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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무형의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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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민 Feb 05. 2017

#3. 남쪽을 향해 달리는 차 (6)

2014.09.07.~09.08. 나미비아

 타카코 누나는 이미 10개월 이상 혼자 여행을 하고 있는 장기 여행자였다. 지금까지 여행을 계속하면서 천만 원을 조금 넘게 썼다고 한다. 지금은 여행의 마무리 단계에 있는 상태였다.

 유키 형은 일본에서 자동차 관련 직종에서 일했으며, 일반적인 회사원들의 생활도 잘 알고 있었다. 일본에서도 퇴근 카드를 찍고, 다시 사무실에 올라와 추가 근무를 한다거나 주말이나 명절에 추가 급료 없이도 일을 하는 회사 문화가 존재한다고 한다.

 재해에 관해서는, 일본은 지진이 너무나 많아 일상생활을 하다가 지진을 느껴도 그에 대한 역치가 높아져, 별 생각이나 위기의식이 크게 없다고 한다.

 저녁의 이야기는 그런 것 들이었다. 세상 사는 이야기. 너의 삶, 나의 삶, 우리의 삶, 그들의 삶, 세상 위에 서서 생활하는 수십억 인구들은 각자 저마다의 국가에서 저마다의 역할을 하며 세상을 움직이고 있다. 다섯 사람 모두 비행기로 겨우 1시간 30분 이내에 닿을 장소에 살고 있던 우리들은 각자의 집에서 1만 킬로미터가 이곳에 만나 저마다의 사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곳은 숙소의 로비뿐이었으므로 타카코 누나와 유키 형, 그리고 나는 각자 페이스북이나 인터넷 뉴스를 보기 위해 로비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혹시 그거 정말로 있어?”

 문제의 발단은 유키 형의 사소한 질문이었다.

 “어떤 거요?”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톤수르’라고 부르는 건데.”

 그의 말을 듣자 하니 한국에서 아이의 대변을 이용하여 술을 빚어 마시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 일본에 돌고 있다는 것이었다. ‘톤수르’는 ‘똥술’의 일본 발음이었다.

 “아니요. 태어나서 처음 듣는 말인데요? 혹시 일본 방송에서 나오는 말이에요?”

 “응. 한국에는 그걸 마시는 풍습이 존재한다는 소문이나, 그에 대해 언급했던 유명한 연예인이 있기도 하고 그러거든.”

 기분이 조금씩 나빠지고 있었으나 해결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머리를 식혔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문이에요. 아마 정말 옛날에는, 행여 민간요법으로 극소수의 누군가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 그런 소문이 돌고 있다는 건 조회 수나 시청률을 늘리기 위한 장난이거나 한국을 깎아내리려는 악의적인 미디어의 농간이겠죠.”

 “응, 분명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일본에서도 믿는 사람이 많지는 않겠지만 언급이 되고 있는 건 사실이어서 한국인에게 확실한 대답을 듣고 싶었어.”

 그 말을 듣고 생각을 해보니 나를 포함한 우리나라 사람도 다른 나라에 대한 어이없는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없을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외국, 특히나 중국과 일본에 대해서는 검증되지 않은 악의적인 편견을 가진 사람이 많으며 이유 없이, 혹은 확대해석을 통해 비방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존재한다. 그와의 대화를 통해 우리에 대해서든, 다른 나라에 대해서든 옳지 않은 편견을 고쳐가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왕 편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한국과 일본이 악감정을 가지게 된 계기에 해당하는 한일 문제에 대한 쟁점을 논의해 볼 필요를 느꼈다. 이틀 전에 스바코프문트에서의 한일 문제에 대한 대화 이후, 두 번째로 가지게 된 회담 아닌 회담이었다.

 “일본에서는 전반적으로 독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그는 곧바로 대답했다.

 “사실 독도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드물어. 최근에 독도에 대한 문제가 불거지면서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는 편이지만 그 섬에 대해 뚜렷한 주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 봐야겠지. 그냥 일본 정부에서 주장하는 내용이나 뉴스에 나오는 말들을 수용하거나 어디선가 듣거나 본 대로 기억하고 있을 뿐이야.”

 “그 내용을 알 수 있을까요?”

 그는 휴대전화로 온라인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의 일본 사이트에 접속하고는 검색창에 독도의 일본어식 명칭에 해당하는 ‘다케시마’를 입력했다. 그리고 화면을 나에게 보여주며 스크롤을 내렸다.

 “한국의 주장과 일본에 주장에 대한 내용이 이렇게 표 형식으로 정리되어 있어.”

