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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에 Dec 04. 2019

시간을 담은 계단, 루브르 박물관

글 : 엉덩이로 글쓰기 5기 서재원

시간을 담은 계단, 루브르 박물관

막 찍어낸 듯한 새 책에서 나는 냄새를 좋아하시나요? 새 학기, 새 책, 새로운 시작, 가본 적 없는

새로운 도시로의 여행, 그리고 이런 새로운 것들이 주는 설렘과 기대 등등. 당신 안에 조용히

숨어있는, 혹은 깜빡 졸고 있는 에너지를 깨워줄 것 같은, 이런 새로운 것들을 좋아하시나요? 물론

저도 새것을 좋아합니다만, 오래된 것을 좀 더 좋아합니다.

손 때 묻은 노트, 오래된 책에서 나는 콤콤한 냄새, 오래된 건물을 따라 자란 넝쿨, 그 넝쿨로 인해

한층 더 고풍스러운 느낌이 나는 건물, 많은 사람이 지나간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건축물. 이런

것들이야말로 저를 더욱 설레게 하고, 가슴 뭉클하게 합니다. 시간의 흔적을 그대로 담고 있는,

그리고 10년 전, 100년 전, 700년 전, 누군가가 이곳을 어떤 마음으로 지나갔을지 자연스럽게

상상하게 만드는 무엇. 저에게 그것은, 루브르 박물관에서 발견한 계단이었습니다.

유럽여행을 처음 가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파리, 로마 등을 기점으로 여행을 계획하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유럽의 중심에 있어 다른 도시로의 이동이 편하고, "파리의 연인"이라는 우리나라 드라마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파리"는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에게(아마도 특히 여자들에게) 로망의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파리는 프랑스의 수도이지만 동시에 하나의 독립된 나라와 같이 느껴집니다.

프랑스에서 꼭 가봐야 하는 곳이라기보다 유럽에서 꼭 가봐야 하는 곳, 그곳 중 하나가 바로 “파리”

입니다. 그리고, 유럽여행의 시작 또는 마지막이 될 파리에서 루브르 박물관이 차지하는 비율은 아마

30%를 족히 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파리를 여행하면서 루브르 박물관을 제외하는 사람은 아마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러

번 가본 사람이라면 예외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반대로 여러 번 가더라도 갈 때마다 이곳을

방문하는 분들도 있으실 겁니다.

사진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루브르_박물관

루브르 박물관의 대표 작품으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사모트라케의 승리의 여신

"니케" 조각상, 밀로의 "비너스" 조각상 등이 있으나, 개인적으로 루브르 박물관 내에서 가장

감동적이었던 부분은 어떤 유명한 작가의 예술작품도 아닌 수많은 관람객이 오르내리는 대리석 계단

중 하나였습니다. 누구로부터도 주목받은 적 없었을, 그 계단은 수백 년 동안 그곳에 있었고, 묵묵히

그 역할을 다해왔으며, 매해 수백 명부터 수백만 명의 셀 수 없는 사람들의 발걸음에 조금씩 닳고

닳아, 작은 물방울에 바위가 깨지듯 단단한 대리석이 자연스럽게 곡선을 그리며 움푹 패여

있었습니다. 그것은 "시간의 작품"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화려하지 않지만 어떤 대가도 시간의

도움 없이는 완성할 수 없는 작품이었습니다. 현대기술과 디자인의 발달로 스마트홈, 스마트시티 등

하이 테크놀로지가 적용된 건축물도 생겨났고,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건축물도

디자인되었으며, 세계에서 제일 높은 건물은 매년 갱신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놀라운

건축가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을 지을 수는 없습니다. 시간은, 그것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가치가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몇 백 년 된 오랜 건축물과 네모난 돌이 알알이 박힌 중세시대 도로가 즐비한 유럽의 거리를 거닐다

보면, 이따금 지금이 언제인지 알 수 없는 시간여행을 하는 기분에 빠져들곤 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몇 백 년의 시간이 오롯이 나를 관통해가는 기분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루브르에서 “시간을

