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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에 May 30. 2019

반얀 나무 - ‘쓸모 있음’에 대하여

“이 나무는 크기에 비해 너무 쓸모가 없어요. 그쵸?” 

 남인도 ‘폰티체리’에 있는 ‘오로빌’에서 일주일 째 나는 머물고 있다. 내가 묵는 센터 게스트하우스 앞에서 빗자루를 들고 나뭇잎을 쓸어내고 있던 아주머니가 한 마디를 던진다. 

 ‘어? 네?’ 

 대답할 새 없이 아주머니는 이내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아주머니께서 굳이 내 대답을 듣고 싶지 않으셨던 건 분명하다. 쓸모가 없다고? 고개를 들어 나무를 올려다본다. 커다란 덩치의 반얀 나무는 가지를 늘어뜨린 채 말없이 그 자리에 서있다.   

 이 거대한 고목은 생김새부터가 범상치 않다. 크고 투박하고 기이한 모양새를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나무의 모습에선 어쩐지 ‘위엄’이 느껴진다. 반얀 나무는 여러 개의 가지가 쭉 뻗어나가면서 자란다. 가지가 길어지면서 옆으로 아래로 늘어지고, 아래로도 영역을 확대하면서 자라난다. 그 모습이 흡사 자신의 왕국을 만들고 확장해 나가고 그 곳에 깊이 뿌리 내리려 하는 왕의 자태 같다. 위아래, 양옆으로 잘 뻗어나가서 어떤 부분은 마치 다른 나무의 기둥과 가지들을 덧대어 이어놓은 것 같이 보이기도 한다. 한 뿌리에서 이렇게 다양한 방향으로 가지들이 생겨났다는 것이 눈으로 보고도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커다란 몸집에 거친 살결을 가진, 구불구불하게 가지를 펼친 이 나무를 보면 ‘예쁘다, 아름답다’ 같은 수식어는 떠오르지 않는다. 마치 운동선수처럼 크고 거친 체구가 압도적인 인상을 주기 때문에 좀 무섭게 생겼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예쁜 꽃과 열매가 달려 있거나 아름답게 쭉쭉 뻗은 나무들에 비하면 한 마디로 반얀 나무는 내세울 만한 ‘미모’가 없다. 게다가 반얀 나무는 점유 공간이 너무 커서 집 마당에서 키우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한다. 넓은 정원에서 키운다면 중앙에 위치해야 하는 숙명(?)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담벼락 밖으로 사정없이 뻗어나가 버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반얀 나무는 공간의 중앙을 넓게 차지하면서 넓고 큰 그늘을 만든다. 그런데 어떤 사람 눈에는 이 나무가 쓸데없이 덩치만 큰 나무인거다. 가구 같은 걸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꽃도 맛있는 열매도 달리지 않고, 필요로 하는 것을 얻을 수 없으니 ‘쓸모’ 없는 나무.     

 이 ‘쓸모’ 없는 나무 아래 나는 아침에 눈을 뜨고 방 밖을 나온 후부터 쭉 앉아 있다. 나는 매일 아침 컵 하나와 책 한 권을 집어 들고 나와 그늘 아래에 놓인 탁자에 앉아 아침 시간을 보낸다. 한낮의 더위를 피해 잠시 온몸의 땀을 식힐 때도, 해 저물기 전 오후 시간에도 여기에 머물곤 한다.     

 말하자면, 그렇다. 이 나무와 함께 있는 시간은 ‘쓸모’와는 무관한 시간들이다. 시집을 아무데나 펼쳐들고 눈이 가는 싯구가 있으면 거기에 한참을 머문다. 차를 마시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한다. 반얀 나무 아래에 있으면 나는 앉아 있는 게 아니라 나무의 품 안으로 파고 들어왔음을 느낀다. 나무는 그 자리에서 두 팔을 펼친 채 가만히 가지와 이파리를 흔들어 줄 뿐이다.     

 어느새 햇살은 머리 위까지 와있고, 점점 뜨거워져 온다. 그리고 나무 사이로 바람이 불어온다. 머리를 헝클어놓을 정도의 시원한 바람은 아니지만, 바람은 나뭇가지 사이를 스쳐 지나 내 얼굴에 닿는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 위로 한 줄기 시원함이 지나간다. 내 옆에 반얀 나무가 있다는 것은 이 순간 나에게 가장 큰 ‘쓸모 있음’이고 위안이다. 가만히 눈을 감고 나무가 내게 걸어오는 말에 귀 기울여본다.    


글 : 엉덩이로 글쓰기 3기 이수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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