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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활여행자 Feb 28. 2024

타이 왕국에서 숨쉬기 운동

태국 두 달 살기

이 시리즈는 안식년 중 여행을 하면서, 비체육인으로서 살았던 과거를 청산하고 내 몸과의 새로운 관계를 쌓아 올리게 된 성장 이야기이다. 



열네 살의 일이다. 학교 도서관에서 나는 틱낫한 스님의 “화”라는 책을 우연히 집어 들었다. 우주가 그 순간에 그 책을 내게 가져다준 건, 내 삶을 바꾸는 기적이었다-라고 쓰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스님이 전해준 화를 안 내는 비법을 실천하려는 나의 노력은 겨우 한 달 정도 지속했고 (작심삼일에 그치고 마는 다른 무수한 것을 생각해 보면 그리 나쁜 기록은 아니었던) 이후엔 다시 빠르게 비관주의의 수렁에 빠져버렸다.


그로부터 십수 년이 지난 2023년. 안식년의 시작은 태국이었다. 코로나 동안 만나지 못했던 가족들과 상봉하고 여행하는 시간을 보낸 뒤, 우리는 코파얌이라는 태국의 작은 섬을 찾게 되었다. 코- 로 시작하는 야단법석한 유명한 섬들과 다르게 코파얌은 한적하고 특별해서 우리 커플이 좋아할 것이라, 스위스에서 만난 태국 출신의 친구가 전했다. 나의 취향에 대한 그녀의 이해를 믿어보며 우리는 고민할 것 없이 코파얌으로 떠났다.


방콕에서 라농으로 가는 야간 버스를 타고 배로 갈아타야 닿았던 섬 코파얌


주변이 '아무것도 없음'으로 넘쳐흐르게 되자 가족들과 함께 있을 때는 바빠서 의식도 하지 못했던 감정들과 생각들이 자리를 비집고 수면 위로 올라왔다. 3년에 가까운 기간 월말마다 꼬박꼬박 통장에 찍히던 숫자를 이제는 기다릴 수 없는 처지가 되자 그 규칙과 루틴이 없어지게 된 생활에 나는 ‘자유로움’ 대신 ‘불안정함’이라는 이름을 붙여 버렸다. 무(無)와 공(空)으로 가득 찬 많은 순간 나는 불안했고 초조했으며 괴로워했다.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 따뜻하고 온화한 기후. 값싸고 맛난 음식들. 너무 아름답고 완벽한 환경 속에서 나는 되려 숨이 막혔다. 별것 아닌 작은 일로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떠올랐고 고질적인 내 마음의 질병과 마주하는 날들이 많아졌다.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으며 우리는 함께 지상 낙원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떨어져 버렸다. 


너무 아름다워서 더욱 대비되었던 괴로운 마음의 날들


곤두박질쳤기에 다시 날아오르는 법을 배워야 했다. 남편은 내게 때마침 코파얌에서 멀지 않은 수랏타니라는 지방에서 침묵 명상 리트릿이 매달 열린다며 소개해 줬다. 이것이야말로 우주가 내게 가져다주는 기적이었다. 


침묵 명상 리트릿은 말 그대로 묵언으로 10일간 명상 수행을 하며 간간이 불교와 달마(Dharma)에 대해서 배울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내가 참여한 수완목이라는 절은 외국인 방문객을 위해서 마련한 사원으로 매월 1일부터 10일간 명상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곳이었다. 운영은 자율 기부제로 이루어지며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10일간은 이름 그대로 묵언이라는 규칙을 지켜야 하고, 기상부터 취침까지 끊임없이 명상을 수련하는 초보자에게 쉽지는 않은 프로그램이었다. 침대는 콘크리트로 만들어졌고 (그냥 높이 위치했을 뿐 바닥과 다르지 않았다) 끼니는 하루에 아침과 점심 두 끼가 제공되며, 온전히 채식으로만 이루어졌다. 이 기간에는 인터넷에 접속할 수 없으며 핸드폰, 노트북을 포함한 전자기기도 소지가 금지되었다.


리트릿에 참여하기 전 디저트까지 곁들여 먹은 마지막 만찬


코로나 이후로 닫혀있던 사원의 문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라 그런지 내가 방문한 그날, 역대 최대 등록 인원이 모였다고 자원봉사자는 전했다. 많은 사람으로 북적이는 부산한 홀에 도착했는데 그곳은 장례식장에서나 볼 수 있는, 슬픔에 잠긴 표정과 거의 강요된 듯한 평온함이 만연했다. 피로, 지친 기운, 무력감 - 수행하는 사람들이라 진지해서 그런 건가? 내가 제대로 찾아온 게 맞나? 많은 물음 가운데 몇 가지 양식에 서명하고 소지품을 제출했다. 감옥의 독실과 다를 곳 없는 방을 배치받고 모기장, 침구(라고 하기엔 대나무 매트와 이불로 쓰일 천 쪼가리뿐)를 받아서 10일간 다리를 뻗을 자리를 스스로 마련했다.


침묵이 시작되기 전 마지막 한 시간. 오늘 최후의 만찬은 사치스럽게도 핫 초콜릿이다. 아마도 우유는 한 방울도 섞이지 않았을 싸구려 자판기 스타일의 코코아 음료. 이때까지만 해도 선택의 여지없이 하루에 두 끼만 먹고, 저녁 식사 대신 따뜻한 음료를 마신다는 것은 가능한 일처럼 들렸다. 적어도 아직 그렇게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참가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서로에 대해서 소개하는 와중에 10일간 이어질 침묵의 시간이 시작되는 종이 울린다. 왁자지껄하던 시장의 인파가 한순간에 빠져나간 것처럼 갑자기 시작된 고요는 어색하기만 하다. 앞으로 다가올 일에 대해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된 것만 같다. 수다스러운 생각이 낄 틈도 없이 나는 어둠과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10일 묵언 명상 리트릿의 영상 일기가 궁금하시다면 >>>

https://youtu.be/BxoL6fKqULI?si=fKLpzuLKNv0YH8me


PC: https://www.instagram.com/michael_f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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