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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활여행자 Sep 27. 2016

아쿠아리움 그리고 개구리

포르투갈 20일의 기록 2


포르투갈 도착 3일째. 36도의 더위에 적응할 수 없던 우리가 생각한 대책은 세계에서 제일 큰 규모를 자랑한다던 리스본 아쿠아리움이었다. (동행인이 전해준 이 정보도 실은 사실이 아닌 걸로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모든 종의 예쁘장한 바다 생물들을 모아놓은 예사로운 아쿠아리움 하고는 거리가 멀다. 리스본의 아쿠아리움 Oceanário 에 대한 한 줄 평은 '솔직한 아쿠아리움'이다. 예쁜 종의 모든 바다 생물들을 모아둔 것이 아니라 태평양, 대서양, 북극해 등 지역별 바다를 말 그대로 뜯어와서 그 지역의 생물들로 채워놓은 듯했다. 부산 아쿠아리움에서 상괭이를 보고 귀여움에 어찌할 줄 몰랐다면 이곳에서는 내가 자주 먹는 참치나 연어가 이렇게 생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왜곡된 유리창에 가까이 붙어 구경꾼들을 되려 구경하고 있는 듯한 물고기 떼. 뚫어져라 쳐다보는 물고기를 보고 있자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진다. 누가 누구를 보고 있는지 - 우리가 물고기를, 아니면 물고기가 우리를 - 알 수 없는 채로. 





인생이라는 것을 논하기 시작하자면 쑥스럽고 우습기도 하지만, 그래도 내 딴에는 모질기도 했고 기쁘기도 또 무섭기도 했던 지난 26년이 나의 지금을 얼마나 크게 형성하고 있는지 문득 발견하게 되는 순간마다 이 두 자가 적어도 나에게 무슨 의미인지 되새겨보는 것이다. 그리고 서둘러 말하자면 아직 내 인생은 개구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1998년 엄마 손을 잡고 기억도 나지 않는 먼 길을 떠나서 코엑스 아쿠아리움에 갔다. 그렇게 인생에서 처음으로 아쿠아리움이라는 곳을 갔다. 조잡한 풀들 사이, 게슴츠레한 조명 아래에서 아마도 생명이 빠르게 단축되고 있었을 개구리. 배를 보이며 유리창에 딱 붙어 도시 한복판 높은 빌딩 한 유리관에 갇힐 운명을 지워준 그 노란색의 피부는 빛나고 있었겠지. 유리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무서움에 시선을 금방 피해버렸던 순간은, 금방이라도 손에 닿을 듯이 선명한 기억이다. 빨간색, 노란색으로 물든 알 수 없는 액체로 만들어진, 지금이야 어떻게 버렸는지도 알 수 없는 머리띠와 팔찌를 끼고 이가 빠진 얼굴로 웃어 보이던 사진 속의 정말 작은 나와 동생 외에 뚜렷하게 기억나는 그 날의 기억이란 이 두려움이다.


여섯 살, 부모님의 지인네 가족들과 계곡으로 놀러 갔을 때, 한 살 연상의 소위 말하는 '동네 아는 언니'는 그의 몸집만 한 바위를 들어 올려 보였고 몇 마리의 까만 개구리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처음이었을까, 평생 지겹게도 따라붙은 불호가 뜨뜻미지근하게 머리를 든 것이. 열두 살, 화장실 청소를 하려고 변기 뚜껑을 열었을 때, 북동쪽에 가만히 앉아있던 청개구리를 마주한다. 소리를 지르며 헐레벌떡 뛰쳐나와 집에서까지 온몸과 가방의 모든 면을 샅샅이 털고도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개구리의 형상에 소름이 끼쳤다. 열 세 살, 뒷 산 계곡으로 소풍 가기 전 날 제발 개구리와 마주하지 않을 수 있기를, 혹은 내일 아침이면 감기 몸살이 나서 소풍을 아예 갈 수 없기를 바랐다. 열다섯 살, 여느 해와 같이 새 학기가 시작하고 받는 책 더미 속에서 과학 책부터 집어 들고 실눈으로 한 장 한 장을 넘기며 개구리 사진을 찾는다. 풀을 꼼꼼히 바른 종이를 붙여 한 학기 동안 놀랄 일이 없도록 했다. 열여섯 살, 집 안에 어떤 생명체의 기운을 느껴 불안함이 엄습해오던 차 문틈에서 기어 다니던 손바닥만 한 청개구리를 발견한다. 방으로 서둘러 도망친 사이에 살아있는 채로 그를 목구멍으로 넘겼다는 할머니의 이야기는 동생의 목격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믿고 싶지 않다. 


세상에 어떤 생명도 이 정도로 온 힘을 다해 싫어하고 미워하고 사라지기를 바라본 적이 없다. 정말 이 정도면 되려 애증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적당히 좋아하는 어떤 무엇보다도 자주 생각하고 그 생각은 오래도 간다. 감정이라는 것은 실존하지 않고 머릿속에 있으니 그냥 잊으면 될 것을, 그냥 극복하면 될 것을. 자신을 미워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생명체에 관한 두려움은 비단 단순한 불호에 지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간다. 가장 감성이 예민하고 깨지기 쉬운 때에 나는 개구리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여름이면 방문 밖으로 발도 뗄 수 없었고 학교를 제외하고는 거의 칩거하듯이 집 안에서만 지냈다. 나의 행복하지 않았던 유년시절과 개구리에 대한 두려움은 한 데 엉켜, 거미줄에 겹겹이 쌓이고 바람과 시간에 딱딱해져 이제는 원래의 형태도 알아볼 수 없이 가장 어두운 곳에 숨겨져 있다. 한 번 머릿속에서 등장하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찰나에 나의 모든 신경이 곤두서고 두려움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이번에도 양서류 전시관은 들어갈 수 없었다. 개구리에 대한 스트레스를 어느 때보다도 많이 받았던 날들에 나는 막연하게 어른이 되면 이 두려움은 극복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스물일곱을 향해가는 지금의 나는 시간이 더 지나면, 부모가 되면, 어떤 두려움도 이겨낼 수 있는 것 아닐까, 헛된 바람을 한다. 싸우지 않으면 안 될 두려움이라는 것이 어른에게도 있다는 것을, 어떤 것도 '그냥' 혹은 '자연히' 얻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직면하기를 미루어버렸다. 내일의, 또 10년 뒤의 나에게. 


마음 한편에 스며드는 두려움 없이 아쿠아리움을 방문할 수 있는 날이 올까. 자연히 사라지는 문제란 없지만, 그리고 어른이라고 싸움이 쉬워지리란 법은 없지만, 적어도 나는 선명하게 두려움을 인지할 수 있을 만큼은 자랐다(고 믿고 싶다). 나는 요즘 개구리 사진들로 만들어진 달력을 보면서 나름대로 두려움과의 싸움을 진행 중이다. (매월 달력을 넘기며 제각각 다른 모양새의 개구리에 익숙해지기란 말 그대로 고통이다.) 가장 어두운 곳까지 아직은 닿지 않았지만, 조금씩 나는 거미줄의 먼지를 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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