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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무형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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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민 Nov 27. 2016

#2. 뜻밖의 재회 (7)

2014.08.31.~09.01. 남아프리카 공화국

 나무를 타고 흘러든 바람은 달콤하게 젖어 거리를 배회했다. 청명한 하늘의 뚜렷한 태양은 쉴 새 없이 이 도시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옆에 보이는 건물의 흰 벽에 햇빛이 비쳐 산란했다.

 주말의 전원도시는 고즈넉했다. 그럼에도 활기가 있었다. 옆 동네인 케이프타운과 상반되게도 이 도시에는 빠른 걸음으로 걷는 사람이 없었다. 도심에서 아주 약간 벗어난 곳에는 스텔렌보스 대학이 자리 잡고 있어 이지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 옆의 스텔렌보스 대학 식물 정원을 거닐다가 시 외곽으로 발길을 돌렸다.

 스텔렌보스 센트럴을 서쪽으로 벗어나 R310 대로를 따라 걷다 보면 오른쪽으로 데번 파크와 데번 밸리가 나타난다. 여기에서는 포도밭이 끝없이 이어지는 장관을 연출한다. 서쪽뿐 아니라 스텔렌보스 외곽의 어디를 봐도 초록 들판이 물결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 인근은 강렬한 색채가 자극적이다. 첫날과 둘째 날 먹구름과 비 때문에 감춰졌던 색이 이제는 완연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별생각 없이 돌아다니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니 건물 하나, 차 한 대 안 보이는 도로를 걷고 있었다. 혹시 강도라도 만나게 되면 큰일이라는 생각이 들어 다시 시내로 돌아왔다. 마트에서 크리미 소다 하나를 사고 햄버거 체인점 ‘윔피’에서 햄버거, 감자튀김, 아이스커피를 주문해 늦은 점심식사를 마친 뒤 케이프타운으로 돌아가는 기차에 올랐다. 아까는 새마을호 같은 기차였는데 이번에는 흡사 전철과 같은 녀석이 왔다. 우리나라 지하철처럼 객차 양쪽으로 긴 의자가 붙어있는 형태였고 사람도 매우 바글바글했다. 흔들대는 열차에 몸을 싣고 1시간 20분 동안 서서 음악을 들으며 케이프타운으로 복귀했다.


 숙소에 돌아와 보니 룸메이트가 한 명 늘었다.

 “안녕하세요. 리처드예요.”

 “안녕하세요. 안드레입니다.”

 그는 내가 쓰는 침대 위의 2층 침대에 자리를 잡았다. 내가 들어가 있는 방은 창가에 위치해 있었는데, 2층 침대 두 개가 있는 4인실이었다.

 “여행 다녀요? 뭐 하다가 왔어요?”

 “학생이에요, 한국 대학생. 그쪽은요?”

 “나는 포도주 유통하고 파는 일을 하고 있어요.”

 “정말요? 괜찮은 것 추천 좀 해 주실 수 있나요?”

 그는 내가 펼쳐 준 일기장 페이지 위쪽에 두 종류의 포도주 이름을 적었다. 하나는 피노타지 품종이었고, 다른 하나는 메를로 품종이었다. 어제 마신 포도주도 피노타지 품종이었다.

 “어제 피노타지 포도주 하나 마셨는데 정말 맛있었어요.”

 “그렇죠? 꽤나 매력적인 품종이죠.”

 피노타지는 고급스럽고 풍부한 향을 가진 피노 누아와 떫지 않으며 가벼운 무게감을 가진 쌩쏘를 교배하여 만든 포도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처음 만든 품종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와서 처음 마셔본 종류였는데 과일 향이 풍부하고 입맛에 상당히 잘 맞았다.

 “고마워요. 만약 보게 된다면 꼭 마셔볼게요.”

 그가 적어 준 페이지를 들어 보였다.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네, 좋은 포도주를 만나는 것은 삶의 기쁨 중 하나죠.”


 한국 라면이 사고 싶어 져서 어니 씨에게 중국 식품점 없냐고 물어보니 픽앤페이 옆의 성 조지 몰이라는 곳 인근에 있다는 말을 듣고 나가서 찾아보았으나 결국 빈손으로 돌아왔다.

 저녁 식사로는 어제와 같이 파스타를 먹었다. 하지만 오늘은 정말 면과 스프뿐이었다. 한국인 형은 어디에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혼자 소금을 살짝 넣어 면을 삶고 스프를 물에 풀어 소스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파스타는 정말 끝내주게 맛없었다.


 하루가 지난 오늘 아침도 그 어마어마하게 맛없는 파스타를 먹고 나왔다. 덕분에 아무래도 앞으로 파스타를 해 먹을 때는 곁들일 재료들을 꼭 사야겠다는 삶의 지혜를 얻었다. 아, 그리고 하나 더. 소고기와 양송이는 위대하다.

