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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무형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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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민 Nov 20. 2016

#2. 뜻밖의 재회 (6)

2014.08.30.~08.31. 남아프리카 공화국

 나는 그것을 응시했다. 그것은 천장 위를 어슬렁어슬렁 걸어 다녔다. 그것은 갑자기 멈춘 채 이쪽을 바라봤다. 나와 한동안 눈을 마주치다가 다시 한쪽 끝으로 느긋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갑자기 뛰어내렸다.

 “으악!”

 사람들이 뒤로 물러섰다.

 “조심하세요. 너무 다가가지 마시고요. 혹시 먹을 것 가져오신 분 없으시죠?”

 셀레 씨가 앞에서 사람들을 인도했다.

 우리 앞을 가로막은 것은 바분, 즉 개코원숭이였다. 그것은 우리를 힐끗 보더니 이내 흥미를 잃은 듯 휘적휘적 어디론가 사라졌다. 주변 관광객들은 사진 찍기에 바빴다.

 “제가 깜빡하고 말을 안 했는데, 개코원숭이는 음식물이 들어 있는 가방에 손을 집어넣거나 가방을 뺐어가기도 하니까 개코원숭이 있는 곳에 갈 때는 먹을 것 가지고 오면 안 돼요.”

 셀레 씨는 때늦은 안내를 하고는 매표소 쪽으로 향했다.

 건물에는 [케이프 포인트. 테이블 마운틴 국립공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케이블카를 타는 곳이었는데 어른 왕복 52랜드, 편도 42랜드, 학생 왕복 22랜드, 편도 17랜드였고 운영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였다. 셀레 씨는 탈 사람은 타고 걸을 사람은 걸으라고 했으나 우리 열두 명은 모두 걷는 것을 택했다.

 걸어서 케이프 포인트에 가는 길목의 갈림길에는 표지판이 하나 서 있어서, 왼쪽 방향은 [케이프 포인트, 등대], 오른쪽 방향은 [희망봉, 걸어서 왕복 1.5시간]이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케이프 포인트에 먼저 방문하기로 했기에 모두 왼쪽 길로 들어섰다.

 풍경은 지금까지와 같았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랬고, 좌우로는 키 작은 녹색 식물들이 가득했으며, 우리는 가운데 난 돌길을 걸었다. 뒤를 돌아보니 낮은 산줄기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어제 테이블 마운틴에서 본 풍경을 반대편에서 보는 셈이었다. 길 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걷고 있었고 활기와 생기가 가득했다. 날씨는 매우 좋아서 반팔을 입은 사람부터 얇은 패딩을 걸친 사람까지 다양했다. 끝에 다다르니 검은색, 흰색, 빨간색으로 칠한 등대 하나가 서 있고 그 옆에는 베를린, 파리, 베이징, 시드니, 암스테르담, 런던 등 세계 주요 도시까지의 거리를 가리키는 표지가 있었다. 케이프타운에 오기 바로 직전에 있던 도시를 가리킨 [싱가포르. 9,667km]라는 표지도 있어 반가웠다.

 “나 사진 좀 찍어 줘.”

 리올라가 휴대전화를 건네고 1km 조금 넘게 떨어진 곳에 있는 희망봉을 배경으로 섰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애매했다. 바위 곶과 그 위의 녹지, 도중에 보이는 디아스 해변과 해변에 부딪혀 부서지는 흰 파도가 하나의 사진에 담겼다.

 “나도 부탁할게.”

 이번에는 내가 그 배경에 섰는데 바람이 심각하게 많이 불었다. 머리가 이마 위에서 끊임없이 춤을 췄다. 리올라가 사진을 찍다가 웃어 댔다.

 “미안, 제대로 찍기가 어려웠어.”

 사진 속의 나는 앞머리가 없었다. 리올라는 이미 도망치듯 아래로 내려갔다. 망할 놈의 바람 같으니라고.


 내려와 갈림길 부근에 있는 [케이프 포인트. 남위 34도 21분 24초. 동경 18도 29분 51초. 남아프리카]라고 적힌 팻말을 거쳐 주차장에 모였다.

 “희망봉에 갈 건데 걸어서 가실 분은 걸어가고 차 타실 분은 차 타실 게요.”

 등산을 좋아한다던 키 큰 친구, 자전거 시합을 했던 수염 많은 청년, 리올라, 그리고 한 독일 남자와 나까지 다섯 명이 걷기로 했다. 왕복 1시간 30분 거리라고 하니 편도로는 45분, 실제로는 40분도 안 걸릴 거리일 것이다. 이렇게 날 좋은 날, 대서양의 해변을 따라 걷는 즐거움을 포기하기는 싫었다.