담은 그 계단"을 발견했을 때가 바로 그런 순간이었습니다. 엄청난 인파로 밀리듯 계단을 오르내려야

하는 그곳이었지만, 잠시 그 오르내림의 행렬에서 벗어나 계단의 한 구석에 가만히 서서 계단을

바라보았습니다. 여러 개의 계단은 낮은 계단부터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더 움푹하게 패여 있다가

중간을 지나면서 다시 조금씩 원래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이 패인 바로 그

계단을 보는 순간, 저는 잠시 이 세상의 시간이 멈추고 나의 시간이 따로 돌아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찰나의 순간, 그곳에는 저와 그 계단만이 존재하였습니다. 그 계단은 저에게 “잘 왔어. 너를 만나서

기뻐. 너도 나처럼 여러 해를 묵묵히 그리고 열심히 살아왔구나.” 하며 따뜻한 말을 건네주었습니다.

오랜 시간 그 계단을 지나간 사람들이 단순히 관람객들만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그

계단에 수많은 사람의 인생과 무게가 녹여져 있는 듯하여 눈물이 고였습니다. 그리고, 바쁘게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흐름이 잠시 끊겼을 때, “찰칵”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습니다. “너도 열심히

살아왔구나. 앞으로도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고, 먼 훗날 다시 만나자”라고 혼자 되뇌며.

혹시, 당신도 루브르 박물관의 그 굴곡진 계단을 발견하셨나요?


자연 그대로 있는 그대로, 개심사의 기둥

가을이 되면 유난히 더 생각나는 절이 있습니다. 이 절을 처음 방문하게 된 것은 약 20년 전으로

우리나라에서 세번째로 오래된 목조건축인 수덕사를 방문하면서 우연히 근처에 이 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충남 서신에 있는 대학교를 다니던 친오빠의 추천으로 남은 시간을 이용해

이 절을 방문하였는데, 그 후 이 절은 저에게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로 기억되어 있습니다.

한적한 숲길을 오르고 일주문을 지나 한참 걸어가면 나오는 호젓한 절. 대웅전이 나오기 전 있는

샛길에는 막 떨어져 아직 색이 바래지 않은 노오란 은행나무 잎이 가득했었는데, 은행나무 잎들을

지나 서있던 작은 건물은 해우소였습니다. 해우소로 가는 길마저 아름다운 이 곳. 제멋대로인 듯

구부러진 나무가 건축물의 기둥과 보로 자리 잡은 이 곳. 이 곳은 바로 충남 서산시 “개심사”입니다.

개심사는 부석사나 수덕사 정도로 널리 알려진 절은 아닙니다. 부석사와 같이 부드러운 곡선

기둥의(우리가 고교 시절 ‘배흘림기둥’이라고 배웠던 그 기둥의 곡선) 여성적인 느낌도, 수덕사와

같이 강직하고 곧게 뻗은 기둥의 남성적인 느낌도 없습니다. 그러나, 제멋대로인 듯 다른 한편으로

균형 잡힌 구부러진 기둥이 가득하고, 자연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꾸미지

않은 듯 꾸미는 것이 제일 어려운 패션 감각이라면, 개심사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건축물이지만

자연스럽게 산과 자연의 일부분이 된 최고의 건축물입니다. 그런 개심사를 처음 본 그 때부터, 이곳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개심사는 자연과 건축이 완벽하게 조화된, 그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개심사를 사랑하게 된 이 후, 이 곳을 여러 번 방문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곳을 방문할 때마다

조금씩 다른, 새로운 매력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곳은 높지 않은 산의 중턱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일주문을 지나 절로 오르는 길부터 다른 절과는 다릅니다. 일주문은 ‘사찰의 경계를 지나 우리로

하여금 세속의 때를 벗고 깨달음의 길로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게 한다’는 의미를 가진다고 하는데,

그런 일주문의 의미를 가장 잘 깨달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 개심사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

길을 따라 천천히 올라가다 보면, 어깨를 누르던 삶의 무게가 조금씩 가벼워지고 나를 둘러싼 여러

가지 굴레들로부터 점차 자유로워지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절에 올라가면 그리 높지

않은 높이임에도 불구하고 꽤 높은 산을 오르고 나서 보일 법한 탁 트인 정경을 눈 속에 담을 수

있습니다. 기다란 진입로를 걸으며 생각의 바다에 잠시 빠질 수 있는 곳, 낮은 높이에서도 시원하게

펼쳐진 풍경을 볼 수 있는 곳, 바로 개심사입니다.