 일본 위키피디아에 정리되어있는 독도에 대한 내용은 상당했다. ‘우산도는 현재의 독도인가?’라는 내용의 표에서 한국의 주장은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우산도’의 일부가 독도이며 따라서 512년부터 독도가 한국 땅이라는 것과 1785년 일본에서 발행된 ‘삼국통람여지노정전도’라는 그림에 울릉도와 그 부속의 독도가 그려져 있다는 내용을 포함한 여러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일본의 주장은 삼국사기의 ‘우산도’는 울릉도를 이야기한 것이며 독도는 포함되지 않았고, 일본의 ‘삼국통람여지노정전도’에서 울릉도 옆에 작고 긴 부속 섬이 있으나 섬의 크기와 모양, 위치 등이 독도와 다르다는 내용 등 한국의 주장에 하나하나 반박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그 밖에도 ‘메이지 정부가 독도를 시네마 현에 편입시킨 직후’나 ‘샌프란시스코 조약 체결에 대한 한일의 입장’이나 ‘국제법상의 주권’에 대한 표가 정리되어 있었으며 몇 군데는 일본의 주장에 대한 한국의 주장이 비어있었다.

 “이렇게 표의 한국 주장에 빈 곳도 많고, 여기 봐봐.”

 그는 ‘국제 법에 의한 평화 해결 모색’의 부분을 가리켰다. 일본 정부가 독도 영유권 문제에 대해 국제 사법 재판소에 1954년 9월, 1962년 3월, 1962년 11월, 2012년 8월, 총 네 차례 재판을 요구했으나 한국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여기에 대한 한국의 대답은 ‘이 분쟁을 국제 사법 재판소에 회부하는 것은 일본 정부 허위 주장을 위한 하나의 기획이며, 한국은 처음부터 독도에 대한 영토권을 가지고 있었고, 이 권리에 대한 확인을 국제 사법 재판소에 요구해야 할 이유 자체가 없으며, 분쟁거리도 되지 않을 문제를 계속 영토 분쟁으로 만드는 것이 일본이다.’라는 건데, 몇몇 일본 사람들은 이 의견이 객관성이 떨어진다고 받아들이고 있어. 떳떳하면 왜 재판을 하지 않느냐고 주장하는 거지.”

 “하지만 이런 문제는 일본에서도 이미 있었어요.”

 이와 비슷한 문제는 일본과 대만의 센카쿠열도/댜오위다오에 대해서도 존재한다. 센카쿠열도는 현재 일본이 실효 지배하고 있는 동중국해의 섬들로, 2010년 오카다 일본 외상은 센카쿠에 영토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발언을 하였으며, 대만에서 요구하는 국제 사법 재판소에서의 재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시 말해 일본 정부에서는 독도에 대해서 우리나라에 대해 국제 사법 재판소의 재판을 열자고 요구하고 있으나 센카쿠열도/댜오위다오에 대해서는 대만의 재판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이 오랜 이야기의 결착을 이 자리에서 두 명의 청년이 지을 수는 없는 문제였으나, 일본에서는 독도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처음 알게 된 순간이라는 것은 의미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독도가 당연히 우리 영토라고 이야기는 하지만, 적절한 근거를 들어 왜 우리의 영토인지 이야기하고 일본의 의견을 조목조목 반박할 수 있는 수준의 지식을 갖춘 사람을 찾는 것은 아직 그다지 쉬운 일만은 아니다. 어떠한 논쟁이나 분쟁에서는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이길 수 있다. 때문에 이 경험은 꽤나 값진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들이 알고 있는 우리의 주장에 빈칸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그것을 채울 수 있지 않겠는가. 빈칸의 존재 자체를 모르면 대응할 방법조차 없다. (2017년 2월 현재, 일본 위키피디아의 해당 빈칸들은 다 채워져 있다.)


 독도 문제 이후로는 식민 지배 및 야스쿠니 신사에 대한 문제가 언급되었다. 일본의 교육에 따르면 일본 정부가 식민 지배에 대해 수차례를 사과하였으나 한국에서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토 히로부미가 베트남 등 다른 점령지와 다르게 한국은 일본과 동등한 입장으로 보려 했던 사람이지만 안중근 의사의 거사로 인해 일이 틀어졌다는 등의 가르침이 있다고 한다. 또한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의 전쟁 영웅을 기리는 곳이 아니라 한국인을 포함한 전쟁의 희생자들의 영을 기리기 위한 참배소라고 배운다는 등의 이야기를 했다.

 “그건 우리가 아는 것과 많이 달라요.”

 나는 딱 잘라서 이야기했다.