 가는 길은 예상만큼 만족스러웠다. 걸음걸음마다 감탄을 자아냈다. 길은 흙길과 돌길, 나무 발판이 있는 길이 어우러져 있었고 디아스 해변의 모습은 남국의 정취를 나아냈다. 더욱이 좋았던 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였다. 저 너머에 남극이 있을 것이다. 그 생각은 상당한 모험심을 불러일으켰다. 언제나 아직 밟아보지 않은 땅을 상상하는 것은 기분 좋은 자극을 준다. 모든 여행은 설렘이다.

 이윽고 그 길의 끝에서 [희망봉. 아프리카 대륙의 최 서남단. 동경 18도 18분 26초, 남위 34도 21분 25초]라고 적혀 있는 팻말 앞에 모여 있는 일행과 합류했다. 시내로 돌아오는 차에서는 내내 잠에 빠져 있었다.


 케이프타운 기차역을 찾는 것은 더 이상 어렵지 않았다. 숙소가 위치한 웨일 스트리트의 남쪽 끝으로 내려와 그 끝에서 이어지는 애덜리 스트리트라는 대로를 따라 걷다 보면 오른쪽에 널찍한 1층짜리 건물을 볼 수 있다. 인근에는 삼성 빌딩과 ‘압사 은행’ 빌딩을 포함한 마천루들이 자리 잡고 있어서 방향을 찾는 것도 용이했다.

 기차역 내에 들어서 매표소로 향했다. 역에는 거지가 참 많았는데 그중 한 명이 달라붙었다.

 “돈은 안 줘도 되니까 제발 먹을 거라도 좀 사주세요.”

 그는 상당히 끈질겼는데 덕분에 주변 거지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케이프타운에는 동양인이 거의 없다. 흑인과 백인으로 가득한 도시에서 한 동양인과 그를 졸래졸래 따라다니는 시끄러운 남자는 꽤나 시각과 청각을 집중시키는 요소였다. 이미 저녁에 접어든 시각에 부랑자들의 관심을 필요 이상 받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를 겨우 떼어내고 37랜드에 내일 출발하는 스텔렌보스 왕복 기차표를 샀다. 탑승 시간은 자유로워서 언제 출발하는 것을 타도 상관없었는데, 때문에 마치 지하철 표 같은 느낌이었다.

 역에서 나온 뒤 장을 보기 위해 시내를 거닐었다.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거리 한복판에서 여자 한 명이 따라붙었다.

 “이봐, 어디 가?”

 “왜 물어보는데?”

 “나 배고픈데 밥 좀 사줘.”

 뭘까, 이 당당함은. 이 사람도 거지였군.

 “싫은데.”

 일부러 가려던 목적지로 향하지 않고 다른 곳을 맴돌았다. 이 여자를 먼저 떼어내고 싶었다.

 “밥 안 먹었지? 같이 먹자.”

 “먹었는데.”

 “그럼 나 먹는 거 구경해.”

 “미쳤냐?”

 픽앤페이가 위치한 롱 스트리트와 스트랜드 스트리트의 교차점을 코앞에 두고 번화가에 해당하는 롱마켓 스트리트와 숏마켓 스트리트 인근을 배회했다.

 “너 마음에 든다. 사귈래?”

 “저리 가, 이제. 피곤해.”

 그녀는 뭐가 좋은 지 까르르 웃더니 팔짱을 끼려고 손을 내 팔꿈치 안쪽으로 넣으려고 했다.

 “만지지 마.”

 단어마다 힘을 주어 이야기했으나 그녀는 귓등으로도 안 듣고 폴짝거리며 얄밉게 내 어깨를 건드렸다.

 “만질 건데.”

 후우.

 한숨을 내쉬고 그 이후부터는 완전히 없는 사람 취급했다. 그녀가 혼자 한동안 떠들었던 말들은 기억 속에 넣지 않았다. 그렇게 몇 분인지 모를 시간을 걷고 나니 그녀가 사라져 있었다.


 픽앤페이에서는 나사 모양의 파스타 면 종류인 푸실리와 각각 9.80랜드의 4가지 치즈가 들어있는 맛, 토마토 베이컨 맛, 사워크림 버섯 맛의 총 세 가지 가루 스프를 하나씩 샀다. 그리고 그저께 보캅 구역에 들렀다가 눈에 봐 둔 리큐어 가게에 들러 포도주 한 병을 샀다.

 “저 왔어요. 저녁 아직 안 했죠?”

 한국인 형은 거실에서 컴퓨터를 하고 있었다.

 “네, 뭐 사 왔어요?”

