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소리를 들려줄게] 0편
학교에서 늦게 돌아왔다. 저녁 9시쯤 집앞에 주차하고 고개를 들었다. 침실 전등이 아직 켜 있다. 아이가 아직 잠들지 않았다는 뜻이다. 동파방지용 전선을 차에 연결하고, 앞유리에 보호막을 씌웠다. 아침부터 눈이 계속 내려 공기 중에 습도가 높을 수 있다. 어쩌면 내일 아침에 차를 쓰려면 얼음을 긁어내야 할 것이다.
오후 내내 몸이 무거웠다. 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 아파트에 들어섰다. 아침에도 이상하던 엘리베이터가 고장났다. 걸어서 집으로 올라갔다. 별 운동은 되지 못했다. 고장 난 엘리베이터는 3층에 멈춰서 있었다. 버튼을 눌러도 눌리지 않았다.
아기가 아직 잠들지 않았지만,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 여는 소리를 들었을까, 아기가 '아빠!'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방에서 뛰어나온다. 활짝 웃는 얼굴로 발까지 동동 구르면서 반겨주는 모습이 예뻐 손도 씻지 않고 꼭 껴안아줬다. 옷을 갈아입고 아이와 놀았다. 오늘은 나도 힘이 없어 레고를 오래 하진 않을 생각이었다. 어쩐지 아기도 조금 피곤한지, 격렬한 놀이를 하진 않았다. 대신 평소 못 보던 모양으로 레고를 사용했다. 장난감 후라이팬에 분홍, 빨강 레고 블럭 몇 개를 놓고, 미리 그럴듯하게 만들어 둔 주걱으로 요리하는 시늉을 냈다.
"햄 넣고, 지글지글, 지글지글"
햄이라니! 색깔도 잘 선택했다. 여기에 새로운 놀이를 하나 더 찾은 듯 했다. 얼마 전 중고 가게에서 새로 산 장난감 톱으로 뭔가를 자르려고 하는 것이었다. 이참에 톱 쓰는 법이라도 알려줘볼까 싶어, 레고 네 개를 붙여 바닥에 놓았다.
"슥삭 슥삭, 이렇게 톱을 똑바로 세우고, 앞뒤로 살살 움직이면서 자르는 거야. 손 조심!"
몇 번 손을 잡고 어떻게 하는지 요령을 알려줬더니, 혼자 해보기도 했다. 힘을 줘서 자르려고 하길래, 조심스럽게 톱 다루는 방법을 다시 알려줬다. 톱으로 자른 레고 - 아까 그 레고햄 -를 다시 붙였다가 또 잘랐다가 하며 집중하길래 잠시 물 한잔 하고 잘 준비를 했다.
얼마나 건조했는지, 오른쪽 발등 바깥쪽에 굳은 살이 생겼다가 급기야 베인 것처럼 통증을 일으켰다. 며칠 전에 로션을 조금 발랐는데, 꾸준히 바르지 않아선지 오늘은 걷기 어려울만큼 아팠다. 괜히 아픈 시늉을 내면서 아기한테 굳은 살을 보여줬다.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아기는 쉽게 속았다.
"아빠, 약 발라."
마땅한 연고가 없어서 아기용으로 산 비판텐 연고를 발랐다. 하얗게 '약' 바른 발을 아기한테 보여주니 뭔가 걱정스러운 목소리와 표정으로 웅얼거린다. 지난 번에 내 실수로 아기 손에 화상을 입은 적이 있는데, 그때 이후로 "아파=(걱정스런 표정)=약 발라" 순서로 자주 말했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을 이렇게 조금씩 기르는 것이구나 거창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불을 껐다. 걱정스럽게 내 발을 보고 있던 아기에게 괜찮다고 이야기하고 안아줬다. 평소 같으면 "불 켜!" 하고 소리 지를텐데, 졸려웠는지 별 반항하지 않았다. 이부자리 위에 조용히 내려 놓으니까 말없이 가만히 눈 뜨고 나를 본다. 그러더니.
"아빠 손 잡고."
측은지심인가. 아빠 손 잡고는 아기가 뭔가 하고 싶은 게 있을 때 내 손을 잡고 이끌면서 하는 말이다. 평소 자기 전에 내가 손 잡으려고 하면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저으며 몸을 돌려버렸는데, 오늘은 좀 달랐다. 아기 옆에 나란히 누워 두 손을 잡았다. 엄지 손가락 하나를 아기 손바닥에 넣고 다른 손가락으로 감쌌다. 아기도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편안한 모양새로 쥐었다. 나는 눈을 이미 감은 척 하고 어둠 속에서 아기 얼굴을 살폈다. 두 눈을 뜨고 어딘가 바라보는 모습은 늘 신기하다. 무슨 생각을 하기에 저렇게 말없이 조용할까. 항상 떠들려고 하는 어른들의 눈빛과는 역시 다르다. "잘 자"하고 말한 뒤, 두 손으로 온기를 느꼈다. 아기는 곧 잠들었다.
2018년 4월 3일 밤, 눈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