 크로스백에 간단한 짐을 챙겨 나와 나흘 만에 다시 ‘삼각형 하우스’에 들어섰다. 엘리베이터에 올라 21층을 눌렀다. 지난 목요일과 다르게 나미비아 영사관에는 사람이 꽤 많았다. 소파에 앉아 기다리다가 10시가 넘어가니 직원이 나를 불렀다.

 “지금 잔돈이 없어서 그러는데 내려가서 바꿔 올래요? 1층에 마트가 있는데 거기서 바꿔줄 거예요.”

 내가 건넨 400랜드 중 50랜드짜리 지폐 하나를 거슬러 주며 나에게 한 말이다. 뭐 어쩌겠나, 그들은 나의 소중한 여권을 가지고 있다. 나는 다시 엘리베이터에 올라 1층을 눌렀다.

 음료수를 하나 사고 잔돈 40랜드를 영사관에 내니 10분쯤 뒤에 나미비아 비자가 찍힌 여권을 돌려주었다.


 내일 나미비아 빈트후크에 가기 때문에 오늘 하루라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따라서 나는 어제 체험하지 못 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와인을 경험해보기로 했다. 사흘 전과 마찬가지로 롱 스트리트의 시티투어버스 사무실을 찾았다. 170랜드를 내고 파랑 노선표를 구입한 뒤 11시가 되기 조금 전에 버스에 올랐다.

 빨강 노선은 그린 포인트, 시 포인트, 캠스 베이, 테이블 마운틴 국립공원 등 케이프타운 시내에서 반경 5km를 벗어나지 않는 노선인 반면 파랑 노선은 상당히 멀리까지 이어진다. 가장 먼저 내린 곳은 케이프타운에서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10km 정도 가면 등장하는 커스텐보쉬 식물원이었다.

 커스텐보쉬 식물원은 테이블 마운틴 동남쪽에 위치한 곳으로 여러 테마 구역과 산책로가 있는 상당한 크기의 정원이다. 세계에서도 아름다움으로 손에 꼽는 식물원이라고 일컬어지는 곳으로 고유 식물들이 보존되고 있는 지역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지출할 것으로 예상해서 호주에서 환전해 온 금액의 현금을 다 써버렸기 때문에 입장료는 카드로 계산했다. 출국까지 하루밖에 남지 않았으므로 내일까지는 계속 카드를 사용할 생각이었다. 입장료는 50랜드, 약 5천 원 수준이었다.

 식물원에는 온갖 야생 식물들이 가득했다. 특히나 특이한 모양의 키 작은 식물들이 많았다. 입구에서 머지않은 곳에 있는 ‘만델라의 황금’이라는 식물을 본 이후로는 목적을 정해두지 않고 발길 닿는 대로 거닐었다. 이곳은 테이블 마운틴의 비탈에 위치하고 있는 만큼 오르막과 내리막이 많았다. 어느 걸음에서는 아름드리나무가 나타났고, 어느 걸음에서는 잔잔한 개울가가 등장했으며, 또 어느 걸음에서는 화려한 꽃이 모습을 드러냈다. 식물원의 높은 위치까지 오르니 끝없이 펼쳐진 너른 숲이 눈에 들어왔다. 햇볕과 바람과 녹음, 모든 것이 완벽했다.


 커스텐보쉬 식물원 다음의 목적지는 컨스텐시아였다. 컨스텐시아는 커스텐보쉬 식물원보다 남쪽에 위치한, 테이블 마운틴 중턱의 백인 부촌이며 규모는 스텔렌보스에 비할 바가 못 되지만 마찬가지로 포도주 생산 지역으로 유명하다. 케이프타운 시티 투어 버스의 보라 노선이 시작하는 곳이기도 한데, 파랑 버스에서 내리면 길가에 정차되어 있는 보라 버스로 바로 건너가 탈 수 있다.

 보라 노선은 각 정류장들이 포도주 양조장이었다. 몇 개의 정류장 중에 마음에 드는 정류장에 내려 그 양조장을 방문하는 방식이다. 물론 모든 곳을 방문할 수도 있다. 충분한 시간과 튼튼한 간을 가지고 있다면 말이다.

