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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무형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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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민 Jan 29. 2017

#3. 남쪽을 향해 달리는 차 (5)

2014.09.07. 나미비아

 마치 불길에 휩싸인 것처럼 새빨간 산들이 대지를 꾸미고 있었다. 짙은 녹색의 너른 초원 위를 회색빛 차 한 대가 달리고 있었으며, 차 안은 꽤나 적막했다. 이른 출발에 지친 일행들은 쪽잠을 청했다.

 차 뒤편으로 해가 떠올랐다. 낮은 계곡 위로 떠오른 태양은 꽤나 눈부셨다.

 유키 형이 운전하는 차는 부드럽고 편안하게 초원 위를 누볐으며, 오래 지나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화이트 레이디에 들어가기 위한 비용은 사람 한 명당 50 나미비아 달러, 차 한 대당 20 나미비아 달러이다. 독특하게도 요금은 후불이라고 했는데, 가이드와 함께 내부 구경을 한 뒤 팁을 얹혀서 받기 위한 이유인 것 같았다.

 가이드를 따라 황토색 산들 사이의 계곡을 걸었다. 사람 키 정도의 풀들이 우거져 있었고, 그 사이에 난 모랫길로 여섯 명의 사람이 걸어갔다.

 “이 나무는 약이랑 차로 이용을 합니다.”

 “이 식물의 잎을 갈아서 피부에 바르면 벌레가 안 달라붙어요.”

 “보시다시피 이 나무는 매우 곧고 길어서 집의 울타리 등을 만들 때 사용합니다.”

 “보세요! 원숭이 머리를 닮은 바위죠?”

 가이드는 가는 걸음걸음마다 보이는 것들을 설명했다. 짧지 않은 시간을 걸어 곧 벽화가 있는 바위 동굴에 도착했다.

 “보시는 벽화는 3,000년 전에서 6,000년 전까지 다양한 나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래되었고, 귀중한 문화재이죠.”

 바위 위에는 가축들과 가축을 사냥하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그려져 있었다. 하나의 색으로 그린 것이 아닌 것이 놀라웠다. 모두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대개 동물의 몸통은 갈색이었으며, 머리와 귀, 배, 다리는 흰색이었다. 사람 역시 붉은색과 갈색으로 그려져 있었으나 옷이나 장신구 중에 흰색으로 그려진 것이 있었다. 마치 얼룩말을 표현한 것처럼 흰색과 붉은색의 줄무늬로 온 몸이 뒤덮인 동물도 있었다.

 “이 그림을 보세요.”

 가이드가 가리킨 곳을 보니 다른 그림들에 비해 꽤나 크게 표현된 사람 그림이 보였다.

 “여기 부시맨이 춤을 추고 있고 가운데에는 불이 피워져 있죠? 불 옆을 도는 사람을 보면 아래에 흰 치마를 입은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화이트 레이디죠.”

 종교의식을 표현한 그림인지, 축제를 표현한 그림인지. 당시 사람들이 어떤 의미로 그림을 그렸을지는 알 수 없으나 오래된 인공물을 보는 것은 묘한 신비감을 제공한다. 짧은 시간 동안 벽화를 감상하고 다음 장소로 옮기려는데 가이드가 입을 열었다.

 “여기가 끝입니다.”

 “끝이라고요?”

 삼십 분이 넘는 거리를 걸어 겨우 벽화 두 개를 봤을 뿐이다. 끝이라니.

 “사실 좀 더 있기는 한데, 안쪽이어서 들어가려면 돈을 더 내야 해요.”

 허탈해서 웃음이 났다.

 “얼만데요?”

 “150 나미비아 달러요.”

 세 명분의 입장료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는 게 이렇게 적용할 수도 있는 말이군.

 “100으로 하죠, 너무 비싼데.”

 그는 한번 정도 튕기고는 결국 100으로 합의를 했다. 눈 뜨고 코 베이는 기분이다.

