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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에 Dec 12. 2019

7월, 니스에서의 여름

글 : 엉덩이로 글쓰기 5기 나연 

나에게 니스는 J 언니이다. 2017년 여름, 나는 프랑스 니스에 있었다. 런던과 바르셀로나를 거쳐 세 번째로 도착한 여행지였다. 그 무렵 혼자서 하는 여행이 지겨웠던 나는 동행을 구하고자 마음먹었고, 인터넷의 한 유럽여행 카페를 통해서 함께 저녁을 먹을 사람’을 찾았다. 


여러 명으로부터 곧바로 연락이 왔으나 내가 답장을 보낸 사람은 3살 위의 여자였다. 사실 그녀가 가장 먼저 쪽지를 보낸 사람은 아니었는데, 왠지 끌리는 마음에 같이 저녁 식사를 하면서 여행의 회포를 풀 것을 요청했다. 여행지에서 그동안 몇 번 동행을 만나서 함께 밥을 먹기도 하고 관광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몇 번의 경험으로 누군가의 ‘사진작가’가 될 것을 요청을 받는다든지, 때때로는 누군가의 ‘여자친구 역할’로서 나를 만났나 싶은 생각도 들었었다. 그 때문에 낯을 가리는 성격이 아님에도 상당히 긴장해 있었다. 


먼저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에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는데 한국 사람이 많지 않은 프랑스의 도시 니스에서 한 동양인 여자가 환한 미소를 띤 채 나를 향해 뛰어왔다. ‘여기는 한국인이 없어서 알아보기가 편하네요!’ 지금은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인 J 언니가 나에게 남긴 첫 마디이다. 


‘혹시 베트남 음식 좋아하세요?’ 저녁 메뉴를 함께 고민하던 중에, J 언니가 물어왔다. 여행 중반에 접어들며 국물이 있는 음식이 끌렸지만, 장소가 유럽인지라 상대는 스테이크나 파스타 등의 메뉴를 선호할 수 있다는 생각에 티를 내진 않았다. 그런데 마침 나는 한국에서도 베트남 음식을 주 2회는 꼭 먹을 정도로 베트남 음식을 선호했다. 우리는 옳다구나 프랑스에 위치한 베트남 쌀국수집에 갔다. 오랜만에 먹으니까 왜 그렇게 맛있던지. J 언니와 나는 국물을 후룩후룩 마시며 그동안 어딘가를 여행해왔으며 한국에서는 어디에 살고 있고, 여행은 지금 며칠째 하고 있다는 간단한 대화를 나누었다. 


1시간의 식사로 상대를 다 안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이 사람과 하는 대화가 흥미로운지 흥미롭지 않은지 판단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 ‘나는 너고, 너는 나다. 우리는 잘 통한다.’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내가 언니를 보면서 느낀 생각이었는데 다음에 물어보니 언니도 나와 같이 느꼈다고 말했다. 식사 후 맥주를 한잔 더 마시러 갈 것을 권했고 니스 광장에 위치한 술집의 오픈 테라스에서 우리는 블랑1664 생맥주와 함께 기나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실 나는 혼자서 하는 여행에서 누군가를 만나는 일종의 ‘모험’에 관심이 많았다. 내가 어디서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상대는 어떤 일을 하는지와는 관계없이 익명성에 기대어 속 이야기를 진솔하게 나눌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날의 대화가 딱 그랬다. 23살의 나는 대학교를 휴학 중인 학생이었고 앞으로 어떤 일을 해나갈지 막막했다. 내가 해왔던 일과 앞으로 해야 할 일들 사이에서 줄타기하고 있었고, 그와 관련된 고민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일종의 불안감이었다. 생각을 털어버리고 싶어서 떠난 여행지에서도 여전히 그 생각에 묶여있었다. 


맥주가 한 잔, 두 잔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나의 고민도 조심스레 털어놨다. ‘사실 앞으로 제가 무슨 일을 해야 할지 고민이에요.’와 같은, 지금 들어도 저렇게 막막하고 답답할 수가 있을까 하는 고민으로 말문을 텄다. 누구에게도 털어놓기 힘들어서 입안에서만 맴돌았던 고민은 한 번 매듭을 풀자 술술 이야기를 하는 것은 문젯거리가 되지 않았다. 언니는 나와는 3살 차이로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직장 생활을 6년 하다가 그만둔, 당시의 나에게는 완연한 ‘어른’처럼 보였다. 그래서 또래의 친구들보다 말하기가 편했다. 


