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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란잔 Aug 19. 2018

한 몸 두 얼굴

굿타임(GOOD TIME, 2017년 作)


한 몸 두 얼굴 - 굿타임(GOOD TIME, 2017년 作)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이 영화의 미장센이 오로지 관객에게 시, 공간적 정보를 전달하거나 혹은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서만 기능한다는 생각이다. 물론 대부분의 영화들이 관객 친화적인 미장센을 구사하기는 하지만 어떤 영화들의 경우 형식으로 작용해 주제와 맞닿아 있기도 하고(아마도 <시민 케인>의 무수한 딥포커스의 쇼트들), 어떤 영화들에서는 인물의 심리나 그의 특성이 상징화되어 나타나기도 한다(아마도 <사이코>의 노먼 베이츠(안소니 퍼킨스)의 여관 밀실의 박제된 새의 모습 등). 나에게 샤프디 형제의 영화 <굿타임>은 그런 자장에 속하는 영화로 보인다.


<굿타임>은 닉 니카스(베니 샤프디)의 얼굴로 시작해서 닉의 얼굴로 끝난다. 일반적으로 수미상관의 구조는 리듬이면서 강조다. 그 어법을 따른다면 닉의 얼굴'들'은 두 가지를 강조하는 것이다. '닉' 그리고 '얼굴'. 은행 강도를 무사히 마치고 도주하던 중 (아마도 은행원이 넣어놨을) 범죄자 검거용 적분홍빛 페인트 탄이 가방 밖으로 분사된다. 자신의 얼굴이 '적화(赤化)'되니 닉은 '내 얼굴!'을 부르짖는다. 이후로 약 두 번 정도, 깨진 유리에, 시비 붙은 구치소 패거리들의 주먹에 그의 얼굴은 '피칠갑'이 되기 바쁘다. 그는 왜 이렇게 자신의 얼굴이 중요한 것일까? 그는 무엇으로부터 자신의 얼굴을 보호하고 싶은 것일까?


붉은색이 폭력과 생명을 동시에 상징한다는 것은 불문가지이다. 닉이 본인의 얼굴이 적색으로 뒤덮이는 것을 악전고투하며 막으려는 것은 당연지사 물리적인 폭력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생명의 탄생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다. 닉의 내면을 침탈하려는 또 다른 정체성이라는 이름의 생명 말이다. 부연을 위해 잠시 유보해놓은 중요한 이름을 언급해야 한다. 닉의 형 코니 니카스(로버트 패틴슨). 문득 이런 의문을 품어보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왜 형 코니는 얼굴을 중히 여기지 않는 것일까? 아니! 분명히 코니도 닉만큼이나 자신의 얼굴을 지켜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자신의 최후의 보루인 나이 든 애인에겐 정인으로, 동생 탈취작전을 버린 뒤 잠시 숨 고르기를 하기 위해 입성한 흑인 소녀 크리스탈(탈리아 웹스터)의 집에선 어머니의 퇴근을 기다리는 옆 동네 청년으로, 마약을 찾기 위해 들어간 놀이공원에서는 보안직원으로. 코니는 '신분'이라는 이름의 얼굴 지키기를 영화 내내 실천하고 있다. 당연히 그의 신분 위장은 이 사회를 지켜나가는 공권력, 사람들의 경계심 등으로부터의 발현이겠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조금 다른 이야기이다. 지적장애인 닉의 내면을 침탈하려는 또 다른 정체성이라는 자리에 코니를 위치시키겠다는 뜻. 그렇다면 코니의 얼굴 지키기는 닉이라는 정체성으로부터 인 셈이다. 즉, <굿타임>은 닉의 의식의 로드무비이다. <굿타임>의 미장센은 닉의 의식의 환유로써 기능한다.