 이후 세 군데를 더 들렀는데, 먼저 봤던 그림들에 비해 훨씬 다채로웠다. 기린을 표현한 그림, 뱀이 등장하는 그림, 사람들이 줄을 서서 어딘가로 향하는 그림 등 다양한 모습들이 담겨 있었다.


 트위펠폰테인까지는 45분이 걸렸다. 입장료는 사람당 80 나미비아 달러, 차는 20 나미비아 달러였다. 내부에는 쉼터가 있어서 탄산음료를 마시면서 잠시 앉아서 쉬었다.

 가이드를 따라 들어간 트위펠폰테인에는 검붉은 암석들이 가득했다. 암각화가 있는 바위까지 가는 길은 꽤나 멀어 치에미 누나와 일본 지역의 캐릭터들이나 각 지역별 음식으로 하는 전국대회, 달콤한 디저트로 경쟁하는 대회가 있다는 것 등 일본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때웠다.

 “여러분 앞에 보이는 게 암각화입니다. 지도를 표현한 그림이죠.”

 전에 사람이 살았다는 말라버린 집과 바위에 음각으로 패어진, 동그라미 안에 점이 찍혀있는 모양의 우물을 나타내는 표시가 보였다. 안에 점이 없고 조금 더 작은 동그라미도 보였는데 이는 우기에만 우물이 되는 마른 우물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움직이면서 본 다른 암각화 대부분은 동물을 표현한 것이었다. 사냥을 할 수 있도록 다양한 동물들과 그 동물들의 발자국이 패어져 있었다. 또한 산 너머의 바다에 살고 있는 동물들도 새겨져 있었는데, 이곳에서 바다까지 꽤나 멀다는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놀라웠다. 화이트 레이디에 비해 훨씬 볼거리가 풍부했으며, 그림을 보며 기린이나 코뿔소 등 동물을 맞히는 재미도 쏠쏠했다.

 나오는 길에 쉼터에서 식사를 했다. 역시나 또 빵이었다. 빵은 별로였지만 어디에선가 족제비 한 마리가 나타나 주변을 얼씬거렸는데 그 모습은 꽤나 귀여웠다.

 몸이 노곤했다. 잠이란 게 이렇게나 중요한 것이다. 하룻밤 조금 어렵게 잤다고 하루가 참 피곤하게 느껴진다.


 “어디로 갈까요?”

 “일단 도시로 가자.”

 C39 대로를 따라 동쪽으로 향했다. 마차를 타고 다니는 모습이 신기했던 이름 모를 마을 하나를 지나 어느 정도 도시가 가까워지니 아스팔트 도로가 나타났다. 머지않아 트위펠폰테인 암각화 지대에서 동쪽으로 약 100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도시 ‘코리사스’에 닿았다.

 “혹시 여기 주유소가 어디 있는지 아시나요?”

 어제 주유를 했지만 오늘 이미 300 킬로미터 이상을 달렸고, 먼 길을 달릴 일이 많기 때문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주유를 하기로 했다. 길가의 한 아저씨에게 길을 물으니 그가 직접 자기 차를 타고 우리 차 앞에서 달리며 주유소까지 안내했다.

 친절한 아저씨를 따라 주유소에 도착하여 주유를 하고 있으니 다수의 사람들이 다가와 다짜고짜 이름을 묻는다. 그들은 이름을 새긴 열쇠고리를 파는 사람들이었다. 기린, 사자 등 각종 동물들이 새겨진 동그란 열쇠고리였는데, 이름을 말하면 의사도 묻지 않고 즉석으로, 또한 매우 빠른 속도로 열쇠고리에 멋대로 이름을 새겼다. ‘이미 새겨버려서 남에게 팔지도 못하는데 당신이 반드시 사야 한다’는 전략인 모양이다. 가격은 30 나미비아 달러에서 50 나미비아 달러 수준으로 그다지 비싸지 않았으나, 언제 끝이 날지 알 수 없는 여행에서 기념품 비슷한 것은 사지 않기로 이미 마음먹었다. 굳게 닫힌 나의 입은 끝내 열리지 않았고, 주유를 마친 우리의 차는 그 자리를 쏜살같이 빠져나왔다.


