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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방전 May 04. 2020

우리가 풍경과 떨어지지 않을 때  /라쉬 툰뵤크    

생활 품위 (스웨디시 아티스트 연재 2)


풍경과 봄볕이 떨어져 보이는 건 무섭고 슬프다

여름과 개가 떨어져 보이는 건 무섭고 슬프다     


최정진, 「옥상에서 내려오는 동안  

 



툰뵤크의 사진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이유는 아마도 우리가 풍경으로부터 우리를 멀리 떨어뜨려 놓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자신을 멀리 떨어뜨려 놓음으로써 야기되는 슬픔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기후로든, 개로든 언제나 어딘가에 속해 있으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감각. 이것이 라쉬 툰뵤크가 우리에게 되찾아준 아름다움이다.




우리가 풍경과 떨어지지 않을 때


Öland, 1991


툰뵤크 사진에서 제일 좋은 것 하나를 꼽기는 힘들다. 빼어난 사진들이 다 그럴지는 몰라도, 그의 사진은 프레임 구석구석을 자꾸 들여다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막상 들여다보면 대단히 강렬한 사진도 아닌데, 언성 높여 고발하는 사진도 아닌데 눈길을 쉬이 거둘 수가 없다. 그리고 꾸준히 궁금해진다. 툰뵤크가 담은 구석구석의 '전부'를 포괄할 말이 과연 있긴 한지, 왜 계속해서 영락없이 '아름답다'는 말을 떠올리는지. 쓰레기 더미 따위 가리지 않고 피어난 들꽃 때문인지, 흔치 않은 진보라색 쓰레기 수거함 때문인지, 파란 하늘로 솟아오른 저 소년 때문인지.


엄밀한 다큐멘터리를 하고 싶은데, 다 제 얘기네요.

라쉬 툰뵤크  


툰뵤크 사진 속에서 우리의 시선과 감정은 쉬지 않고 다른 곳으로 흘러간다. 시간여행처럼 갑작스레 현실을 초월하는 운동이 아니라, 어릴 적 친한 친구 방에 놀러 갔던 날처럼 무엇이든 차근차근 둘러보고 이것저것 조심스레 만져보는 듯한 흐름 속에서 공감과 동경, 낯익음과 낯섦이 우리를 지나간다. 이 모든 시선과 감정들 사이에 놓인 사람과 물건, 색(color), 표정, 선(line), 방향, 길, 꽃, 날씨, 나무, 행위 등 모든 질료와 사건들을 품위라 부를 수 있을까? 종류와 밀도, 수준에 관계없이 모두 다. 가능하다면, 그의 사진은 결국 서로 다른 품위가 부딪치고 어우러지며 만들어내는 품위의 풍경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공과 자연의 품위가 함께 뒹굴고 나와 타인의 품위가 사랑하고 헤어지며, 반복과 일회(一回)의 품위가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풍경. 그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품위를 따로 분리해 버리지 않고 마침내, 우리 전부를 절박한 해석들과 불길함, 우스꽝스러운 신념과 사랑이 뒤섞인 곳으로 흘려보낸다. 이제껏 우리가 스스로를 얼마나 순아하게 여겨왔는지와 상관없이, 어떤 품위를 믿고 주장해왔는지와도 상관없이 무척이나 대담하게, 모든 물질이 되어 볼 때까지.


Untitled


"저는 그가 사회를 굉장히 비판적으로 묘사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 사람은 한 번도 명명백백히 드러내고 싶어 한 적이 없지만, 그의 사진은 상업주의나 현재의 서구 사회, 우리가 향하고 있는 곳들을 굉장히 잘 보여준다고 생각해요. "  

모우드 니칸데르(Maud Nycander, 영화감독, 라쉬의 배우자)



                            뉴욕의 변호사 사무실, 1997          스코라 놀이공원 Skara Sommarland, 1989
                                          란세테르 Ransäter, 1991
도쿄의 은행, 1999        스톡홀름 Stockholm, 1999                                                 


특히나 예전 작업들에선 이상하고 독특한 상황들을 찾아다녔습니다. 축제, 캠프장, 쇼핑센터 같은 곳들을 쉴 새 없이 다녔죠. 재미난 장소만 발견한다면, 거기서 몇 시간이고 서서 기다릴 수 있어요.
종종 미리 짜 놓은 것들을 찍는 게 아니냐는 질문을 받곤 하는데, 아닙니다. 항상 사진가로서 눈에 띄기 위한 노력은 하지요. 제가 카메라를 들고 있는 것만으로, 그 상황에 얼마나 영향을 끼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요.