그런 개심사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사실 이 절의 역사도 건축양식도 아닌, 이 건축물의 기둥에

사용된 목재입니다. 특히, 심검당과 범종각의 기둥은 직접 보지 않은 사람에게 설명하기 매우 어려운

디자인입니다. 곧고 완벽한 나무로 만들어도 시간이 지나면 뒤틀리고 원형을 유지하기 어려운 것이

나무라는 소재인데, 구불구불한 나무를 사용한 데다 그 구부러진 모양을 그대로 살려, 무려 1400년

전 이 절을 지었습니다. 그 구부러진 기둥들과 나무의 모양을 그대로 살려 만들어진 건물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사람의 인생도 이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반적으로 곧게 자란 나무가 건축물의 재료로 사용되듯, 현실은 누구나 알아주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번듯한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 능력있는 사람이라고 여겨지곤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떤 길을

걸어왔던 우리 인생은 각자 그 나름의 의미, 가치와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생각된 구부러진 나무들도 누군가에게는 쓰임새있는 재료가 되어 이렇게도 아름다운 절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가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듯, 우리들 중

누군가는 수덕사 또는 부석사의 기둥으로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받을 것이고, 누군가는 개심사의

기둥으로 어떤 사람들에게 그 또는 그녀만의 아름다움을 전달해 줄 것입니다. 개심사는 저에게

전형적인 전통건축의 미를 보여주지는 않지만 다듬어지지 않은 듯 섬세하게 다듬어진 자연의 미를

보여주는 곳이며, 엄마의 손처럼 거칠지만 세상에 없는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는 곳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편안한 장소. 저에게 그곳은, 충남 서산시에 있는 개심사, 특히 구부러진

기둥이 잘 보이는 절의 한구석, 바로 그곳입니다.


생활속의 아름다운 신앙, 차낭(Canang sari)과 차루

2018년 4월의 어느 날. 우리는 함께 붓던 적금을 깨고 인도네시아 발리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한 명은 육아휴직 기간 막바지, 복귀하기 전에 아이들없이 자유로운 여행을 꿈꾼 6개월 아들둥이맘.

다른 한 명은 비혼주의 여행바라기 직딩녀. 그리고 다른 하나, 바로 저는 딸둥이육아와 직장생활에

치여 하루가 1초 같기도 하고 1년 같기도 한 직장맘이었습니다.

이번 여행이 그동안의 다른 여행들보다 더 좋았던 점은 세 멤버 모두 일상의 스트레스, 일, 육아,

복잡한 인간관계 등에서 벗어나 힐링을 위해 선택했던 여행이었던 점. 그리고, 맛집을 찾아 헤매지

않고, 지나는 길에 분위기 좋아보이는 레스토랑이나 카페를 부담없이 들어가고 즐겼던 점이었습니다

(물론 가끔 트립 어드바이저 어플리케이션을 확인하기도 했지만). 하지만, 이 곳 우붓에서 저에게

가장 큰 기쁨과 힐링을 주었던 것은, 시도때도없이 나타나 노랗고 빨간 형형색색의 꽃을 보여주었던

조그맣고 네모난(때로는 팔각의 꽃모양) 대나무 바구니, 차낭과 차루였습니다. 우붓에 있는 동안에는

그 이름조차 몰랐던 이것은, 우붓 신앙의 상징과도 같은 것으로서 발리인들이 신에게 바치는

공물이었으며, 대나무로 만든 작은 바구니(약 8X8cm 정도) 안에 꽃과 음식이 담겨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천상계의 신인 데와에게 바치는 제물은 차낭, 악령 부따 카라에게 바치는 제물은

