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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ast Feb 26. 2017

맨체스터 바이 더 씨

'살아내는' 혹은 '살아지고야 만다는' 것의 의미

http://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05676

 

 영화관을 갔다. 익숙한 '맨체스터'가 눈에 들어왔다. 그 맨체스터에 바다가 있었나? 상영관 불이 꺼진 지 30분은 지나서야 눈치챘다. 이 맨체스터가 아니구나.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미국의 작은 바닷가의 실제 지명이다. 영화에서는 주인공의 기억이 묻혀있는 공간이다.

 

 영화는 느리고 고요하며 또 차가웠다. 뜨거운 절정으로 치받는 감정과잉의 신파와는 전혀 다른 결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묵묵하게 중심을 잃지 않고 걸어간다. 성큼성큼 내걷지 않는 느린 걸음이 때로는 답답하고 지루하기도 하다.


 영화의 정서를 형성하는 중심에는 배경과 인물이 있다. 먼저, 겨울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차가움과 쓸쓸함의 정서가 짙게 배어 있다. 한적한 거리마다 수북이 쌓인 눈과 카랑한 소리로 빈 여백을 찢는 바닷바람, 체온을 가늠할 수 없는 두툼한 외투가 그렇다. 그 안에 극의 주인공 '리'의 퀭하고 움푹 파인 눈매가 더해진다. 리에게는 어떤 삶의 의지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하루를 '살아내는' 혹은 '살아지고야 만다는' 건조한 삶의 조건들만이 남았다.


 리는 눈꺼풀에 힘 줄 여유조차 없는 한 줌의 힘만이 남았다. 하지만 상실감과 분노의 절제, 무엇인가 결여된, 소거된 삶의 편린들로 가득 찬 그의 삶은 그 자체로 또다시 벅차다. 리는 즐겁지 않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슬프지도 않다. 이겨낼 수 없는 슬픔이 그를 집어삼켰을 때, 그는 과거 어디쯤 자신을 묻었다. 이제 더 이상 삶을 느낀다는 것은 그에게 사치일 뿐이다. 무기력한 그의 삶은 그래서 한없이 묵직하다.


 갑작스러운 형의 죽음으로 리는 고향으로 돌아온다. 장례절차를 밟으면서 그는 불편한 과거의 기억들을 다시 마주한다. 기억이란 그렇다. 누구나 지우고 싶은 기억들이 있고, 우리는 종종 그것들을 한데 모아 깡그리 불태운다. 그러나 어느 순간 기억의 불씨는 되살아난다. 그리고 나선 아주 작은 단서만으로 불쑥 우리의 삶에 끼어든다. 하물며 함께 했던 공간에는 그 추억들이 온전히 묻어 있다.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


 리는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 '해야 할 일'을 서두른다. 하지만 어김없이 기억의 스위치는 하나씩 점화된다. 영화에서는 리의 현실 상황과 연관되는 기억의 이미지들이 flash back으로 표현된다. 현재와 과거의 선명한 온도차는 깊은 몰입감과 함께 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관객들은 리의 삶을 되짚어가며 밟고 서 있는 현재의 진실을 마주한다.


 전 부인 랜디와 리의 만남은 짧지만 강렬하다. 둘의 투샷은 감정 표현, 슬픔의 극복 방법, 색채의 대비 등 여러 부분에서 인상 깊다. 특히 과거의 사건과 현재 사이에 의도적으로 감독이 들어낸 그 간극을 대사 몇 줄과 섬세한 표정, 몸짓만으로 오롯이 전한다. 심리적 동선에 따라 치밀하게 설계된 플롯에 인물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펼친 배우들의 호연이 이를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삶은 한 순간 아름답다가도, 다음 순간 산산조각 난다.'


 리의 시간은 어느 한 시점에 멈춰있다. 모든 것이 변한 바로 그 순간에 우두커니 서 있다. 그 이후의 시간은 단지 죽을 수 없어 살아내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누구도 다른 사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고통을 견딜 수 있는 그만의 유일한 방법 역시 그렇다. 리는 누군가와 밥을 먹을 수도, 시시껄렁한 잡담을 나누지도 못한다. 남들과 다른 삶을 살아가야 한다.


 산산조각 난 삶을 다시 되돌릴 수는 없다. 잿빛의 그늘은 언제든 스멀스멀 연기처럼 피어오른다. 누구나 인생은 처음이다. 실수하고 또 실수하면서 언제나 모든 일이 일어난다. 그리고 폐허처럼 변한 그곳에서 삶이 다시 시작된다. 산산조각 났던 삶이 또 한순간 아름다움을 내뿜기도 한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원래의 매끄러움과 다른 어설프게 이어 붙인 조각들만으로 우리는 살아간다.


 그래서 이 영화는 성숙하다. 케네스 로너건 감독은 얄팍한 속임수로 관객을 현혹하지 않는다. 답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이음새에서 새어 나오는 아픈 기억들을 그저 담담하게 내민다. 다만 관객은 자신의 기억에 비추어 영화 너머를 상상할 뿐이다. 세상은 계절의 변화처럼 느리게 흘러간다. 변화의 가능성은 나에게 있다. 얼마큼 용기 내 과거의 나와 마주하고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을까? 영화 속의 리에게 희망을 엿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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