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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무형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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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민 Nov 13. 2016

#2. 뜻밖의 재회 (5)

2014.08.30. 남아프리카 공화국

 쌀쌀한 공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8월의 남반구는 겨울이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겨울이라고 부르는 수준의 기온은 아니었기 때문에 청바지와 긴팔 남방 하나를 걸친 채 숙소 로비에 앉았다.

 8시 30분이 되자 백인 여자 한 명이 들어와 나를 찾았다.

 “케이프 반도 투어 가시는 분?”

 “여기요.”

 그녀를 따라 투어 봉고차에 오르니 이미 세 명의 유럽 남자가 타고 있었다. 가볍게 인사말을 건넨 뒤 좌석에 앉았다. 차는 시내 곳곳을 돌며 함께 투어를 할 사람들을 태웠다. 케이프타운 역에서는 여자 네 명을 픽업했는데 이때 운전하던 백인 여자가 내리고 흑인 남자가 우리를 이끌게 되었다.

 “오늘 여러분의 가이드를 맡은 셀레라고 합니다. 기분들은 좋으신가요?”

 그의 목소리에서 영국식 억양이 묻어났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1815년부터 1961년까지 영국의 식민지였던 곳이다. 셀레 씨는 쾌활했으며 신사적인 어투를 가지고 있었다.

 캠스 베이에서 마지막 사람을 태우면서 일행은 셀레 씨를 제외하고 총 12명이 되었다. 차는 해안가를 따라 남쪽으로 달리다가 곧 ‘후트 베이’라는 이름의 마을에 들어선 뒤 작은 부두의 주차장에 멈춰 섰다.

 “여러분, 여기는 후트 만이라는 곳입니다. 여기에서 배를 타고 ‘물개 섬’에 다녀올 거예요. 뱃삯은 55랜드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투어 비용에 포함이 되어 있거든요.”

 케이프 반도 투어의 비용은 540랜드로 교통비, 입장료, 점심 식대, 그리고 희망봉에 가는 도중에 타게 될 자전거 대여비가 포함되어 있었다. 셀레 씨는 활기찬 목소리로 이야기하고는 우리를 정박해 있던 작은 배 위로 올려 보냈다.

 배에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올랐고, 우리들은 각자 적당한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안녕, 넌 어디에서 왔니?”

 바다가 보이는 배 오른쪽의 벤치에 앉아 옆에 앉은 일행에게 인사했다. 그녀는 마치 글램펌을 한 것 같은 금발과 새하얀 피부를 가진 서양인이었는데 얼핏 나의 또래로 보였다.

 “독일에서 왔어. 너는 어디에서 왔어?”

 우리는 각자 국적과 이름을 이야기했다. 그녀는 자신을 리올라라고 소개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어디 가본 곳 있어?”

 “아니, 케이프타운으로 입국해서 이제 사흘째야. 아직 테이블 마운틴밖에 못 가봤어.”

 “그럼 언제까지 있으려고?”

 “나미비아 비자를 신청해 놔서, 다음 주 월요일에 받고 화요일에 바로 나미비아로 가려고. 너는?”

 “1주일 정도 케이프타운에 머물고 떠날 거야. 3주 정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다른 곳을 여행하고 병원으로 가려고. 사실 봉사활동으로 온 거거든.”

 “대단하다. 그러면 지금 방학이야?”

 “응, 방학이기는 한데 이번 주에 끝나. 하지만 괜찮아. 휴학했거든.”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카약을 탄 아저씨와 할아버지가 노를 저으며 우리가 탄 배 옆에 딱 붙어 움직였다. 배의 속력이 그다지 느리지 않았는데 전혀 뒤처지지 않는 것을 보며 굉장한 팔 힘이라고 생각했다.

 배는 이윽고 검은 바위 두 개가 보이는 곳에서 멈춰 섰다.

 “여러분 앞에 보이시는 게 물개 섬입니다.”

 맙소사.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섬이 아니었다. 물 위로 튀어나온 바위 두 개일 뿐이었다. 자세히 보니 그 위에 상당수의 물개들이 올라가 있었다. 멈춰 있던 배가 조금 움직여 그 바위들에 더 가까이 다가가니 그 모습이 더 자세히 보였다. 대부분의 물개들은 바위 위에 축 쳐져 있었으며 간간히 바다에서 기어 올라오는 모습도 보였다. 배에 탄 사람들은 연신 사진을 찍어댔다.

