소위 말하는 사회 지도층, 중산층에 속하는 슈헤이와 친구들의 계층적 측면에 기인한다는 뜻으로 일종의 기득권으로서의 관성이 이들을 모든 측면에서의 권위 주의자들로 만들어 놓은 것은 아닐까? 두 번째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역사적 관점에서의 이야기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서두에 언급했던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슈헤이의 과거를 끌고 와야 한다. 슈헤이는 바에서 흘러나오는 군가에 맞춰 군무를 보이는 요시타로의 행동에 경례와 미소로 화답한다. 딸의 결혼식 날 홀로 간 그 바에 앉아 있던 이들도 전쟁을 회상하는듯한 행동을 보이는데, 이들에겐 아직도 그 시절의 제국주의와 패권주의가 뼛속 깊이 내재되어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것이 지금의 권위의식으로 발현되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전쟁에서 승리했다면'이라는 가정을 하고 있는 것을 보니 아직도 패전을 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양이며 자국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도 없는 모양이다. 훈육으로부터 비롯된 어긋난 역사의식과 자본으로 비롯된 지위로부터 창발되는 권위의식에 점철된 자들이라니. 집 지키기는 모두 여성에게 맡겨두고 자신들은 타성과 회안에 젖는 역할을 담당할 뿐이라니. 내가 마지막 쇼트에서의 슈헤이의 눈물에서 느낀 불편함은 단순히 그의 남성 중심적 사고관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에게 내재된 어긋난 권위의식의 중독으로부터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꽁치의 맛>에서 언성을 높이고 눈물을 보이는 인물들은 모두 여성이다. 남성들은 온화하고 젠틀하며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발버둥 칠 뿐이다.




4. 성별 전복


나는 위의 권위의식(1)의 글 막바지에 남성들의 권위의식이 조금식 '희석되고 있지만'이라는 가정을 달았다. 아들 코이치의 집안으로 현미경을 들이대는 것이 이에 대한 답이 될 것이다. 슈헤이와 코이치의 영역에 차이가 있다면 공통적으로 여성이 집안을 일구어 나가고 있기는 하지만(슈헤이는 딸, 코이치는 아내) 경제권의 주체는 다르다는 점일 것이다(슈헤이는 본인, 코이치는 아내). 경제권은 결국 집안에서의 권위를 의미한다. 즉 3세대를 거치면서 남근 주의는 이제 필터링 되기 시작해 앞전 세대까지 가장의 위치를 남성에게 내놓았던 여성들이 서서히 집안의 지배자의 역할로 급부상하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부터 슈헤이의 눈물에서 남근 거세에 대한 두려움까지 읽어 내겠다고 한다면 과언일까? 


딸을 시집보낸 지금 그는 이제 직접 집안일에 손을 대야 한다. '집 밖'에서 남성으로서의 지위를 굳건히 지키게 만들어주던 '집 안'의 여성의 존재를 잃어버린 반쪽짜리 남성이 된 것이고, 부상(浮上) 하기 시작한 여성의 지위라는 시대의 흐름은 그에게 남성성 축소라는 막연한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슈헤이의 성역에 딸이 존재했을 때 친구들의 농담에 속는 사람이 술집의 주인 마담이었던 것에 반해 딸의 시집 직후에 농담의 피해자는 슈헤이로 과녁이 맞춰져 있다. 이때 이 농담에 술집 마담이라는 여성이 동조하고 있기도 하다. 즉 이제 그는 여성의 위치에 자리매김하여, 남성의 지위를 갖은 여성으로부터 '농담을 당하는 자'로 분하기 시작하는 셈이다. 그의 입장에서 남성성을 연명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는 어쩌면 친구 카즈오(미카미 신이치로)와 마찬가지로 딸을 대신할 젊은 부인을 구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논지를 부연하기 위해 코이치의 집에 대하여 조금 더 첨언하겠다. 코이치와 그의 부인 아키코(오카다 마리코)가 프레임에 걸리는 방식은 서두에 언급한 슈헤이의 위치 선정과 유사하다. 부엌에서 포도를 먹는 아키코와 대칭적인 위치에 앉아 있는 코이치. 이들은 슈헤이의 처음과 끝과 마찬가지로 데칼코마니의 양 극단에 위치하고 있는데(심지어 딸이 시집가기 전 슈헤이와 아키코의 위치가 같고, 시집 간 후의 슈헤이와 코이치의 위치가 동일하다), 이것은 남성, 여성의 지위 동일화이자 남녀 성별 전복의 표현이기도 하면서 더 이상 눈을 맞추지 않는 변질된 3세대의 부부관계에 대한 영화적 작법으로 보이기도 한다.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있는 코이치의 쇼트로 집에 막 도착한 아키코가 침입하는 순간 코이치는 다시 쇼트 밖으로 빠져나가 그녀만을 프레임에 위치시키는 동선의 이동 또한 같은 맥락에서 사회적 현상을 대변하는 것으로 보인다.



5. 오즈의 예견


지금까지 집요하리만큼 <꽁치의 맛>속에 놓여있는 인물들의 행위에 대한 원인 파악에 몰두했다. 무리한 도식화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고, 이것이 과연 영화 비평인가라고 자문하다면 다소 회의적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행위들로부터 내가 얻은 결론은 20세기를 시작하여 세기말을 향해가는 궤적의 중반을 조금 넘은 1962년, 공시론적 관점이든 통시론적 관점이든 몇몇 인물들로 대변되는 당시의 일본의 모습에는 무엇인가 불균질함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정적이고 무덤 한 듯 보이는 외연에 비해 내면은 서서히 곪아가고 있는 듯 보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것은 거품경제로부터 비롯되기 시작한 일본의 잃어버린 10년(혹은 20년, 30년)에 대한 역사를 알고 있는 50년 후 2018년의 나이기에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원래 역사 안에 놓여 있는 사람은 지금의 역사를 체감하지 못하는 법이지 않은가? 그런데 오즈만큼은 내다보고 있었던 것 같다. 1세대에서 2세대로 이어지며 서서히 기울어지는 가세의 원인을 포착하고, 현재의 3세대를 들여다보고 있는 것을 보니 그는 이것이 초래할 어떤한 붕괴에 대하여 우려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시퀀스가 끝날 때마다 등장하는 삶의 곳곳의 설정 쇼트를 통해 이러한 우려는 일본 전역으로 퍼진다. 


<꽁치의 맛>은 일본의 미래를 내다본 오즈의 지적인 예견의 영화이며, 동시대의 파수꾼이었던 그의 자문의 영화이다. '우리 잘 가고 있는 건가요?'




★★★★★ (별 5개)

우리 잘 가고 있는 거죠? (오즈의 예견 혹은 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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