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이에 May 30. 2019

치앙마이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격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싶다면, 치앙마이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격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싶다면, 치앙마이


퇴사 여행이유행이다. 퇴사하고 훌쩍 떠난 이야기는 더 이상 드라마틱하지 않을뿐더러, 진부하기까지 하다. 그래도 막상 ‘내가퇴사 여행을 떠난다고?’ 생각하면 꽤 설레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10년 넘게 한 직장에서 일하며 정신적으로나 체력적으로 모두 지쳐있었었던 나에게도 그랬다.


 


한 달살기가 뭐라고, ‘살기’의 환상


치앙마이한 달 ‘살기’라는 표현 때문일까? 나는 단기 여행자가 아니므로, 최대한 현지인에 가깝게 살고 소비하고싶다고 생각했었다. 최대한 로컬들이 많이 가는 식당에 가려 했고, 교통수단도그랩보다는 썽태우를 이용하려고 했다. 현지 물가 대비 너무 비싼 카페는 거부감이 들었다.


치앙마이한 달 살기가 총비용 100만 원으로 가능하다고 해서, 처음엔이에 맞춰 살아보고자 노력을 많이 했다. 그런데 돈을 적게 쓰니, 아무래도생활이 재미가 없었다. 퇴사 직후의 심드렁함까지 겹쳐서 이곳이 나에게 맞지 않는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역시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란 커다란 즐거움을 주는 활동인 것이 자명했고, 나는현지인이 아니었으며, 그들처럼 그곳에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시간을함께 보낼 가족이나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느 순간, ‘이래도저래도 한국보다 싸니 즐기자’라고 생각을 바꾸고, 나름 펑펑쓰기로 했더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나는 ‘살기’의 환상을 내려놓았고, 단기 관광객보다 약간의 여유를 더 가지고 그도시를 들여다볼 수 있는 여행자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잊고 있었지만, 돌이켜보면 내게 해외 체류 경험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스트본에서 6개월, 베이징에서 5개월가량살았었다. 두 기억 모두 10년도 훨씬 넘은 것이라 오래되기도했지만, 단지 ‘어학연수’라칭했을 뿐, 그때는 ‘ㅇㅇ살기’라는 표현을 붙이지 않았기에 잊고 있었나 보다.


나처럼쓸데없이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고, 처음부터 신나게 펑펑 쓰고, 잘놀고 잘 먹었다는 분이 있다면 ‘정말 훌륭합니다’라고 말하고싶다. 또 에어컨이 쌩쌩 나오는 숙소에 종일 누워만 있었다고 해도, 역시훌륭합니다. 어떻게 즐겨도 되는 곳이 치앙마이이므로!

치앙마이 풍경. 노스게이트 앞을 지나가는 썽태우



빈둥거리는삶, 모두가 베짱이인 곳


넓고 쾌적한숙소에서, 마음껏 에어컨을 틀어놓고 늦게까지 낮잠을 잔다. 이것이치앙마이에 머무르는 여행자의 특권이 아닐까? 이것저것 둘러보거나 체험하고 싶은 것이 많은 사람이라면이곳은 적합하지 않다. 물가 저렴한 태국이나 근처의 동남아 국가 중에서만 고르더라도 훨씬 매력적인 선택지가많기 때문이다.


장기여행의천국인 치앙마이에 머무르는 대부분의 여행자는, 나처럼 퇴사하고 이곳으로 날아온 백수들이었다. 그리고 공간에 제약 받지 않고 일할 수 있는 디지털 노마드와 프리랜서도 일부 있었다. 한 가지 놀라웠던 점은 의외로 부부가 함께 온 한국의 중장년층이 많았다는 것이다. 은퇴하고 자녀를 결혼시킨 후, 노년을 이곳에서 보낼 수 있는지 알아보기위해 2~3주 정도 사전 답사 목적으로 여행 온 분들이었다. 이곳의저렴한 물가는 많은 사람에게 삶의 또 다른 삶의 기회를 의미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동남아를 몇달씩 여행하는 서구권의 배낭여행자들 또한 많다.


네이버카페에서 치앙마이 관련 정보를 많이 얻기도 했는데, 번개 모임 게시판을 통해 혼자 온 한국 여행자들끼리만나서 식사를 하거나 여행을 함께 하기도 한다. 재미있는 점은, 저녁모임 모집 글을 당일 오후에 올려도 사람을 모으기에 충분하다는 점이다. 대부분 별다른 약속 없이 집에서쉬고 있거나, 근처 커피숍에서 빈둥대는 중이기 때문이다.

그린힐 콘도 수영장



 맛있는 치킨 라이스의 유일한 단점


알람 없이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하는 생각, ‘오늘은 뭘 먹지?’ 치앙마이에서지내는 동안 이것이 매일 매일의 제일 큰 고민이자 행복한 고민이었다.