 처음 방문한 곳은 ‘그루트 컨스텐시아 양조장’이었다. 푸른 정원에 위치한 유럽식의 건물에서 시음을 할 수 있었는데 내부에는 오크통 모양의 탁자가 들어서 있었고 아프리카에서 볼 수 있는 동물들의 그림이 벽에 장식되어 있었다. 또한 건물 외부에도 탁자와 벤치가 마련되어 있어 바깥 정취를 느끼며 마시는 것도 가능했다. 시음 가능한 포도주의 종류는 총 열 가지였는데, 블랑 드 누아 2014, 세미용 소비뇽 블랑 2013, 소비뇽 블랑 2013, 샤르도네 2013, 컨스텐시아 루드 2011, 카베르네 프랑 2011, 카베르네 소비뇽 2012, 피노타지 2012, 시라즈 2011, 구베르네 리저브 레드 2011로, 이 중 다섯 가지의 포도주를 무료로 마셔 볼 수 있었다. 자주 마시는 품종인 카베르네 소비뇽, 시라즈 등을 제외하고 백포도주 두 종류, 적포도주 세 종류로 고르다 보니 블랑 드 누아, 소비뇽 블랑, 카베르네 프랑, 피노타지, 구베르네 리저브 레드를 순서대로 마시게 되었다. 처음에 마신 블랑 드 누아가 상당히 인상적이었는데 예쁜 분홍빛에 갓 나온 보졸레 누보처럼 자갈 같은 질감이 혀를 간질였고, 상쾌한 딸기 향과 씁쓸한 여운이 맴도는 독특하고 훌륭한 포도주였다.

 시음을 마치고 나와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포도주 내음 감도는 식당에서 먹은 음식은 배낭 여행자 신분에서 과분하기 짝이 없는 피노타지 포도주와 닭 가슴살 스테이크였다. 아침에 재료값 1,200원도 안 되는 훌륭한 파스타를 먹고 나왔으니 왠지 점심은 조금 지출을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다만 계산할 때 카드를 내밀었더니 나에게 음식을 가져다준 종업원에 대한 팁이라면서 알아서 돈을 올려 부른 것은 예정에 들어있지 않았다. 그렇게 아프리카에서 첫 팁을 지출하면서 호화로운 식사를 마무리 지었다.


 끝없이 이어진 포도나무의 바다는 눈의 피로를 날려주었다. “여기는 관계자 외 출입금지여서 들어오면 안 돼요.”라는 말을 듣고 밭을 벗어나기 전까지 그 푸른 녹지에서 시선을 거둘 수 없었다.

 두 번째로 방문한 ‘이글스 네스트 양조장’의 포도밭에서 빠져나와 시음장으로 갔다. 이곳은 그루트 컨스텐시아와 다르게 시음 비를 받았는데 다섯 종류에 40랜드였다. 그루트 컨스텐시아의 포도주만 마시고 돌아가기는 아쉬워서 이곳에서도 시음을 했는데 이미 전에 마신 양이 적지 않아서인지 그다지 기억에 남는 포도주는 없었다.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으로 나서니 엄마, 아빠, 딸 셋이 여행을 온 가족이 보였다. 말을 건네니 시카고에서 온 미국인이라고 한다. 아빠인 데이비드 씨는 한식을 참 즐긴다고 했다.

 “사실 매주 토요일마다 한식을 먹어요.”

 “매주요?”

 “시카고에 한국 사람이 굉장히 많이 살거든요. 한국인들끼리 파티를 자주 하는데 거기에 종종 들러요.”

 “좋아하는 음식 있어요?”

 “대체적으로 다 좋아해요. 입맛에 잘 맞는 편이어서. 비빔밥이나 불고기부터 잡채나 삼계탕까지 두루두루 좋더군요.”

 그는 그 파티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 밖에도 버스가 올 때까지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가족끼리 자주 여행을 다닌다는 것과 자신의 집 근처에 있는 호수에서 낚시를 즐긴다는 말을 하며 자신의 딸이 큰 물고기를 들고 있는 사진도 보여주었다. 그는 즐거워 보였고 가족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을 가득 품고 있었다.

 “미국에 와 본 적 있어요?”

 “아니요, 아직은 없어요. 그래도 나중에 공부를 위해서 갈 예정이에요.”

 “어떤 공부하는데요?”

 “우주과학이요. 특히 우주 방사선과 유인 우주 탐사에 관심이 많아서 박사 과정은 미국에서 할 계획이에요.”

 “멋있군요. 응원할게요.”

 “고마워요.”

 5시 12분에 정류장에 도착한 보라 버스는 오늘 보라 노선의 마지막 버스였다. 시카고에서 온 데이비드 씨 가족은 선착장의 정류장에서 내리면서 인사를 했고 나는 롱 스트리트까지 와서 하차했다.

 걸어오면서 보이는 구멍가게에서 4랜드짜리 치킨 맛 라면 두 개를 사서 숙소에 돌아와 고춧가루를 뿌리고 계란을 넣어 먹으니 그럭저럭 먹을 만했다. 잠에 일찍 들기 위해 9시 반 정도에 침대에 누웠다. 조금 남은 취기를 수면제 삼아 잠을 청했다.

 내일은 내 인생 첫 육로 출입국을 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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