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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naland Feb 19. 2024

인생 첫 혼여: 묵호 2박 3일


작은 백팩을 메고 가볍게 떠나려고 짐을 싸기 시작했다. 인생 첫 혼여였다. 동해 묵호에서 2박 3일 동안 혼자 있는 시간을 알차게 채우겠노라 들떠서 짐을 싸다 보니 웬걸 짐이 많았다. 아침에 달리기를 하기 위해선 무릎보호대, 장갑, 비니 등의 방한 용품들이 필요했다. 카페에서 쓸 다이어리들도 챙겼다. 마지막으로 책을 담는데 어느새 네 권이 되었다. 읽어야 하는 영미 장편소설, 여행에 어울리는 문진영 작가의 단편소설집, 그 작가의 단편과 다른 색의 소설이 읽고 싶을 때를 대비해서 다양한 작가의 작품이 실린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잠들기 전에 읽을 에세이까지. 백팩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캐리어를 꺼내왔다.


그동안 여행을 꽤 많이 다녔는데 왜 혼자서는 떠난 적이 없었을까? 길게는 두 달 동안의 긴 여행부터 당일치기의 짧은 여행까지 나는 항상 누군가와 함께 떠났다. 혼자서 영화도 잘 보고, 밥도 잘 먹고, 전시회도 잘 다니는데 이상하게 여행만큼은 혼자 떠나고 싶은 마음이 잘 들지 않았다. 여행을 떠나면 인생을 알게 된다고들 말하는데, 그렇게 보았을 때 내가 인식하는 인생은 개인전이 아닌 팀전이었던 것 같다. 출발부터 도착까지 수많은 난관을 함께 헤쳐나가며 함께 여행의 달콤한 과실까지 나눌 동료들을 난 찾아 헤맸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혼자 떠나고 싶은 마음의 충동이 일었던 것은 인간관계의 고자극 속에 잠깐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였을까. 묵호로 떠나는 KTX에는 시시때때로 울리는 회사 메일 알림도 로그오프 했다! 노크 없이 벌컥 열리곤 하는 내 방문과 달리 묵호에서 머물게 될 숙소의 방문은 아무도 열지 못할 것이다! 내가 책을 읽고 싶은 때면 누구의 방해도 없이 책을 읽고, 연결되고 싶을 때에만 비로소 연결될 터이다! 나만을 위한 공간에서 나만을 위한 시간을 쓸 테다! 호기롭게 떠났다.


2박 3일은 예상보다 더 즐거웠다. 하루에 3만 보 이상 걷는 일정에 대해서도 아무도 불만을 표하지 않는다! 내가 가고 싶은 곳에 너도 진짜 가고 싶은 게 맞는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새벽에 일어나 달리기를 하기 위해 불을 켜고 옷을 갈아입어도 괜찮다! 오늘 가려고 했던 곳을 내일 가기로 마음을 바꿔도 아무도 모른다! 아 이게 혼여의 맛이구나! 말을 많이 하지 않으니 마주치는 사람들과의 지나칠 수 있는 사소한 대화도 오래 간직하게 되었다. 문어 닭강정을 사들고 돌아서는 나에게 늦었으니 조심히 들어가라는 염려의 말도(그때 시간은 오후 여덟 시밖에 안되긴 했다), 물회 한 그릇을 남김없이 비운 나에게 혹시 맵지는 않았냐며 입맛에 맞았는지 물어보는 사장님의 질문도, 책방을 찾은 사람들이 부담 없이 쉬었다 가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었으니 맘껏 쉬다 가라는 책방 주인의 말도 나는 오래 품으며 따뜻해했다.


그렇게 정처 없이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3일째 점심밥을 먹는데, 내가 이곳의 NPC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알고 싶지 않아도 함께 지내다 보면 파도처럼 밀려들어와 느껴지는 타인의 감정들이 있다. 어떤 때는 모른 척 외면하고 싶어도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생생하게 느껴지기 마련인 넘치는 감정들에서 이곳의 나는 철저히 배제되어 있었다. 매일 아침마다 쏟아져 나오는 쓰레기들을 치우며 사람들을 맞이하는 민박집주인이자 1층 슈퍼마켓의 사장님이 느낄 감정을 나는 모른다. 맞닿아 장사하는 두 건물의 횟집 사장님이 서로에게 느낄 감정을 나는 모를 수밖에 없다.


이상하다. 떠나기 전에는 방해 없이 오롯이 내 감정만 살피고 싶었는데,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는데, 아직 나에겐 좀 더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낄 힘이 남아 있던 것 같다. 서울로 돌아가면 묵호에서와 달리 같이 밥을 먹어야겠다. 밥을 먹다 보면 함께 먹는 이의 기쁨이, 슬픔이, 분노가, 허망함이 밀려와 나의 감정을 건드릴 수 도 있겠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다는 마음이 들었다. 백팩을 메고 캐리어를 끌고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역 무인반납함에서 여행 중에 다 읽은 책 3권을 반납하고 나니 집으로 돌아가는 무게가 좀 더 가벼워졌다. 짧은 2박 3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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