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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방전 Apr 26. 2020

내가 속하지 않은 방 / 빌헬름 함메르쇠이의 인테리어

 


<Interior> , Vilhelm Hammershøi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그 방을 생각하며> 中 ,  김수영 <그 방을 생각하며> 中 ,  김수영



공간에 속하는 법

 

 함메르쇠이가 그린 집 안에서 인물은 정물 같다. 한동안 있는 자리에서 발을 떼지 않을 의자나 협탁 같기도 하고 응시를 수련하는 듯한 액자, 이도 저도 아니면 열린(혹은 닫힌) 방문, 미동도 하지 않을 방들 사이의 벽 1,2,3 같다. 그는 유독 이 방에서 저 방을 들여다보거나 내다보는 시선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그래서인지 열린 방문을 통해 이어진 방들은 자주 길처럼 보인다. 그 속에 머무는 사람도 이 순간만큼은 길 위에 멈춰 지도라도 살피는 사람 같다.

 

<Interior>에선 내가 있는 이 방 말고 저 문턱 너머가 자꾸 눈에 들어온다. 저 너머가 더 내밀한 곳일까? 집 안에 또 누가 있을까? 소소한 질문들을 밟고 문턱을 넘나들다 보면 모든 것이 정지해 있는 듯 보이는 이곳에서도 움직임을 느낀다. 사방을 채우고 있는 색깔들도 어딘가 다른 곳에 있다가 저 문을 통해 걸어 들어와 이 시간을 위해 잠시 앉아 있는 것만 같다. 이곳에 속하기 위해서. 방이 늘 그렇듯, 공간은 누구도 몰랐던 제자리에 모두가 속하는 순간 숨을 쉰다. 그런데 제자리라는 건 어떻게 찾아가는 것인가? 조용히 끊임없이 변화하는 공간에서 매번 제자리를 찾아가는 일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내 방에서 사는 일도 결코 수월하지는 않은 거다.


함메르쇠이 그림은 계속해서 내부의 안팎을 서성인다. 이 서성임은 불심한 기웃거림이 아니라, 쉬지 않고 무언가를 열고 닫는 대화에 가깝다. 그는 어디서 무엇을 향하든, 자신은 늘 서성이는 것부터 시작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방으로 들어와 서성이고, 의자를 끌어다 놓고 서성이고, 문을 열고 서성이고, 그 문을 향해 몸을 앉힐 때까지 또 한 번 서성이고, 고개를 숙이고 서성이고, 하던 일을 하며 서성이고...


그는 공간에 부착된 사물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방 안 모든 존재가 맺고 있는 관계의 모양을 보여준다. 이것은 결국 이들이 어떻게 서로에게 속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 방법이기도 하다. 그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단 하나도 빠짐없이 정물(情物)이 되는 순간을 그린다. 무척이나 고요하지만 적응보단 혁명에 가까운 시간. 방이 혁명이 될 수 있다면. 혁명이 있는 것들을 펄펄 끓이고 녹여 새로운 형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각자 갖고 있는 선( line)들을 지우지 않고 다만 놀랍게 재구성하여 보여주는 일이라면. 놀랍도록 고독하게. 고독이 혁명이 될 수 있다면 말이다.



내가 속하지 않은 방


성미산로 17길 자취방에서 혼자 살던 내내, 방은 온전히 내 것이었다. 모든 물건들이 나를 통해 놓였고 그 안에선 공기마저 모두 내 것 같았다. 나만의 공간이 생긴 이후론 집 안에 머무는 것이 제일 좋았다. 방은 단지 바깥을 차단해주는 내부일 뿐 아니라, 정신의 물리적 외부이기도 했다. 정신은 방 안에서만큼은 사교적이었고 호의적이었다. 그 완전한 방이 있던 세월만큼은 걱정이 많아도 마음이 쉬이 거칠어지지 않았었다. 밖에서 어떤 부조리한 일을 겪어도, 언제나 그 방에선 내 자리를 찾아갈 수 있었다. 그 공간 모든 것이 내게 속했듯, 나도 언제나 그들에게 속해 있었다.


독일에 온 후, 정신의 육체 혹은 나의 물리적 내부가 사라진 기분이 자꾸 들었다. 방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숨어도 노출되어 있는 기분이 들었고, 들어오면 나가야 할 것 같고 나오면 어디든 들어가고 싶었다. 이렇게 가다간 (그게 뭐든 내 육신의 피부만 뚫고 들어오면) 금세 모든 걸 점령당할 것 같았다.

혁명은 개뿔, 혁명을 투사할 방조차 사라져 버렸다. 한때는 내가 나를 맘 놓고 지켜볼 안전한 방을 갖는 것, 그 자체가 혁명이었으니까 나는 어쩌면 사실상 운 좋게 이뤄냈던 작은 혁명의 달콤함을 제 발로 걷어차고 이곳에 온 건지도 모른다. 떠나던 날 나는 뭘 얻고 싶어 했던가? 열정과 몸뚱이만 있으면 될 줄 알았는데, 정신은 늘 내게 육체 말고 또 다른 좀 더 완전한 물리적 공간을 달라고 요구했다.