 ‘아웃조’는 작지만 상당히 활기가 넘치는 도시였다. 도로는 시원하게 뚫려있었고 건물들은 아기자기하면서도 현대적이었다. 도로변에 위치한 가로수들은 눈의 피로를 잠재워주었고, 선선한 바람은 노곤한 기분을 깨워주었다.

 잘 곳을 찾기 위해 도로를 누비면서 발견한 첫 번째 숙소는 도미토리가 없고 방값은 1인당 300 나미비아 달러 이상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발견하게 된 곳은 역시나 방값은 비쌌으나 텐트를 칠 수 있는 야영장이 있었으며, 이용비는 1인당 96 나미비아 달러였다.

 “우리는 장 보고 올게.”

 아저씨와 스즈키 형, 내가 차 트렁크에서 물건들을 내리고 야영장에 텐트들을 설치하는 동안 아주머니와 타카코 누나는 근처의 마트에 다녀오기로 했다.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백세 카레 분말을 가지고 있었는데, 거기에 넣을 재료인 감자와 양파, 그리고 오늘의 밤을 책임질 애플 사이다를 사러 가기 위해서였다.

 모든 저녁 식사 준비가 끝나고 나는 배낭에서 놀랍도록 가벼우며, 또한 완벽한 성능을 자랑하는 미니 버너를 꺼내 들었다. 케이프타운에서 사 온 가스를 연결한 뒤, 점화 버튼을 눌렀다.

 틱.

 “응?”

 틱. 틱. 틱.

 “뭐야, 이거 왜 안 돼?”

 몇 번을 시도해도 버너에 불이 붙지를 않았다.

 “이거 고장 났나 본데요?”

 겨우 어제 한 번, 저녁에 파스타를 만들기 위해 사용한 버너였다. 가스도 아직 충분히 남아있었다. 담배를 피우는 유키 형이 가지고 있던 라이터를 이용해서 불을 붙여보려고도 해보았으나 효과가 없었다.

 옆에서는 이미 감자와 당근을 썰고 있었다. 쌀도 씻어서 물에 불려 놓은 상태였다. 이러다가는 날 감자와 날 양파를 카레 가루에 찍어 먹게 될 판이었다. 안 돼, 그럴 수는 없지.

 “아, 여기 주방 있는지 물어보고 좀 써도 되나 물어볼까요?”

 “그거 괜찮은 방법이네. 물어보고 올래?”

 계산대에 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직원이 주방으로 가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는 흔쾌히 허락을 받아주었다. 우리는 곧장 5인분의 불린 쌀이 들어 있는 냄비와 5인분의 카레를 끓일 물이 담긴 냄비를 가지고 숙소의 주방으로 입성했다. 주방에서는 깔끔하게 흰 옷을 차려입은 요리사 몇 명이 식기를 정리하는 등 무언가 일을 하고 있었다.

 “이쪽의 가스레인지를 이용하면 돼요. 설거지는 저쪽 싱크대에서 하면 되고, 정리는 깔끔하게 부탁드릴게요.”

 주방에 있던 요리사들은 우리가 요리를 시작하자 유심히 살폈다. 아시아의 향기가 강하게 퍼지는 카레가 끓기 시작하자 그들은 알게 모르게 우리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한 입 드셔 보시겠어요?”

 옆에 다가온 요리사 한 명에게 숟가락으로 작게 썬 감자와 카레를 떠 주었다.

 “음, 괜찮네요.”

 그의 표정은 썩 나쁘지 않았다. 주변 요리사들이 떠나간 뒤 음식은 곧 완성되었고, 우리는 꽤나 무거워진 냄비를 낑낑대며 밖으로 가지고 나와 야영장의 잔디에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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