라쉬 툰뵤크



생활의 품위와 풍경이 떨어지려 할 때


그래도 깨끗한 날 베를린 집 부엌, 라쉬 툰뵤크 사진을 떠올리며 플래시를 사용해 찍었다

채식을 지향하고 있다. 육고기와 계란, 치즈, 동물성 제품을 먹지 않으려 한다. 동물성 색소를 사용했거나 제품 실험을 위해 동물 실험을 했을지도 모를 빨간색 립스틱은 그러나 여전히 바른다. 일부러 종이 박스에 담긴 냉동 브로콜리를 사지만 루꼴라가 담긴 플라스틱 용기와 포장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가져온다. 부엌 한 귀퉁이에는 플라스틱 쓰레기가 늘 붙박이처럼 쌓여 있고 쓰레기 위 창가엔 대체로 무난하게 잘 자라나는 초록 식물들도 자라고 있다. 옷장에는 옷이 한가득이다. 대개는 구제 가게에서 장만한 것들이지만 여전히 몇 번 입지 않은 멀쩡한 옷들을 뒤로하고 새로운 것에 눈독을 들인다. 갖고 싶기 때문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내 생활 품위이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구조이다. 세상에 퍼지는 것은 종이와 쓰레기뿐이 아니다. 모든 것들이 이 세상 여기저기에 퍼져 파편으로 끝이 난다. 잔디밭이나 대뇌 피질 임의의 원 안에 이런저런 조각들이 포함된다. 모든 것이지만, 아주 조금씩.

엔트로피는 일종의 무너진 다원주의와 손을 잡고 걷는다. 주차장을 건너 해 넘어가는 곳까지. 모든 부스러기들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

우리는 해체되었다. / 우리는 산산조각 났다. / 우리는 우리 말고 다른 곳에 있다. / 우리는 질료인데. / 오직 힘만 모여들고 있다. 힘에 집중한다."


- 토마스 티드홀름 Thomas Tidholm, 툰뵤크의 사진집 『Landet utom sig』(1993, journal 출판) 서문에서


*질료: 형상을 갖춤으로써 비로소 일정한 것으로 되는 재료. 물질의 생성 변화에서 여러 가지의 형상을 받아들이는 본바탕이다. (네이버 국어사전)


툰뵤크의 사진을 보면, 우리가 먹고 입고 갖고 있는 모든 것들이 우리의 품위가 된 것 같다. 우리가 버린 것들과 버리지 못하는 것들은 물론이고, 그 사이에서 액체처럼 유예하고 정체하는 우리 자신이 우리를 갈수록 흩어지게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글과 말로 얼마쯤이나 이 어지러운 물질생활의 품위를 보완할 수 있을까? 예술은 예술가 자신의 생활 품위와 그 모든 풍경으로부터 얼마나 거리를 둘 수 있을까? 거리를 두거나 두지 않는 것이 작업의 내용과 선명성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까? 불투명하고 묵직하고 딱딱하고 부드러운, 우리가 끊임없이 실어다 나르고 만지고 있는 물질이 사실상 물질된 인간 품위의 전부이면 어쩌나? 의심은 점점 확신이 되어가고 있다. 툰뵤크는 그럴 듯한 일상의 프레임 밖으로 밀려났던 생활의 품위마저 돌아보게 한다.


 

라쉬 툰뵤크 Lars Tunbjörk (1956.2.15 – 2015.4.8)


스웨덴 보로스 Borås에서 나고 자랐다.  59세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 그는 독특한 색감과 특유의 스웨덴 정서를 잘 보여준 사진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세계 유수 잡지가 (The New York Times Magazine, Time, GEO 기타 등등) 다양한 주제의 사진을 실었지만, 정작 그는 그의 가장 큰 주제가 스웨덴의 일상과 스웨덴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라고 말했었다.