여기는 방이 아니라 거리이며

나는 다만, 여기를 걸어서 지나가는 거라고

벽과 벽 사이를 서성이며 생각하는 것이다


 <방을 위한 엘레지> , 진은영



그러나, 떠나온 나를 긍정하자면 나는 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모든 게 낯선 거리로 들어서면 혼자만의 방이 아니어도 나를 더 잘 알고 새로운 방법으로 나를 지킬 수 있으리라 기대했었다. 기대는 언제나 금물이다.


낯선 땅에서 방을 잃고 나는 다만 끊임없이 묻는다.

어디에 속한 걸까 나는?  내부가 사라진 기분이야. 내 내부는 어디서 볼 수 있지?

외부는 어디부터고 내부는 어디까지인 거야?  결국 모든 경계는 환상이거나 일종의 최면 아닐까?

'나'라는 방을 어디까지 닫고 어디까지 열어야, 나를 지키면서 세상을 지켜볼 수 있는 걸까?

 

타국에서 방은 아주 자주 강제적으로 '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난 아직도 이 거리의 방에서 속할 곳을 찾지 못했다. 내부와 외부를 가르거나 또는 가르지 않을 준비가 여전히 되어 있지 않아서인 것 같다. 아주 잠시도, 쉬어갈 선(lines)들이 보이지 않는다. 언제쯤 선을 발견하고 그 선으로 내부를 지을 수 있을까? 이토록 오래 서성일 줄 떠나기 전에는 몰랐다. 이토록 오랫동안 어디에도 속할 마음이 없다고 고집을 피울 줄도 몰랐다.


    

<A Room in the Artist’s Home in Strandgade, Copenhagen, with the Artist’s Wife>, Vilhelm Hammershøi


모티프는 선(lines)입니다. 이미지의 건축적 내용이라고 부르고 싶네요.
물론 빛도 중요합니다. 분명해요.
하지만 제겐 선이 제일 중요합니다.                                                                          

 빌헬름 함메르쇠이  



Vilhelm Hammershøi(1864.5.15 – 1916.2.13)

Vilhelm Hammershøi


덴마크 예술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화가,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의 선구자, 고독을 그리는 화가, 진정한 의미의 개인주의자(a true individualist) 등으로 불리지만 정작 화가 자신은 자신의 작품이나 영감에 대한 언급을 거의 하지 않았다. 몇몇 예술사가들은 그가 당대의 예술에 관심을 갖지도 않았고 그로부터 영감을 받지도 않았을 거라 추측한다. 인상파, 후기 인상파, 상징주의, 야수파, 초기 입체파까지 함메르쇠이는 당대 예술의 새로운 흐름들을 모두 알고 있었지만 그 어떤 조류에도 동참하지 않았다.  


현대 가장 많이 거론되는 화가들 중 한 명이지만, 죽고 난 직후엔 한동안 잊히기도 했다. 당시 유행했던 아방가르드 운동 때문인데, 그들 관점에선 함메르쇠이 그림들이 구식이었다고 한다.


1898년부터 1909년까지 그는 코펜하겐의 크리스티안스하븐(Strandgade 30, Christianshavn)에 있는 한 아파트에 살았고 이곳에서 대부분의 인테리어를 그린다. 그림 속 뒷모습은 대부분 그의 아내 이다 일스테드(Ida Ilsted)가 모델이다.

Hammershøi’s 1890 portrait of his fiancée, Ida Ilsted (Copenhagen Statens Museum for Kunst)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와의 일화가 하나 있다. 릴케는 베를린에서 열린 한 전시회에서 함메르쇠이가 그린 이다의 초상화를 보고 단숨에 매료돼 그 길로 함메르쇠이에 대해 써야겠다 다짐하고 그를 보러 코펜하겐으로 떠나는데(1904년), 작품에 대해 일언반구 하지 않는 함메르쇠이 덕분에 릴케는 결국 이 프로젝트를 포기했다고 한다. 어쨌거나 그를 만난 덕분에 릴케는 함메르쇠이의 고요한 삶과 그의 들릴 듯 말 듯한 부드러운 목소리에 대해 전할 수 있었다.









함메르쇠이는 빨리 말해야만 하는 사람들 중 하나가 아닙니다. 그의 작품은 길고 느리죠. 당신이 그것을 이해하는 순간, 그의 그림은 예술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필수인지를 말해줄 겁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제목 이미지 - 함메르쇠이의 자화상이다



긴 사족 :

개인적으로 가장 사랑하는 화가 중 한 명이다. 늘 책으로만 보다 작년 겨울 스웨덴 예테보리 뮤지엄에서 만났다. 길에서 우연히 발견한 그의 전시회 포스터 덕분이었다. 한 작품 한 작품 아껴보며 너무 좋아서 연신 눈물을 훔치던 기억이 난다. 울면서 웃었다. 말로는 다 전하지 못할 만큼 아름다운 그림들이었다. 그의 캔버스는 대체로 크지 않지만 그림들이 가진 에너지는 거대하고 특별하다. 바라보고 있는 내내 가슴에 환하고 따뜻한 빛을 가득 쬐고 있는 것 같았다. 고독을 그린 화가라는 타이틀과는 좀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는 어마어마하게 따뜻한 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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