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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무형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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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민 Dec 04. 2016

#2. 뜻밖의 재회 (8)

2014.09.02.~09.03. 남아프리카 공화국 | 나미비아

 딸깍, 딸깍!

 배낭의 버클을 잠그는 소리가 기분 좋게 울려 퍼졌다.

 “읏쌰.”

 무거운 배낭을 양 손으로 들어 올린 뒤 오른팔부터 멜빵에 집어넣어 등에 걸쳤다.

 숙소를 나오자 반겨주는 것은 새파란 하늘,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도시의 공기였다. 그다지 오래 머물지도 않은 낯선 도시에서 이미 낯익어져 버린 웨일 스트리트를 따라 걸었다. 줄지어선 유럽식 건물들에서 나오는 사람 소리도, 멀리 들리는 것 같은 관악기 소리도, 지나가는 차의 엔진 소리도 옆머리를 스쳐가는 바람을 타고 하늘로 흩어졌다.


 케이프타운 장거리 버스터미널에 도착하기까지 삼십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줄을 서서 빈트후크행 버스가 오기를 기다리는 내 앞쪽에 내 것 만한 크기의 배낭을 메고 동양인 남자 한 명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배낭에는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멀어서 읽을 수가 없었다. 어느 나라 사람일까 궁금해하던 도중 버스가 도착했다. 도착한 버스에 짐을 실은 시간은 9시 50분이었다. 버스는 어떠한 지체도 없이 10시 정각에 출발했다.

 2층 버스의 내부는 넓었다. 완전히 눕힐 수는 없지만 수면을 취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의자가 젖혀졌으며 좌석 앞뒤 간격도 널찍했다. 20시간 이상을 가야 하는 여정이기에 버스 1층 중앙에는 화장실이 비치되어 있었으며 한 층에 두 자리씩 휴대전화를 포함한 전자기기를 충전할 수 있는 콘센트가 있었다. 2층의 경우 15번 좌석과 16번 좌석이 콘센트가 있는 자리였는데 마침 운 좋게도 내가 앉은 좌석이 2층 15번이기 때문에 버스에 오르자마자 휴대전화를 연결했다. 16번 좌석은 비어있었다.

 “여기에 휴대전화 좀 맡아주시겠어요?”

 현지인 여성이 다가와 16번 좌석의 콘센트에 자신의 휴대전화를 연결하고는 의자 위에 자신의 전화를 올려놓았다.

 “네, 물론이죠.”

 별거 아닌 행동이었지만 자신의 물건을 그냥 두고 간다는 것에 잠시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케이프타운에서 철창을 쳐놓고 장사하는 상가들을 매일같이 봐 왔단 말이다. 버스라는 한정된 공간이어서 용의자를 추릴 수 있다고는 하지만 내가 한눈파는 사이에 누군가 가져가면, 혹은 내가 챙긴 채 모르는 척하면 범인을 찾기는 꽤나 어려울 것이다. 한국에서야 처음 보는 옆 사람에게 잠시 봐달라고 할 수 있다지만 외국에 나와서 실제로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다분히 편견에 찬 생각이지만 외국인이기에 믿고 맡기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 하지만 이 편견은 화장실이나 기타 문제로 자리를 비우거나 다른 이유가 있어서 부탁을 하고 흔쾌히 사람들이 들어주는 것을 보며 곧 깨졌다. 이 공간에는 묘한 유대의식이 느껴졌는데, 처음 국경을 넘는 버스에 타 있어서 실감을 못 했지만, 이 사람들은 모두 지금 외국에 가고 있으며, 외국에 나갈 경제적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애초에 이 버스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은 휴대전화를 훔칠 수준의 사람들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케이프반도 투어와 캠스 베이, 스텔렌보스, 그리고 컨스텐시아의 포도주 양조장에서 보아왔던 경제적 상위 계층은 대부분 백인이었으나 이 버스에 탄 사람의 반은 흑인이었다. 모든 자본주의 국가에는 경제적 신분이 존재하며 이곳, 남아프리카 공화국에는 그와 더불어 표면으로 확실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인종적 신분이 존재했다. 이 버스에서는 인종적 신분의 경계가 옅었으며 그것은 나에게 조금의 위안을 주었다. 하지만 버스 바깥세상과 이 안에는 또한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버스는 1시간 만에 햄버거 체인점인 윔피와 KFC가 있는 곳에서 정차했다. 버스는 15분 정차하며 그 안에 점심 식사를 해결해야 했다. KFC에 가고 싶었으나 줄이 매우 길어서 어쩔 수 없이 윔피에서 ‘빅 딜 버거’를 시켰다. 시간이 생각보다 오래 걸려 조급한 마음에 음식을 받자마자 버스에 올랐는데 마지막에서 세 번째였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어디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온 걸까.