 나는 사온 재료들을 꺼내 놓았다.

 “잘됐네요. 나 고기랑 버섯 있으니까 같이 넣어서 해 먹죠.”

 파스타 면을 삶고, 소고기와 버섯을 손질한 뒤 스프로 소스를 만들어 곧 음식을 완성했다. 만들어진 저녁 식사를 테라스로 가지고 나온 뒤 잔에 포도주를 따랐다.

 해가 완전히 진 케이프타운의 시내는 그다지 활기차지 않다. 숙소가 지면에서 꽤 높은 위치에 있어서 주변 환경이 잘 보였는데, 번화한 대로에 해당하는 웨일 스트리트에조차 걷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였으며 지나다니는 차도 많지 않았다. 불이 켜진 간판도 얼마 없었다. 어둠이 내린 조용한 도시에서 술잔을 부딪치는 경쾌한 소리가 퍼졌다.

 검은 하늘 아래의 선선한 공기에 파묻혀 우리는 다양한 이야기를 했다. 포도주, 별자리, 악기와 음악, 여행, 한국에서의 삶, 그리고 지나간 옛날 일들. 종종 고막을 울리는 지나가는 자동차 엔진 소리를 추임새 삼아 한참이나 떠들었다.


 아무래도 어제는 정신이 나갔던 것 같다. 형과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한국인 아저씨 한 명이 들어왔는데 우리와 합석했다. 아저씨도 포도주를 가지고 와서 우리는 포도주를 한 명 더 열었다. 그리고 그는 이름은 모르겠지만 현지에서 마시는 어떤 술을 선보였다. 얼큰하게 취해서 라면까지 끓여먹은 뒤 골아떨어졌다.

 아침 7시 알람은 지옥과도 같은 소리를 내었다. 침대에서 기어 나와 뜨끈한 이마를 찬 물로 식혔다. 샤워를 마치고 역으로 가니 이미 7시 52분 기차는 떠나 있었다. 기차가 떠나간 11번 플랫폼에서 동양인인 나를 보자 무에 타이가 어떻다는 둥, 킥복싱이 어떻다는 둥 떠들어대는 남자 한 명과 이야기하다가 그에게서 다음 기차 시간이 9시 20분이라는 것을 알아내고 밖으로 나왔다.

 케이프타운 역에는 맥도날드가 있다. 빅맥 단품이 24랜드, 즉 2,400원이다. 오렌지 미닛메이드는 15랜드, 즉 1,500원이었는데 빅맥의 저렴한 가격 때문인지 평소보다 비싸게 느껴졌다. 빅맥에 들어있는 사각거리는 양배추가 마음에 들었다. 햄버거와 오렌지 주스로 아침을 해결한 뒤 다시 역에 들어가니 전광판에 9시 20분 기차가 9시 50분으로 지연됐다고 적혀 있었다. 때문에 화장실도 갔다 오고 밖을 배회하다 돌아왔는데 웬일인지 지연이 풀려 있다. 와보기를 다행이다. 또 놓칠 뻔했네.

 기차 내부는 마치 새마을호 같았다. 사람이 많지 않았는데 내가 올라탄 차량에도 열 명이 채 되지 않는 승객만이 있었다. 적당한 창가 자리에 앉아 바깥에 시선을 두었다. 케이프타운 시내가 빠르게 스쳐갔다. 스텔렌보스까지 기차를 타고 걸리는 시간은 대략 1시간 20분이다. 부족한 수면시간을 채울 겸 잠을 청했다.


 기차에서 내리니 한결 개운했다. 나는 숨을 힘껏 들이마셨다. 기분 좋은 공기가 폐부를 자극했다.

 스텔렌보스는 케이프타운과는 매우 다른 분위기의 동네였다. 고층 건물이 전혀 없었으며 아름다운 마당을 품고 있는 전원주택이 가득했다. 길에는 가로수들이 줄지어 있었으며 건축물들은 온통 흰색이었다. 시내 중심가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주택들이 뜨문뜨문 간격을 두고 있었으며 건물과 도로가 아닌 모든 공간은 우거진 나무들로 차 있었다.

 이곳은 아프리카 대륙 최대의 포도주 생산지로 잘 알려진 곳이다. 스텔렌보스에서는 연간 10억 리터 이상의 포도주가 생산된다. 관심이 있는 나로서는 한 번 방문해 보고 싶었던 도시였다. 하지만 나는 곧 오늘 이곳에서 포도주를 마시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여행자 정보 센터에서 지도를 하나 챙겨 나와 시내를 산책하면서 알게 된 것은 포도주 양조장이 일요일에는 거의 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2014년 8월 31일, 오늘은 일요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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