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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에 Jun 04. 2019

홀로 저녁 풍경

글: 엉덩이로 글쓰기 3기 허영만

지하철에서 승차권 “띡” 하는 소리를 지나치며 게이트 바를 돌려 나온다. 지하에서 내내 참아왔던 생리현상을 순간적으로 해결하고 긴 터널 같은 출구를 찾아 연남동으로 나오는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맡긴다.

   

퇴근 후라 그런지 밀려오는 저녁 허기를 어디서 해결할까?  

   

 지하철에서 나와 펼쳐진 연남동 풍경에는 예전에 기차가 지났던 흔적이라곤 선로만 빛바랜 구리 빛깔로만 보일 뿐, 지금은 삼삼오오 도시락을 풀고 맥주병을 한 손에 쥐고 한바탕 웃어 대는 푸른 잔디위에 얼굴들에게는 "칙칙폭폭" "삐익~삐"이라는 굉음이 어디에도 들리지 않는다.

 '술퍼마켓'이라는 센스 쟁이 간판으로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채 뒤돌아 좁디좁은 골목길에 일렬로 놓여 져 있는 차들을 미끄럽게 빠져나가서 마침내 오른쪽으로 돌면 '소고기 국밥집'이 들어온다. 깍두기에 희디 흰 진한 국물에 말아먹는 밥 한 그릇을 먹던 추억이 새록새록 하다. 근데 기필코 소주 한잔해야겠지? 식사 후에 약속이 있는 오늘만은 애써 패스하기로 한다. 건너편에는 '순대국 전문점'이 옛날에 쓰던 빨간 페인트칠을 유리문에 그려 놓은 채 있다. 그런데 왠지 어제 칠한 것처럼 깨끗해서 그 전통성에는 의심이 든다.    


 나는 전혀 못 알아볼 꼬부랑 태국어로 쓰인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6시를 조금 넘은 시간이라서 마음껏 자리를 차지하리라는 막연한 믿음은 금세 허탈한 실망이 되어 버린다. 무려 대기자만 8명에 이른다. 지금까지 이런 쌀국수 집은 없었다. 돼지국물을 고아내서 숙주를 올리고 돼지 수육을 얹은 국수 한 그릇이 그렇게 인기가 있단 말인가? 못내 아쉬워하면서 건너편으로 돌아서니 한자로 가게 이름을 달아놓은 집들이 양쪽에 보인다. 그 가게 출입문에 TV프로에 나온 사진에는 ‘왕만두’와 ‘국수’가 소개되었는데, 가게 안에 테이블 하나가 남아있긴 했지만, 연인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홀로 식사를 해결하는 나를 불편해 할 수도 있어 다른 집으로 발길을 옮기는 매너를 발휘해 본다. 그리고 연인들이 하는 이야기는 대부분 형식적인 겉치레로 들리는 측면이 강해서 저녁을 먹으면서도 내 생각의 가치관이 맞는지 입을 씹으면서 내 생각도 곱씹게 되는 수고도 해야 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라도 피하는 것이 상책인 듯하다.    


 거리에 나와 담배를 다 피고 다시 식당으로 들어가는 배 나온 아저씨가 눈에 들어온다. 어스름하게 보이는 창가를 통해 본 식당 안은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테이블 색상과 의자들이 눈에 들어온다. 모르는 식당을 찾아 갈 때, 제일가는 원칙은 식사하는 손님들이 안에 많이 있는가 아닌가! 그 원칙에 따라 이미 한 테이블이라도 찼으니 들어가 본다.

 옆 테이블에 있는 기름기에 끈적거리는 한 장짜리 메뉴판을 들고 보니. 식사로는 짜장, 짬뽕, 볶음밥 정도인 반면, 요리류는 고추잡채, 탕수육, 꿔바로우, 깐풍기와 팔보채 등 식사류의 2배가 될 정도로 많았다. 그 배 나온 남정네는 벌써 같이 온 동료와 마오타이 하나를 다 비우고 한 병을 더 주문한다. 그리곤 주인장에게 "언제나 맛이 있지만 오늘은 더 한 거 같습니다!" 하면서 엄지 척을 하면서 너스레를 떤다. 금방 나온 요리는 ‘탕수도미’라 했다. 혼자 먹기에는 너무 과해 보이는 요리라서 다음 기회를 노려보자! 단 한번 주문에 3가지 맛을 보고픈 과한 욕심에 짜장과 볶음밥 그리고 짬뽕국물까지 나올만한 ‘새우볶음밥’을 시킨다. 한국어로 주문받은 할머니는 분명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중국어로 주방에 대고 말한다. 그렇다! 연남동은 역시 화교 중국집이지! 


 배가 나오면 뱃심이 강해져서 그런지, 사내가 하는 이야기가 내 귀에 여과 없이 들어온다.

"음식은 진짜 맛있는 곳에 가서 먹자는 것이 제 신조예요! 어릴 때 아버지가 일찍이 돌아가셔서 진짜 어렵게 살았거든요. 커서 이렇게 돈을 벌기 시작하니까, 여태껏 못 먹어본 음식들을 찾게 되더라고요"

 무슨 방송 관련된 일을 하는지 ‘연출’, ‘PD’ 등 방송전문용어가 연신 들려오는 가운데 내게 볶음밥이 나오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나는 내 입을 즐겁게 해주는 데만 집중하게 된다. 노란 계란빛깔과 초록색 쪽파와 굴소스에 잘 볶아낸 새우와 밥들이 정말 입에 행복감을 전한다. 하지만 짜장이 덮여 있지도 않았고, 짬뽕국물이 아닌 계란 국이 나와 상상했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옆자리에 두 남정네가 어느새 새로이 자리 잡아 지난주에 제주도에 가서 자전거 탄 얘기를 들려준다. 2만5천원으로 ‘카본’ 자전거를 빌려 제주에서 서귀포까지 갔다고 한 정보도 말이다.  

  

 홀로 먹는 저녁도 가끔 풍성한 찬거리와 들을 거리, 볼거리로 가득하다. 꼭 테이블을 마주할 상대가 있는 저녁 한 식사가 필요할까? 퇴근길에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과 그 길가를 비추는 간판들과 창가로 들여다보이는 사람들의 얼굴 색감과 그네들의 이야기들이 내게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저녁이다. 이런 일상이 오늘이라면 또 다른 오늘인 내일이 똑같이 내게 그려질 리는 만무하다. 그래서 오직 나만이 풍성하게 누릴 수 있는 저녁 만찬을 미리 준비할 수 있기에 즐겁다.


글: 허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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