 점심을 먹은 뒤 버스에서 할 게 없기에 휴대전화에 넣어 놓은 환상 소설을 읽었다. 다행히도 내 스마트폰에는 아직 읽지 않은 수십 권의 책과 첫 화부터 끝 화까지의 드라마 한 시리즈가 들어있었다. 물론 ‘휴일 백패커스’에서 준비해 온 것들이다. 책을 읽는 동안 내 옆자리는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이제는 휴대전화를 맡기고 의자에 올려놓은 채 자신의 자리에 가 있는 게 아니라 그냥 내 옆에 앉아서 스마트폰을 유유히 충전하며 인터넷을 하고는 적당히 충전되면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여기에서 좀 쉬고 갈게요.”

 기사 아저씨가 크게 소리치고는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이 거대한 2층 버스에는 기사 아저씨가 두 명이었다. 둘 다 배가 매우 나온 백인이었는데 얼핏 쌍둥이처럼 보였다. 짐작으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한 명이 운전하고 나미비아에서 다른 한 명이 운전하는 것 같았다.

 밖에는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우리 차가 서있는 곳은 호숫가의 작은 구멍가게 옆의 주차장이었다. 탄산음료 생각이 간절했으나 현금이 없어서 남은 동전을 탈탈 털어 4랜드 90센트의 작은 물 한 병을 샀다. 5랜드를 냈는데 10센트는 거슬러 주지 않았다. 10센트로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동전은 모이면 짐이기 때문에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갔다. 이것으로 남아프리카 공화국 화폐는 수중에 단 한 푼도 남지 않게 되었다. 정말 완벽한 백수건달이 된 기분이다.


 드라마 한 편을 보고 환상소설 한 권을 읽었는데 주변 풍경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냥 계속 초록, 초록, 그리고 초록이었다.

 잠을 자다가 깨니 스프링복이라는 도시에 들어서고 있었다. 배는 매우 고파오고 밖에는 도시가 펼쳐져 있으니 저녁 식사를 기대하게 되었다. 드디어 버스가 정차했다. 말 그대로 정차였다. 버스는 승객을 한 명 더 태우고는 도시를 빠져나갔다.

 젠장, 망했다.

 이 북쪽으로는 한동안 도시가 없다. 그리고 내 손에는 현금이 없다. 또한 도시를 벗어난 곳에 위치한 구멍가게에는 카드 리더기가 없다. 그 말은 오늘 저녁을 굶어야 한다는 말이었다.


 반경 백 킬로미터 이내에 어떠한 불빛도 없는 것처럼 완벽한 암흑으로 둘러싸인 평지에 구멍가게와 부서져가는 주유소 하나가 난데없이 등장했다. 버스에서 터벅터벅 내렸다가 구멍가게를 휙 둘러보고 다시 터벅터벅 불 꺼진 버스에 올라 털썩 앉았다. 호주에서 출국할 때 ‘리코라이스’라고 적혀있는 봉지를 하나 사 와서 마침 생각이 나 열었는데 냄새가 역했다. 아주 살짝 한 입을 먹고는 구토를 할 뻔했다. 그제야 뜻을 찾아보니 감초라는 뜻이었다. 감초를 넣어 만든 사탕과자였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윔피의 계산대에서 집어 왔던 사탕 두 알과 비상식량으로 가지고 다니는 견과류로 겨우 입가심을 했다.


 국경에 도착한 시각은 밤 9시 반이었다. 모두 버스에서 내린 뒤 남아프리카 공화국 국경에서 여권에 출국 도장을 받았다. 국경을 지키던 사람은 버스에 실려 있던 짐 중 몇 개를 대충 골라서 짐 주인을 불러 간단하게 검사를 한 뒤 우리 버스를 통과시켰다.

 이번에는 나미비아의 국경에서 입국 신청서를 작성하고 심사대에 섰다. 내 앞의 앞에 서 있던 백인 아저씨가 캐나다 여권을 건넸다.

 “직업이 어떻게 되시나요?”

 질문은 그것 하나였다. 캐나다 아저씨가 대답하자 바로 통과시켰다. 내 바로 앞에 서 있던 사람은 아까 출발 직전에 잠시 보았던 동양인이었다. 그의 여권은 일본 여권이었다.

 “일본에서 왔어? 뭐 하다 왔어?”

 아까에 비해 말이 상당히 공손하지 않았다. 어투도 마찬가지였다. 아까는 고객 응대의 어감이었다면 이번에는 심문 및 취조의 어감이었다. 일본인이 대답하자 이번에는 “뭐 하러 왔어?”라고 물었다.