차루라고 하는데, 차낭은 반드시 제단 위에 올리고 차루는 땅에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붓 어느 곳을 가더라도 차낭과 차루를 만날 수 있는데, 특히 차루는 땅에 내려놓는 공물이기

때문에, 길거리 여기저기, 가게나 레스토랑의 입구 등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발리와 우붓의

신앙에 대해 자세히 모르는 저로서는 아침부터 저녁까지의 일정속에서 매 순간 모든 장소의

발끝에서 발견할 수 있는 차루는 신기하면서도 기분을 더 즐겁게 해주는 우붓여행 최고의

선물이었습니다.

우붓의 첫 아침, 여유있게 메인로드를 따라 걷기로 한 우리는 일단 호텔을 나왔고, 발밑에서 발견한

차루의 행진에 신기해하며 천천히 산책을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는 곧 그 유명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스타벅스 중 하나라는 스타벅스 우붓매장을 발견하였는데, 우리가 우붓에서 가려했던 장소

중 하나인 사라스와띠 사원(Saraswati Temple in Ubud)이 그 뒤에 숨어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연꽃사원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 사원을 우리는 아무 계획없이 방문하였는데 연꽃이 피어 사원안의

연못을 가득채운 광경을 본 것은 우붓여행 중 또 하나의 선물이었습니다. 신앙이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사원이 삶의 현장인 메인로드 바로 옆에, 별다른 입구나 긴 진입로없이 자리하고 있는 것은 저에게

매우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러나, 짧은 여행 동안 매일 무수한 차낭과 차루를 한걸음 건너 하나씩

발견하는 발리여행을 마친 후에는, 항상 신에 대한 믿음을 생각하고 작지만 정성이 담긴 공양물을

매일 바치는 발리인들에게는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학창시절, 노랗고 빨갛게 물든 낙엽 가운데 모양이 예쁘게 유지되어 있는 것들을 모아 코팅하기 위해

두꺼운 책 사이에 끼워두었다가 잊어버리곤 했었습니다. 그리고, 몇 해가 지나 책을 읽다가 발견하곤

했던, 미처 코팅하지 못했던 낙엽들. 그 낙엽들을 책에 끼울 때 어떤 마음으로 누구를 생각하며

끼웠는지는 생각나지 않았지만, 그리고 그 낙엽들에는 아무런 표시도 글씨도 없었지만, 그것들을

모으던 나의 마음이 느껴져 왠지 마음 푸근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저 멀리 발리 우붓에서 발견한 거리의 차낭들로부터 그 낙엽들에 담긴 나의 마음과 같은 발리인들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고, 낙엽을 발견하며 마음 푸근했던 것처럼, 차루들을 발견할 때마다 조금씩

마음이 따뜻해져 갔습니다. 일상의 신앙이 고스란히 담긴 아름다운 상징이면서도, 몇 일 머물지

못하는 여행객에 불과한 저에게는 마주하는 매순간 보내주는 위안의 편지로 느껴졌습니다. 차낭과

차루의 본래 의미와는 전혀 관계없이, 4박 6일의 짧은 일정동안 저에게 가장 큰 위로와 용기를

주었던 것은 25년지기 친구도, 우붓의 멋진 자연환경도 아닌, 그저 바닥에 놓인 자그마한 바구니,

차루였습니다.

발리 우붓에는 아름다운 사원들도 많이 있지만, 제가 만난 길거리의 차루들안에는 그 어떤 아름다운

사원들보다도 아름다운 발리인들의 마음과 신앙이 담겨 있었습니다. 만약, 당신의 다음 여행지가

우붓이라면, 길거리에서 차루를 발견하는 기쁨을 놓치지 마세요. 그리고, 부디 그것을 밟지 마시고

살짝 옆으로 지나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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