 “우선 일본의 사과에 대해서는 1995년의 무라야마 담화를 포함하여 수차례가 있기는 했지만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배상 문제나 군 위안부 문제 등에 대한 언급은 없었고, 표면적인 내용일 뿐이에요. 일본 역사 교과서에 해당하는 사항이 정확히 실려서 국민들이 합당한 교육을 받거나, 실질적인 피해자에 대한 사과 수용 및 보상이 이루어지는 등의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죠. 또한 이토 히로부미는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통감 자리를 맡으면서 한국 국권을 침탈했어요. 비록 1909년에 죽었지만 결론적으로 그는 1910년에 한일합병을 체결되어 대한제국이 멸망하게 된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사람이죠. 야스쿠니 신사에 대해서도, 만일 피해자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다고 하면 A급 전범들은 왜 같은 곳에 안치되어 있는 거죠? 가해자와 피해자에 대한 참배를 같은 곳에서 하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한국인과 일본인이 상당히 민감한 한일 문제에 대해 언성을 높이지 않고,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이어가는 것에는 상당한 정신력이 소모된다. 지금을 살고 있는 일본인은 자신들도 그 선조들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으며,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이야기하지만, 그에 따른 짐을 자신들이 지고 가야 하는 것에 대해 기피하고자 하는 성향이 있다. 나라를 잃을 위기를 겪었으며, 현재도 그 희생자들이 우리 곁에 살아있는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일본의 의미 있는 사과와 실질적인 보상 및 해결, 올바른 역사 교과서를 통한 교육과 양국의 합의를 원한다. 계속된 대화를 통해 이해와 설득을 이루어가는 과정은 사람 간에도, 정부 간에도 반드시 필요한 발판일 것이다. 또한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국민 개개인의 올바른 관심과 뚜렷한 자세가 필요하다.


 옆에서 가만히 우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혹은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며 시간을 때우던 타카코 누나, 그리고 오랜 대화를 마친 유키 형과 나는 각자의 텐트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오늘의 대화를 돌아보니 아쉬운 점이 많았다. 더 역사와 외교 및 주변 사회에 관심을 가지고 살았더라면 더 나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일까. 아는 것도 많이 없는 상태로 섣부르게 대화를 풀어가려 했던 것 같아 미련이 더욱 깊었다. 오늘 밤에는 상당히 긴 숙고의 시간을 보내게 될 것 같다.
 

 “아우으으.”

 텐트에서 나와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었다. 오늘 아침은 꽤나 느긋하고 쾌적했다. 타카코 누나는 야영장 옆에 설치되어 있는 샤워장에서 나와 젖은 머리를 털고 있었다. 세면도구를 챙겨 씻고 나온 뒤, 텐트에서 짐을 빼고 꽤나 익숙한 솜씨로 텐트를 해체했다. 역시 어제 한 번이라도 해 본 것과 전혀 안 해 본 것과는 천지차이였다. 텐트는 금세 말끔히 정리되어 수납 주머니 안으로 쏙 들어갔다.

 텐트 정리를 마치고 꽤나 질려가고 있는 빵 쪼가리로 아침을 대강 해결한 뒤, 로비에 가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아빠.”

 “응, 아들. 어디야?”

 “여기 나미비아라는 나라예요. 지금 다섯 명이 모여서 렌터카로 같이 여행하고 있어.”

 아버지에게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경위를 간략하게 설명하고는 질문했다.

 “거기는 지금 다 와 있어요?”

 “여기 할머니 집에 지금 작은 아빠네 가족이랑 다 와 있지. 할머니 바꿔줄게.”

 곧 전화기 너머로 할머니 목소리가 들렸다.

 “어, 아가. 밥은 잘 먹고 다녀? 몸 조심히 잘 다녀야 돼.”

 말 몇 마디를 나눈 뒤, 할머니는 곧 어머니에게 전화를 넘겼다. 주변에서는 친척 동생들의 말소리가 두런두런 섞여 들렸다.

 “응, 성민아, 지금 뭐 하고 있어?”

 “좀 전에 일어나서 씻고, 밥 먹고, 이제 곧 나갈 준비 하고 있어요.”

 “그래, 재미있게 다니고 있어?”

 “응, 재미있게 잘 다니고 있어요. 사람들도 다 좋고, 재미있어. 한국에서 온 분들이랑 일본 사람들이랑 같이 다니는데 말이야.”

 어머니와 통화를 나누니 수다가 붙어 이야기가 길어졌다. 이후 친척 동생들, 작은어머니, 큰아버지, 작은아버지와 전화를 계속 이어나갔다.

 가족, 친척들과 전화로 이야기하면서, 할머니와 어머니가 나누는 대화, 동생들끼리 하는 이야기 등 계속해서 끊임없이 이어지는 밝고 명랑한 주변의 목소리들로 인해 활기찬 기운이 전해졌다. 이윽고 통화를 마치고 전화를 내려놓은 내 얼굴의 입가에도 잔잔한 미소가 머물렀다.

 2014년 9월 8일 월요일, 오늘은 한국의 추석이자, 태어난 이후 외국에서 맞는 첫 번째 명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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