여느 날과 같이 메뉴를 정하면, 구글맵이안내해주는 길을 따라 맛집을 찾아간다. 치킨라이스쿄이 (Chickenrice Kyoi)는 모르고 지나칠 만큼 밖에서 보기엔 허름한 가게였는데, 내부엔 제법손님이 많았다. 메뉴는 딱 두 가지로 삶은 닭과 튀긴 닭 중에 하나를 고르면 되는데, 나처럼 결정장애가 있는 사람은 반반으로도 주문할 수 있다. 이것을닭 육수로 지은 밥과 닭국, 그리고 고기를 찍어 먹을 소스와 함께 준다. 별도로 돈을 받지 않는 물도 얼음이 담긴 컵에 정성스럽게 빨대까지 꽂아서 준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40밧!(2018년 12월 환율로 약 1600원)


한번 이음식을 먹고 나면 생기는 어마어마한 부작용이 있는데, 그것은 모든 태국 물가를 치킨라이스로 환산하게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커피를 마실 때 ‘음…. 치킨라이스 네 그릇 값이군’ 이라거나, 브런치 카페의 메뉴판에서 과일이 듬뿍 들어간 아사이볼의 가격을 보고 ‘맙소사치킨라이스 일곱 그릇을 먹고도 아이스크림을 사 먹을 값이잖아!’라고 경악하며 주문을 주저하게 된다.

 치킨라이스 물가 환산표



해외에있다 보면 한국 음식이 생각나기 마련인데, 그럴 때는 값도 싸고 맛도 좋은 치킨 라이스를 배반했다는죄책감을 애써 떨쳐내고, K-pop을 틀어주는 즉석 떡볶이집에 가서 밥을 볶아 먹기도 했고, 이것저것 다 귀찮은 날은 집에서 순두부찌개를 배달시켜 먹기도 했다.


 


치앙마이카페 스토리


카페 문화를논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곳은 파리 아닐까? 유명한 철학자와 아티스트들이 토론하던 역사와 전통의카페가 많지만, 커피 맛은 옆 나라 이탈리아와는 달리 매우 실망스러울 때가 많다. 치앙마이에는 개성이 뚜렷하고 트렌디한 카페가 많으면서, 커피 수준또한 매우 훌륭해서 가히 카페 놀이의 천국이라 할 만하다.


치킨 라이스와같이 맛있고 저렴한 현지 식사를 하고 나면, 그 4~5배에달하는 가격의 커피를 마시는 진정한 된장 남녀의 삶을 살 수 있다. 현지 물가치고는 매우 비싸지만, 한국과 비슷한 가격대로 훨씬 즐거운 경험을 할 수 있다.


덥고 피곤했던어느 날, 원님만의 나인원 카페(Nine One Cafe)에들어갔다가, 메뉴판에서 아이스라테 가 115밧인 것을 보고정말 깜짝 놀라버렸다. 아무리 비싸도 커피 한잔에 100밧을넘기는 카페는 별로 없는데, 여기가 거기구나 싶어서 입맛이 썼다. 어쨌든주문을 하니, 물과 크래커와 예쁜 꽃을 먼저 가져다 주었다. 사람이참 단순해서, 꽃 한 송이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이게 뭐라고115밧을 낸 가치가 있구나 싶으면서, 기분이 좋아졌다.이어서 서빙된 아이스라테를 한 모금 마시니 조금 전까지 띵하던 머리가 맑아지고, 컨디션이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아끼면 뭐하니. 이럴 땐 써야지.’ 시원하게 에어 컨디셔닝 되는 카페에서 마시는진한 아이스 카페 라테!

원님만에 있는 나인원 카페

나는 숙소가있는 님만해민 지역에서 주로 돌아다녔는데, 골목에 있는 리스트레토(RISTR8TO)카페는 근방을 오갈 때마다 늘 나의 시선을 빼앗았던 곳이다. 사실 카페가 그다지 크지도화려하지도 않은데, 커다란 나무가 드리워져 있고, 그 아래사람들이 앉아서 커피를 마시고, 햇살을 만끽하고, 이야기를나누는 모습이 한 편의 그림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곳은 세계 라테 아트 챔피언이 운영하는 가게로, 기회가 된다면 뜨거운 카페 라테를 드셔보실 것을 추천한다. 직원들유니폼에는 ICED COFFEE KILLS BARISTA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데, 뜨거운 커피를 마셔야 커피 본연의 맛을 즐길 수 있다는 바리스타의 철학이 느껴졌다. 하지만 고백하건대 나는 이곳에서 뜨거운 카페 라테를 주문한 적이 없다. ‘미안해요. 한낮의 햇빛을 즐기지만, 뜨거운 커피를 마시기엔 너무 더웠어요. 하지만 얼음이 녹아도 결코 연해지지 않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매우 훌륭했답니다. ‘


치앙마이는도시보다도 교외로 조금 나갔을 때 그 매력이 진가를 발휘한다. 매림은 차로 30~40분쯤 걸리는 지역인데, 이곳의 아름다운 카페 아이언우드(The Ironwood)를 추천한다. 아마 꿈에서 보던, 혹은 동화 속 숲의 카페가 있다면 이런 곳이 아닐까 싶다. 이런곳이라면 커피 맛은 이미 중요하지 않다. 커다란 아름드리 두리안 나무 아래, 온통 초록으로 가득한 가운데 사람들이 담소를 나누는 숲속 정원. 나뭇잎사이로 반짝반짝한 햇살. 그 공간이 주는 특별함만으로 충분히 가볼  만하다.


