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의 매일 : 밴즐라우이-알프스 (Bänzlaui-al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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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어렸을 때 동네의 높지 않은 산으로 등산을 갔던 날 헉헉거리는 내게 엄마는 말했다. 정상을 보지 말고 아래를 보고 걸으라고. 정상을 보면 더 힘이 드니까 땅만 보고 걸으라고. 엄마의 조언으로 나는 땅만을 보고 걸었고 600m 정도의 낮은 산의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사실 그 날의 기억이란 정상에서 느꼈던 뿌듯함보다도 엄마의 조언을 가슴에 품고 땅을 죽일 듯이 째려보며 버텼던 지겹고 끝이 나지 않는 등반에 대한 것뿐이다.
7살짜리 어린이를 억지로 등반시키는 데는 이만한 방법이 없었을 것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을 수 없으나 나는 이 조언을 너무도 진지하게, 오랫동안 받아들였던 것 같다. 정상이라는 목적을 위해서 등산을 할 뿐이었다. 자격증을 따기 위해서 외국어를 공부했고, 이력서에 한 줄 남기기 위해서 자원봉사를 했다. 정상을 보지 말라는 엄마의 조언대로 목적을 더 이상 보지 않기 시작했을 때에는 버텨내는 과정일 뿐인 등반만이 남았다. 서울에 남아 있기 위해서, 번듯한 직장을 갖기 위해서, 제대로 된 이 사회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 묵묵히 걸었다. 왜인지 무엇을 위한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언젠가부터 자취를 감추어버린 채로.
땅만 보고 말없이 걷는 내게 그는 말했다. 좀 둘러보라고. 위도 보고 아래도 보고, 얼마나 아름다운지 한 번 살펴보라고. 올려다본 숲에는 몇십 년, 몇 백 년이고 제자리를 지켰을 나무들이 있었다. 이끼가 끼고 하얗게 변해버린 나무부터 흙과 함께 단단하게 땅을 다지는데 제 몸을 바친 나무, 여느 사람의 손에 밑동이 잘렸을 체목까지. 오르는 길에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즐기지 않는다면 등정의 이유가 무엇이겠냐고 묻는 그에게서 몸에 밴 오랜 습관 대신 여유를 흉내 내보려 애썼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등산을 취미로 둔 사람들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던 내가 '알프스' 산맥을 오른다는 착상에서부터 오류가 있었던 것이라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지만, 2,300m 구간에 있었던 호수까지는 그럭저럭 어렵지 않게 올랐다. 적당한 장소에 텐트를 설치한 이후에 여유롭게 호숫가를 거닐고 자연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고요하게 저녁을 먹기만을 고대했던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정상 주변에서는 비바람과 추위가 몰아치고 있었다. 우리는 상상했던 대자연 한가운데서의 낭만적인 저녁을 보내는 대신 내내 콧물을 흘리며 텐트에 피신해 있었고 집에 두고 온 패딩에 대한 생각만이 간절해졌다. 우리는 그렇게 밤새 벌벌 떨면서 구름의 한 복판에서 로맨틱과는 동떨어진 하룻밤을 보냈다.
이튿날 우리는 채비를 마치고, 다시 여정을 이어나갔다. 2,530m의 정상에 이르기 위해서는 호수에서부터 가파른 돌산을 올라야 했다. 하이킹보다 암벽등반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합할 마지막 구간을 반쯤 지났을 때였을까, 마지막 고개에서 그때 우연히 만나 합류하게 된 여행자와의 논의 끝에 우리는 안전상의 이유로 정상에 오르기를 포기하기로 했다. 발을 디디면 계속 무너져 내리는 돌더미와 수직에 가까운 산을 오르기란 제대로 된 장비가 없이는 무리였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산 정상에 오르는 데 실패했다.
실패, 포기라는 말들이 좌절을 가져다주는 대신에 이다지도 벅차오르고 다음을 기약하는 희망의 말이었는지, 두려워서 피하기만 했던 나는 몰랐다. 나는 정상에 오르지 못한 이 유일한 등반이 내게는 잊지 못할 최고의 등반으로 기억되리라는 것을 안다. 물론 이 한 번의 등반으로부터 과정을 버티고 견디는 대신 즐기는 여유를 갑자기 배웠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다만, 매일, 매달, 매해 동안 변화에 대한 의지를 잃지 않는다면 가랑비에 옷 젖듯 변해있는 나를 돌아볼 수 있지 않을까, 희망을 가져볼 뿐이다. 그렇게 그의 생일에 오른 밴즐라우이-알프스(Bänzlaui-alps)로부터 나는 더 큰 선물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