‘하고 싶은 일이 너무나도 많아요. 다른 사람들은 하고 싶은 일이 없어서 고민이라고 하는데, 저는 좀 다른 것 같아요. 학창 시절부터 꿈꿔왔던 꿈이 있는데, 요즘에는 제가 과연 그 일을 정말 하고 싶었던 것이 맞는지 회의감이 들어요. 전공처럼, 주변 친구들처럼 현실적으로 안정적인 일을 하는 것이 맞는 걸까요?’ ‘사실 나는 앞의 일을 크게 걱정하지 않고 살아. 미리 걱정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 것 같더라. 나는 일단 네가 하고 싶었던 일을 시작하는 것이 바르다고 생각해. 다른 길을 선택하더라도 다시 돌아갈 수 있으니까.’ 그날의 J 언니가 나의 고민을 듣고 내민 대답이었다. 

 때때로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답이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을 알고 있는데 불안함에, 누군가는 내 생각이 틀렸다고 할까 봐서, 같은 이유로 결정을 쉽게 하지 못하는 나와 같은 사람들이 많으리라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나의 이야기를 한 것만으로도 큰 위로처럼 느껴졌는데, 네가 생각하는 일을 하라는 이야기를 듣자 맥이 탁 풀리면서 고민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는 듯했다. 다음에 물어보니 그 당시의 나는 굉장히 불안해 보이는 상태였다고 했다. 서로의 이야기를 이야기하고, 들어주고, 공감을 주고받는 일련의 과정은 J 언니와 좀 더 친밀해지는 계기가 되었고, 우리는 각자 다음 날 서로 다른 일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정을 전면 수정해 온종일 같이 다녔다. 이야기만 잘 통하는 줄 알았더니, 식성도 성격도 이렇게나 비슷할 줄이야. 여행지에서 우리는 서로 많은 사진을 찍어주었고, 맛있는 스테이크도 먹으러 다녔다.


‘그거 알아? 여행에서 노래 한 곡을 무한 반복해서 계속 들으면 나중에 그 노래를 들었을 때 도시의 분위기가 생각이 난대. 우리 오늘 레드벨벳의 빨간 맛을 계속 듣는 거야! 니스는 빨간 맛이야!’ 니스 주변의 도시 모나코로 향하는 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 J 언니가 했던 말이다. 그 말과 동시에 우리는 종일 빨간 맛을 약 1,000번쯤 반복 재생했고, 노래를 틀지 않아도 흥얼흥얼하면서 다니는 정도가 됐다. 그런데, 진짜였다. 한국에 도착해서 빨간 맛을 듣는데 내가 있었던 니스에서의 분위기와 나눴던 대화들이 정말 생생하게 생각났다. 


도시가 인상 깊어서 도시 자체가 기억에 남는 여행지가 있는 한편, 여행지에서 만나게 된 사람이 인상 깊어서 도시가 더욱 기억에 남을 수도 있다. 니스의 파란 바다도 물론 인상적이지만 사실 나에게는 J 언니와 나눴던 대화가, 그날의 공기가, 맥주 맛이 더욱 기억에 남는다. 실제로도 J 언니는 한국에서도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만나서 안부를 전할 정도로 각별한 사이이다. 지금은 각자 다른 상황에서 다른 고민거리를 나누지만, 여전히 우리는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고, 수다를 떨다 보면 3시간이 훌쩍 지난다. 또한 나의 소중한 기억을 누군가와 나눌 수 있다는 것이 무척 소중하게 느껴졌다.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도 ‘니스 너무 좋았지 않아?’라며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연결되고, 항상 우리가 그 당시 나눴던 대화들에 대해 또 이야기하고, 다음을 기약한다. 


니스 여행을 가만히 떠올리자니 그날 밤 광장의 노천술집에서 마셨던 맥주가 생각난다. 그 날의 여운은 여행지에서 낯선 사람과 대화하는 것의 매력을 일깨워주었고,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다가도 문득 생각하면 미소가 지어지곤 한다. 여전히 새로운 사람과의 첫 마디, 첫 대화는 어렵게 느껴지지만, 대화를 통해 나누는 진심을 믿는다. 타임머신을 탄 듯이 니스를 생각하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추억들은 나를 2017년 7월 니스의 파란 바다로 이끌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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