                                                                               


볼 건별로 없지만, 도이수텝의 야경은 꼭 보세요.


치앙마이여행을 앞둔 사람에게 꼭 방문해야 하는 여행지를 추천한다면, 그것은 단연코 도이수텝이다. 그 외에는 어딜 가서 무엇을 보든 원하는 대로 즐기라고 말하고 싶다.


썽태우의매연을 고스란히 맡으며, 30분가량 굽이굽이 산길을 올랐다. 사찰의입구에 다다르면, 이제는 꿈틀거리는 용이 장식된 가파른 계단을 걸어 올라야 한다. 그렇다, 신성하고 아름다운 장소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대가를치러야 한다.


신을 벗고이미 어둠이 내려앉은 사원으로 들어가면 펼쳐지는 것은, 숨 멎게 하는 금빛의 찬란함! 치앙마이에 와서 보고 겪은 그 모든 것 중에 도이수텝의 야경은 단연코 가장 멋졌다. 어두운 밤, 산사에 울려 퍼지는 스님들이 불경 외는 소리는 불교신자가 아니라도 절로 경건한 마음을 갖게 했다. 환한 보름달 아래 반짝이는 불탑, 그리고 탑을 돌며 기도하는 사람들. 처마 끝에서 흔들리는 금빛 풍경(風磬), 촛불, 연꽃 모두가너무 찬란하고 아름다워서 한참을 바라보며 머물렀다. 그 환상적인 밤 풍경 때문에 두 번이나 방문했지만, 언제든지 또 가고 싶을 만큼 특별한 경험이었다.


 도이수텝 야경


씹밧? 이씹밧? 아임 스피킹 태국어


치앙마이는영어가 잘 통하는 곳이지만, 태국어 몇 마디라도 한다면 현지인에게 조금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문장은 싸와디카(안녕하세요), 코쿤카(고맙습니다), 아로이막(매우 맛있어요), 첵빈너이카(계산서 주세요), 타올라이카(얼마입니까?) 정도다. 당신이 남자라면 문장 끝의 -카 대신 -캅으로 바꾸면 된다. 처음엔이 변형이 청자 기준인지 화자 기준인지 몰라서 어려웠는데, 알고 보니 말하는 사람의 성별을 기준으로표현하면 되어서 나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상대방에 따라서 다르게 부르려면 꽤 헷갈리지만, 나를 기준으로 하는 경우 한 가지 표현만 외우면 되기 때문이다.


몇 개안 되는 아는 표현 중에 유일하게 질문형인 ‘얼마입니까?’라는문장은, 그 대답도 알아들어야 하는 또 다른 문제가 있어서 많이 활용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종종 상인들이 나를 위해 한국말을 한다고 착각하게 되는 재미있는 경우가 있었다. 우리말 10밧은 놀랍게도 태국어로 ‘씹밧’이다. 20밧은 ‘이씹밧’, 그럼 30밧은뭐라고 할까? 기대를 배신하지 않는 ‘사암씹밧’이다. 태국어 숫자는 중국 광둥어의 영향을 받아서 우리말과도 꽤 비슷한발음들이 많이 있다. 그렇지만 40과 50은 유사성이 많이 떨어져서 여기까지만 소개하겠다.


사실 ‘깎아주세요’라는 표현도 찾아본 적이 있는데, 표현이 길어서 외울 수가 없다. 하하.


망고찰밥 노점


글 : 엉덩이로 글쓰기 3기 곽명주

항공사에서 영업 기획과 디지털 마케팅을 했고, 월급의 8할을 여행하고 먹는 데 썼다. 번아웃에 시달리던 중, 희망퇴직의 찬스를 잡아 대책 없이 퇴사했다. 하고 싶은 것은 다해보는 삶을 살아보고자 서툰 글을 쓰고, 변변찮은 그림을 그리며, 하품나는 영상을 만들면서 자아 탐색 중이다.  다이나믹한백수 라이프를 꿈꾸지만, 현실은 그냥 동네 백수.



유튜브 여행쉼표:  

https://www.youtube.com/watch?v=wvUC7On7Q_0&t=199s



 






매거진의 이전글 여행은 그런 것이 아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