15살에 지역 신문 인 보로스 신문사 Borås Tidning에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고 곧 국립 신문 스톡홀름 신문사 Stockholms-Tidningen에서 프리랜서로 활동했다. 이후에는 스웨덴의 유명 일간지인 아프톤블로뎃Aftonbladet 및 다겐스 뉘헤테르 Dagens Nyheter와 같은 스웨덴 신문사에서 프리랜서로 일했다. 초기에는 흑백 사진을 주로 찍었고 스웨덴의 일상생활을 담은 흑백 다큐멘터리 사진으로 올해의 스웨덴 사진상을 수상했으나, 1990년대부터 컬러 사진으로 전환하여 1970 년대 미국 사진작가의 스타일과 색채를 탐구했다. 2005년, 파리 패션 위크 무대 뒤를 찍은 사진으로 월드 프레스 사진상(World Press Photo Award)을 받았다. 스트리트 사진과 인물 사진을 주로 찍었던 스웨덴의 흑백 사진작가 크리스터 스트롬홈(Christer Strömholm, 1918.7.22~ 2002.1.22)과 컬러 사진을 개척했다는 평을 받는 미국 작가 윌리엄 이글스턴(William Eggleston, 1939.7.27~)의 영향을 받았다.


뉴욕과 스톡홀름의 현대 미술관, 파리 퐁피두 센터와 유럽 사진 박물관,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국립 사진 박물관에서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으며, 사진집으로는  Landet utom sig(1993, journal 출판),  Office(2002, Journal Edition 출판), 『Home』(2003, Steidl Editions 출판), 『Vinter』(2007, Steidl Editions & Musée d 'Art Moderne de Stockholm 출판), 『I Love Borås』(2007, Steidl Editions 출판), 『Every Day』(2012, Diaphane Edition 출판)가 있다.


라쉬는 우리가 혼자가 아니었다는 것과 누군가 다른 사람이 우리 앞에  거대한 심연을 이해해주었다는 것을 느끼게  주었습니다.

TIME 사진부 국장  모클리 Paul Moakley  그의 부고 기사  


 스웨덴에는 툰뵤크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말이 하나 있다. 바로 '툰뵤크카레'(Tunbjörkare / 또는 툰뵤크란드 Tunbjörkland)다. 툰뵤크스럽다는 뜻의 이 말은, 그의 사진처럼 독특하고 특별한 정서를 지닌 이미지나 장소를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단지 기이한 풍경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솔직하고 기발한 태도를 일컫는 말일 것이라 짐작해본다.  


 카메라를 일종의 방패나 새로운 세상의 입장권으로 말하는, 모든 카메라 클리셰들이 다 제 얘기입니다.   

라쉬 툰뵤크


https://vimeo.com/124850025



흔한 수수께끼에 가까이 다가가 보십시오.
평범한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가장 평범한 것들을 놀랍게 바라보는 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노자『도덕경』 에서, 사진집 『Office』에 실린 글







참고 사이트

http://shooterfiles.com/2020/03/master-profiles-lars-tunbjork/

https://agencevu.com/stories/index.php?id=1510&p=80

https://pdnonline.com/features/photography-news/obituaries/obituary-lars-tunbjork-photographer-of-everyday-absurdity-59/

https://en.wikipedia.org/wiki/Lars_Tunbj%C3%B6rk

https://www.artsy.net/artist/lars-tunbjork

https://galerievu.com/series.php?id_photographe=27

https://artpil.com/lars-tunbjork/

https://www.theobservers.co/books-4/tag/Lars+Tunbj%C3%B6rk

https://www.modernamuseet.se/stockholm/en/exhibitions/lars-tunbjork/



참고 서적

『Landet utom sig』(1993, journal 출판)






*'품위 풍경'이라는 제목으로 발행했던 글을 수정하였습니다. 아트렉처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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