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성리를 쓰다>
7월22일은 소성리길을 미군에게 열어주기 위해 24번째 군경합동작전이 있는 날이었다. 5시40분 경에 경찰병력이 마을길로 내려와서 주황색 질서유지선을 쳤고, 도로로 나온 사람들에게 불법집회는 엄중하게 사법처리하겠다고 경찰방송차량에서 경고방송을 시작했다. 성주경찰서장의 위임을 받은 경비작전계장이 도로를 점거하는 행위는 불법집회라면서 마을회관으로 이동하지 않으면 사법처리하겠다는 취지의 방송을 5시43분에 3번째로 했으니까, 1분에 한번 방송을 한 셈이다. 5시49분에 5번째 의미 없는 방송을 했고 그다음부터는 2분간격으로 앵무새처럼 떠들어서 횟수를 세지는 못했다. 경찰이 해산명령을 방송한 건 6시28분이 1차경고방송을 시작으로, 6시32분, 6시36분, 6시40분, 6시44분에 5차 해산방송을 한 걸 보니까, 경찰해산경고방송은 4분간격으로 한 셈이다. 경찰방송의 내용은 스스로 일어나서 마을회관으로 이동하지 않으면 강경하게 사법처리하겠다는 것과 현장체포 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또 경비과장이 현장에서 마이크를 잡고 경찰들에게 강제로 끌어내지 말고 스스로 이동할 수 있도록 하라면서도 말을 듣지 않으면 체포한다는 이야기를 자꾸 하길래, 나는 그의 말소리를 찍기 위해서 가까이 다가갔다. 내가 얼굴에 카메라를 대자, 초상권을 침해한다고 불쾌하는데, 사실 나는 그의 얼굴을 찍는 게 목적이 아니라 경비과장의 육성멘트를 녹음해두고자 했다. 주변이 조용하면 간격을 유지하면서 촬영을 하면 좋으련만, 워낙 경찰들의 방송소리와 사드반대 집회주최측의 방송소리 그리고 집회현장에서 들려오는 구호소리와 비명소리가 뒤섞여서 도저히 경비과장의 육성을 녹취할 수 없어서 카메라를 최대한 경비과장의 얼굴 가까이 가져갈 수 밖에 없었던 건데, 경비과장은 마치 내가 일부러 자신의 얼굴을 집중 공략하는 걸로 오해를 한 듯 했다. 그러면서 그는 내게 자신은 공인이 아니라 공무원이라고 했다. 공무원의 얼굴은 함부러 찍으면 안되고, 만약 자신의 얼굴이 내 영상화면에 나오게 되면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내게 화를 냈다.
성주경찰서의 경비과장은 집회대오 한 가운데서 마이크를 잡고 도로를 점거하는 행위는 불법행위이고, 스스로 마을로 이동하지 않을 시에 강경하게 사법처리 할 방침이라고 방송했다. 또는 소성리마을길에서 집회하고 있는 이들에게 체포당할 수 있다고 공지했다. 집회시위의 자유를 보장해야 할 경찰공무원이 민원인들을 상대로 공식발언을 한 것인데, 이걸 취재하고 촬영하는 것이 왜 법적 조치를 당할 일인가. 나는 경비과장이 공무집행하는 모습을 공개할 수 없다는 것으로 들려서 당혹스러웠다. 공무집행은 공식적인 것인데, 지금까지 마이크 잡고 공식 발언한 것이 공무집행하는 것이 아니라 사적인 의견인가 다시 물었을 때, 그는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공무를 수행하는 이에게 질문할 권리가 우리에게 없나? 또는 공무집행하는 내용, 정보를 공개하면 안되는 이유가 있나? 아무튼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성주경찰서 경비과장의 태도에 조금 당혹스러웠지만, 그의 공식발언은 역사적으로 경찰이 미군기지 건설에 어떻게 부역하고 기여하여왔는지 중요한 사료가 될 수 있다고 생각되어 집중 촬영하였다.
먼 훗날 역사가 말해 줄 거라 믿는다.
22일은 소성리부녀회장님의 2심 선고재판이 있는 날이었다. 지난번에 내가 부녀회장님을 대구지방법원으로 모시고 가서 재판을 받고 선고날짜를 받아왔는데, 그 사이 까맣게 잊고 있었다. 전날 조은샘이 마치 기억해두셨다가 선고재판인데 가느냐고 내게 연락이 왔고, 나는 국민건강보험고객센터 노동자들이 대구에서 투쟁문화제를 갈 계획이어서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부녀회장님 재판인데 당연히 법원을 쫓아가야 마땅하지만, 고객센터 노동자들이 3차 파업에 들어가있는데도 한번 들여다보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려서 대답을 못하고 머리로 계산기만 뚜드리고 있었다. 다행히 박공주님이 봉고차량을 운행해서 할머니들을 모시고 가셨고, 나는 조은샘의 차를 얻어타고 법원을 들렀다가 고객센터노동자들의 투쟁문화제를 다녀올 수 있었다.
부녀회장님은 사드기지 둘레길로 나물 뜯으러 갔다가 철조망에 가로막힌 길에서 철조망을 걷어서 기지안으로 들어간 사건이었는데, 저들은 건조물침입과 1건 더해서 기소했고, 1심에서 징역10월에 집행유예2년을 선고받았던 건데, 2심에서 벌금 500만원을 받았다.
부녀회장님은 돈 500만원 벌금이란 말에 집행유예로 가만히 놔두지 라고 하셨지만, 우리는 집행유에 보다야 당연히 벌금으로 떨어뜨린게 기쁜 일이었고, 꼬리표를 떼게 되어서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다행이라고 했다.
할머니들은 예전같으면 나물 뜯으러 오르락 내리락 거렸고, 나무 해다가 김천 장에 내다팔러 다녔던 길인데, 실제로 철조망 안쪽에 달구지 끌고 다니던 길이 잘 닦여있었다. 철조망이 들어서서 오도가도 못하게 만들어놔서 기가 차다고, 말도 안되는 재판을 보고 있으려니 속에 천불이 난다고 하셨다. 할머니들은 이제 연세가 있으니까 직접 사드기지 둘레길을 걷지 못하지만, 워낙 오랜 세월을 소성리에서 살면서 드나들던 길이라서 위치를 설명하면 그 자리가 어딘지 알아맞춘다. 그 곳에 어떤 나물이 잘 자랐고, 어떤 걸 캐와서 살림에 보탰는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신 듯 했다.
앞으로 미국의 전략무기 사드가 이 땅에서 얼마나 많은 범법자를 만들어낼지, 자식들 키울 때는 그 흔한 “가시나야”, “머스마야” 하는 말도 함부러 써본 적 없었고, 남들한테 욕이라고는 입밖에 낼 줄도 모르고 살았는데, 이노무 사드가 들어와서 팔십평생을 입밖으로 내지 않던 욕이 자꾸만 늘어간다고 할머니들은 한탄을 한다. 나도 누군가를 때린 적도 없거니와 누군가에게 함부러 욕을 해 본 적 없었다. 지금은 걸핏하면 입에서 욕이 튀어나오려고 한다. 사드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험하게 만드는지, 세상천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드를 얼릉 뽑아내버려야 우리가 일상을 되찾을 수 있을텐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