 “냄새가 좀 나는 것도 같은데.”

 리올라가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확실히 삭힌 오줌 같은 냄새가 바람에 조금 섞여 있었다.

 배는 그렇게 한동안 방향을 바꿔가며 머물다가 곧 왔던 방향으로 출발했다. 물개 섬이라는 이름만 듣고 어디에 잠시 내렸다 타기라도 하는 줄 알았는데 생각보단 참 별 거 없었다.


 선착장으로 돌아오니 붉은 띠가 둘러진 하얀 챙모자를 쓰고 입가를 하얗게 칠한 다섯 명의 광대 할아버지들이 전통 악기들을 들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가장 앞에 있는 할아버지는 리듬을 타며 돈이 들어있는 모자를 흔들어댔다.

 “이번에는 아프리카 펭귄을 볼 수 있는 볼더스 해변으로 갈게요.”

 모든 인원이 차에 오르니 셀레 씨가 운전을 시작하며 다음 목적지를 알렸다. 그는 가던 도중에 후트 만이 보이는 한 전망 좋은 곳에 멈춰 섰는데 녹색으로 뒤덮인 주변 지형들이 아름다운 새파란 바다와 어우러져 아름다웠다.

 “사진 좀 찍어줄?”

 차에서 내려 몸을 풀던 차에 키가 상당히 큰 남자 한 명이 다가와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좋.”

 그의 전화기를 받아 사진을 찍어주고 나도 사진을 부탁했다.

 “어디에서 왔? 중국? 일본?”

 “한국에서 왔어.”

 동양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서양인이 동아시아인의 국적을 짐작할 때 주로 나오는 나라 중에 한국이 처음으로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중국, 일본, 혹은 태국이나 때로는 필리핀이었다. 인도보다 동쪽에 위치한 아시아 국가의 인구 순위는 중국, 인도네시아, 일본, 필리핀, 베트남, 태국 다음이 한국이었으므로 어떻게 보면 인구 순위 순서대로 물어보는 것 같기도 했다.

 “아, 미안. 한국은 전에 한 번 가봤. 서울이었나.”

 “언제 가봤는?”

 그는 눈동자를 위로 굴리다가 입을 열었다.

 “음, 10년 정도 된 것 같. 사실 잘 기억은  .”

 “엄청 오래됐. 지금 다시 가보면 아마 꽤 많이 바뀌어 있을 거.”

 “응, 조만간 다시 방문해 보고 싶. 혹시 서울 남쪽에도 등산할 만한 곳 있? 등산을 좋아해서.”

 “물론이지. 한국 국토의 약 80퍼센트가 산지인.”

 수많은 좋은 산이 있지만 그에게 설악산, 지리산, 한라산 정도만 영어식 철자와 함께 알려주었다. 유심 칩을 사지 않아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보여줄 수 없다는 게 아쉬웠다. 차에서 셀레 씨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볼더스 해변은 그다지 머지않은 곳에 있었다. 개인적으로 입장하려면 55랜드를 내야 했으나 우리 일행은 투어 비용으로 지불했기 때문에 셀레 씨의 안내를 받으며 지체 없이 차례대로 입장했다.

 케이프타운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색은 녹색, 그다음이 청색이다. 시내에서나 해변에서나 어디든 나무와 풀이 가득했고 종종 날씨가 안 좋은 날을 제외하고는 하늘에는 빨려들 것 같은 청명함이 있었다. 우리는 새파란 하늘 아래, 풀밭 위에 만들어진 하얀 나무 발판 위를 걸었다. 같은 하얀색으로 만들어진 난간에는 [조심하세요. 펭귄이 물 수도 있습니다.]라고 적힌 안내 표지가 붙어 있었다. 고개를 들어 올리면 햇빛이 산란해서 눈부시게 반짝거리는 펄스 만을 눈에 담을 수 있다. 펄스 만은 케이프반도와 반대편으로 약 35km 떨어진 코겔버그 자연보호구역 사이에 위치한 바다이다.

 나무 발판이 끝나는 곳은 하얀 모래의 해변이다. 그 해변 위에 아프리카 펭귄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이 동네 동물들은 널브러져 있는 걸 참 좋아하는 모양이다.