 곧 내 차례가 왔다. 마찬가지였다.

 “한국?”

 “응.”

 여권에 적혀 있잖니. 젊은 친구. 반말 어감을 들으니 반응도 반말 어감으로 하게 되었다.

 “뭐 하러 왔어?”

 “너네 나라 사막도 보고 액티비티도 하려고.”

 “아니, 여기. 오기. 전에. 뭐. 하다가. 왔냐고.”

 그는 큰 소리로 꾹꾹 눌러 말했다. 이상하다. 내가 질문을 잘못 들었나. 분명 과거형이었던 것 같은데.

 “학생이었어. 대학생.”

 그는 이상하게 눈을 흘기고는 여권에 입국 도장을 쾅 찍었다. 찜찜했지만 내가 잘못 들은 것 같기도 했다.


 “안녕하세요. 혼자 여행하세요?”

 드디어 정체를 알아낸 일본인은 혼자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사람들이 모두 나왔는데 조금 지체되고 있었다.

 “응, 혼자 여행하고 있어.”

 그는 초면부터 반말이었다. 지금은 입국장에서와 다르게 반말과 존댓말이 명백했는데, 일본어로 대화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어는 존댓말이 명확하다.

 “나미비아에서는 뭐 하려고요?”

 “사막을 보고 싶어서. 일본에는 제대로 된 사막이 없잖아?”

 음, 어투로 보아하니 나를 일본인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네, 한국에도 사막은 없죠.”

 그는 그제야 제대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멀대 같지는 않았으나 키가 큰 편이었다. 나이는 이십 대 후반에서 삼십 대 초반 사이로 보였으며 얼굴은 전체적으로 까무잡잡했고 머리는 짧았다. 약간 스포츠 계열의 사람으로 보이기도 했다.

 “일본에서 무슨 일 하다가 오셨어요?”

 “자동차 고치는 일 하다 왔어.”

 “어디에서요?”

 “미에 현에서.”

 어디인지 모르겠다. 궁금한 표정을 지었으나 뒤따라오는 설명은 없었다. 우리는 잠시 말없이 서 있었다. 출발할 때가 되었는지 사람들이 하나둘씩 짐을 들고 버스로 향했다.

 “그럼 즐거운 여행 하세요.”

 “응, 그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놈의 감초 때문에 내내 비몽사몽이었다. 나미비아 시간으로 5시쯤 깨어 휴대전화를 충전하려다가 충전이 안 되어 그냥 놔두고는 다시 8시 반쯤 깨어 소설을 읽었다. 9월 3일의 나미비아 시간은 남아프리카 공화국 시간보다 1시간 늦었다. 한국 시간보다는 8시간이 늦었다. 바깥은 언제부턴가 녹색이 아닌 갈색의 식물들이 뒤덮고 있었다.

 9시 반에 빈트후크에 도착하여 버스에서 내린 뒤 배낭을 걸치고 발 닿는 대로 걸었다. 숙소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없는 상태였다. 눈에 띄는 ATM에서 돈을 찾은 뒤 걷다가 보인 샾라이트에서 버터 우유를 사서 한 모금을 마셨다.

 아무래도 썩은 게 분명하다.

 혹시나 싶어 한 모금을 더 마신 뒤 버리고는 KFC에 들어갔다.

 “주문하시겠어요?”

 “징거 밀 하나요.”

 햄버거와 감자튀김, 음료를 합해 한국에서는 보통 ‘세트’로 표현하지만 식사를 의미하는 ‘밀’이 더 널리 통용되는 말이었다. 징거 버거 세트가 올라간 쟁반을 들고 창가의 자리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옆자리에는 두 아저씨 치킨을 먹고 있었는데 정장을 정갈하게 차려입고 검은 서류가방을 하나씩 가지고 있었다. 저녁식사를 못 한 한을 풀기 위해 버거를 입에 신나게 집어넣다가 그들과 눈이 마주쳤다.

 “좋은 아침입니다.”

 “좋은 아침이네요.”

 마침 잘 되었다. 그들에게 숙소 위치를 물어봐야겠다.

 “혹시 이 근처에 게스트하우스나 호스텔 있나요?”

 둘 중 한 명이 손가락으로 바깥을 가리키며 휘휘 저었다.

 “여기 큰길 따라서 가다가 저쪽으로 돌아가면 여행자 숙소가 있는데요. 음, 혹시 차 있어요?”

 “아니요. 없어요.”

 아저씨는 손에 묻은 치킨 기름을 쪽쪽 빨았다.

 “그러면 같이 가죠. 우리 이거 다 먹고.”

 그는 마지막 치킨 조각을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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