하늘을 부유하던 카메라는 한 건물에 집중하고 아마도 그 건물 사무실 어딘가에 앉아 있을 닉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프레임을 가득 채운다. 빠른 호흡의 영화가 닉의 얼굴만큼은 상대적으로 긴 호흡으로 골똘히 비춘다. '닉이다. 닉이 있다. 닉만 있다.' 우리의 뇌리에 닉의 존재에 대해 각인이 될 때쯤 정신과 의사(피터 버비)와의 면담이 시작된다. 왜 자신의 이야기를 받아 적냐고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는 닉의 모습. 알 수 없는 그의 표정이 왠지 불안 불안하다. 불안감이 체 가시기도 전에 닉의 공간에 코니가 침입한다. '닉만 있다'에서 '닉과 코니가 있다'로 변질되는 순간. 이제 닉의 정신은 둘이 되는 혼종의 시간 속으로 밀려들어간다. 코니는 복도에 있는 다른 지적 장애인을 가리키며 말한다. '네가 저란 사람이라고?' 즉, '내가 저란 사람이라고?'


이 용감한 형제는 은행을 털기 전 같은 얼굴을 뒤집어씀으로써 자신들의 일몸 다(多)의식 혹은 일두(頭) 다의식이라는 존재에 대한 증명의 방점을 찍는다. 닉은 가면을 벗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려고 하고 코니는 이를 말린다. 시작된 정체성 쟁탈전의 서막. 경찰에 붙잡히면서 닉의 의식은 완전히 코니에게 침탈당하고, 닉은 자신의 의식 속에서 클로즈업과 부감, 롱숏까지 사용해 가며 코니를 부단히 쫓아다닌다. 코니는 경찰이 지키고 있는 병원에서 닉으로 보이는 사내를 빼내오는데, 이 시점은 정신과 의사가 구치소에 찾아와 닉에게 모든 일은 형이 시킨 것이고 너의 잘못은 없다는 논지의 말을 전한 이후이다.


그러니까 소수자를 위한 사회시스템이 작동하기 시작한 이후라는 뜻인데 이것은 코니의 폭주 유발에 적합한 동인이다. 그는 그의 입으로도 내뱉었듯 사회 시스템과 공권력 불신론자이다. 그렇다면 코니는 닉의 '사회 시스템에 대한 저항의식'의 정체성이 되는 셈이다. 그러니 코니는 닉의 의식을 원복 시키려는 정신과 의사라는 이름의 사회 시스템이 두려웠던 것이다. 닉의 무의식 속 코니의 공포는 크리스탈과 함께 본 TV 속 리얼리티 프로그램으로 형상화된다. 닉의 머리가 이발되었던 시점도 아마 코니가 염색을 하던 이 시점 즈음이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사회 시스템의 보호를 받고 있는 닉의 외연과 그의 기저에 깔려있는 사회시스템에 대한 불안요소라는 내면의 파열음이 닉과 코니라는 정체성 격돌의 근원인 것이다. 이것을 의미론적인 측면에서 개인의 문제에서 사회문제로 확장시키면 결국 <굿타임>이 사회를 지켜주는 울타리에 대한 불신과 공포의 영화가 되는 것이다. <굿타임>에서는 구치소, TV 속, 놀이공원에서 흑인들은 시스템과 공권력의 피해자로 분한다.


사실상 비약으로 봐도 무방한 나의 논조를 끝까지 밀고 나가겠다. 나는 코니가 닉인 줄 착각했던 레이(버디 듀레스)가 의식 속에서 물화된 닉의 분신으로 보이기도 한다. 아니 레이가 코니에게 맥락 없이 협조적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나뿐인 것인가? 코니가 경찰에게 붙잡혀 경찰차의 그물형 쇠창살로 얼굴이 분절되는 순간(의식 혼란의 뿌리가 제거되는 순간) 레이는 낙사한다(목적을 달성한 분신은 회수된다). 사건이 일단락되자 의사는 한번 더 등장해 형은 책임감을 갖은 옳은 일을 했고 '자기 자리'로 찾아갔다고 말한다. 자기 자리? 감옥에 갔을 코니가 자기 자리를 찾아간 것이라고? 분명히 하자. 제 자리로 돌아온 것은 닉의 의식뿐이다. 

지적장애인의 의식 속은 어떠할까? 진정으로 아직 발달하지 못한 체 머물러 있는 것일까? 어쩌면 그들은 뇌의 감옥 어딘가에 갇혀있는 몸의 주인의 의식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 중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혹시 닉의 몸의 원주인은 닉이 아니고 코니인 것일까? 잠시 동안 원주인의 의식 코니였던 순간. 그 순간이 바로 'Good Time' 

 


★★★★☆ (별 4개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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