 “저거 가짜 맞지?”

 오뚝 서 있는 펭귄 모형 하나를 가리키며 리올라에게 물었다.

 “응, 마네킹 같아.”

 펭귄 수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때문인지 상당수의 펭귄 모형들도 볼 수 있었다. 해변, 바다, 바위 위, 풀밭에 있는 녀석들까지 합하여 얼핏 보기에는 백여 마리는 되어 보였으나 대다수가 모형 같았다. 펭귄들은 종종 바다에 가서 물을 적시기도 했고 뒤뚱대며 서로에게 다가가 무언가 의사소통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녹지대, 강렬한 태양, 눈부신 바다, 자갈로 이루어진 백사장, 그리고 펭귄이 있었다. 어찌 보면 모형이 실물보다 더 많은 느낌이 들 정도로 개체수가 많지 않았고 수 미터 떨어진 발판 위에서 보는 것이었기 때문에 실망도 있었으나 흔히 떠올리는 남극 펭귄이 아닌 아프리카 펭귄이 눈앞에서 돌아다니는 것은 꽤나 진기한 일이었다. 볼 것이 많은 것은 아니었으므로 우리는 곧 돌아 나왔다.


 “여기에서부터 자전거를 타고 오세요.”

 볼더스 해변 옆에 위치한 ‘시몬의 마을’에서 조금 벗어난 언덕에 셀레 씨는 우리를 내려주었다. 그는 우리의 도움을 받아 열두 개의 자전거와 안전모를 내린 뒤 혼자 차를 타고 멀찌감치 떠나버렸다. 털털거리며 멀어져 가는 차를 보며 왠지 버려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들던 찰나에 차는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아무래도 이 생각은 나만 한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상하게 좀 당황스럽네.”

 덥수룩한 수염을 하고 있는 청년이 중얼거렸다.

 “뭐 경주라도 해야 할 것 같지 않아?”

 아까 등산 얘기를 하던 키 큰 남자가 말했다.

 “좋아. 그럼 달려 보지, 뭐.”

 나는 페달에 발을 올렸다. 푸른 녹지 사이로 길 하나가 나 있었다. 그 길은 케이프반도 남쪽 끝을 향해 있었다.

 “시작.”

 우리 셋은 동시에 열심히 달려 나갔다. 바람이 뺨이 할퀴며 지나갔다. 안전모 사이로 난 구멍들로 시원한 바람들이 두피를 때렸다. 주변은 텔레토비 동산처럼 초록이 가득했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뒤를 돌아보니 그새 우리 뒤로 길게 꼬리가 이어져 각자 어느 정도 일정한 간격을 두고 따라오고 있었다. 6km 정도 달렸을까. 너무나 전망 좋은 장소가 나타나서 잠시 멈췄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곳이 더할 나위 없는 상쾌함을 내뿜고 있었다.

 “앗.”

 다시 출발하려는 찰나에 어디선가 헛바퀴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다가가 보니 한 여자 일행의 체인이 빠져 있었다. 키 큰 남자와 나는 페달과 뒷바퀴의 체인 상태를 확인했다. 페달 쪽의 체인이 꼬여있었다.

 “방금 이렇게 된 거야?”

 꼬여있는 체인을 풀며 물었다. 손에 기름이 묻었다. 이런, 휴지를 안 가져왔는데. 이따가 닦아야겠다.

 “응, 딱 타려고 하는데 이 상태지 뭐야.”

 체인을 풀고 앞 변속기를 들어 올려 거치한 뒤 크랭크 셋에 걸었다. 페달을 살짝 돌려보니 문제없이 작동했다.

 “오케이, 됐다.”

 “고마워.”

 다시 안장에 올라 속력을 내었다. 아까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서로 뭉쳐서 천천히 나아갔다. 주변을 찬찬히 감상하다 보니 어느새 여행자 센터에 도착해 있었다.

 셀레 씨는 점심 식사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빵, 치즈, 버터, 파스타, 나쵸, 사워 소스, 샐러드, 사과, 과일 주스, 초코 칩 쿠키로 이뤄진 식사였다. 손을 씻고 와서 식사를 한 뒤, 리올라와 케이프타운에서 뭐 했는지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냈다. 바람에 머리가 나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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