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끄러운 지하철에서 전화를 받았다. 일주일 전, 통영으로 전지훈련을 떠난 둘째 아들의 전화다.
사뭇 진지한 말투에 나중에 다시 하란 말을 못 건넨다.
'올 것이 왔구나!'
"엄마 지하철인데 잠시 내릴게. 이야기해 봐."
"나, 축구 그만할래. 더 못 하겠어. 이게 순간적인 감정 때문에 그런 건지 어떤 건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래.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아."
"무슨 일 있었구나. 이야기해 봐. 지하철에서 내렸어."
과거에 아이들을 키우면서 내가 착하거나 좋은 사람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종종 했었다.
합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걱정이나 불안 같은 감정에 휘둘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아이에게 되레 내 감정까지 얹어 쏟아놓았던 경험이 많다. 아이가 흔들리거나 적응하지 못해 움츠러들었거나 낙담하고 낙심할 때 엄마로서 잡고 있어야 할 균형의 끈을 놓쳐버리기 일쑤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다시 말해 엄마가 아니면 경험하지 않았을 일들을 경험하곤 한다.
지난 봄, 큰 아이가 엄청난 불안으로 힘들어했을 때 나는 엄마로서의 가장 큰 고통을 겪었다.
내가 해 줄 수 없는 것, 아이가 짊어져야 할 삶의 과제와 무게들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이 시간이 '지옥'이구나 여겨졌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 같이 옆에 있어 주는 것, 그리고 진심으로 네 삶이 행복하길 원하면서 기도를 하는 것 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동안 엄마라면 해 줄 수 있었으리라 여겼던 것이 허무하고 허탈하게 쓸모없는 종잇장 처럼 여겨졌던 순간이었다. 만일 아이가 아니었다면 나의 한계를 인정 할 수 있었을까.
며칠 전 ,한 친구가 서글프게 울면서 이런 말을 했다.
"엄마가 이가 아프대. 많이 연로하셨잖아. 같이 갈 아빠도 안 계시고. 그런데 '얼른 병원에 가'라고만 말했지 귀찮은 생각이 먼저 들더라고. 나 말고 대신할 수 있을 형제들 얼굴이 떠오르면서 탓만 하게 되고. 그런데 만약에 내 딸이 이가 아파봐. 다른 일 미루고 당장 병원에 가지 않겠어? 우리 엄마도 내가 내 아이를 바라보듯이 나를 키웠을 텐데, 나는 엄마의 고통이 귀찮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너무 죄스러워."
"그러게. 그래서 내리사랑이라고 하나보다. 어떤 면으로는 서글프네."
만일 내가 엄마가 되지 않았다면 '귀찮음'이 아니라, 진정으로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누군가의 마음을 경험할 수 있었을까.
몇 년 전부터 눈에 질병을 가지고 있다.
잘 관리만 하면 유지해가며 사용할 수 있지만 언제 상태가 나빠질지 어떤 형태로 찾아올지 알 수가 없어 조심스럽다. 그런데 서 너 달 전부터 상태가 좋아지지 않더니 그동안 잘 들었던 주사도 소용이 없었다.
급하게 스테로이드 주사를 맞았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그러자 겁이 덜컥 났다.
아, 이제 실명의 시작인가 보다. 어떤 원인인지도 모른 채 현대 의학에서는 취할 수 있는 마지막 약 봉투를 받아들고 오면서 우습게도 내 걱정이 아닌 아이들 걱정이 먼저 들었다. 내가 뒤로 밀리는 것은 내 아이였기 때문에 가지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같이 흔들리고 휘둘렸던 시간들, 이게 맞는지 저게 맞는지 길을 잃어 다 놓고 싶었던 순간들. 아이 기가 꺾일까 봐 걱정인 건지, 아니면 내 자존심이 허락을 못 하는 건지 앞을 볼 수 없었던 희뿌연 문제의 순간들. 아이가 잘 못 되면 내가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죄책감에 휩싸이고, 내 잘 못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려 했던 뻣뻣하게 날을 세우던 순간들.
가만히 들여다보면 가장 밑바닥에는 아이가 진정한 행복하게 잘 살기 원하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다.
진정으로 누군가가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이 엄마가 아니었다면 가질 수 있는 감정일까.
그 마음을 고스란히 전하는 것이 참 어렵다.
어쩌면 아이들은 내게 '제대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 것 같기도 하다.
"어떻게 하면 이 아이를 잘 이해할 수 있을까?"
"아이에게 가장 좋은 것을 준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나의 사랑을 어떻게 왜곡하지 않고 잘 전달할 수 있을까?"
"우리가 서로 제대로 잘 연결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진심으로 조건 없이 사랑을 주고 싶은 엄마의 마음이 아니었다면 걷지 못했을 길이었다고 생각한다.
좋은 엄마 자격 같은 건 없다. 아이와 엄마가 같이 영향을 주고받으며 새로 생기는 질문에 고심을 하다 보면 함께 걷는 길이 열리는 것이 아닐까 하고 잠시 생각에 머물러 본다.
"지하철에서 잠깐 내렸어. 이야기해 줄 수 있어?"
"음, 정리하자면 그래. 오늘 프로랑 경기 중에 감독님이 모멸감을 느끼는 말을 하잖아. 자존심 상하게... 그래서 진로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어. 오히려 감독님이 나한테 한 말이 생각을 하게 해. 자존심 상한 건 상한 거고. "
"심한 말을 들었나보네. 자존심 정말 많이 상한거보니."
"진짜 내가 그렇게 모든 것을 깎아가며 열정을 내면서까지 축구가 의미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이따가 감독님하고 상담을 해 보려고. 이젠 감독님 만날 용기가 오히려 생기네. 들을 까봐 무서운 말을 들으니까 오히려 용기가 생겨. 아까 나한테 한 말들이 내가 들을까봐 직면하지 못했었던거 같아."
"큰 결심.. 했네."
"오히려 자존심 때문에 지금까지 끌고 온 거 같아. 내가 그런 놈이 아니란 걸 증명하는 데 시간을 쏟았어.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에 시간을 가져도 모자랄 판에 왜 누군가에게 나를 증명하는데 모든 것을 바치고 있냐고."
아이가 자신의 길을 찾기위해 고군분투 하는 모습이 기특하다.
하지만 엄마로서는 여전히 아픔을 겪으며 길을 잧는 모습이 안쓰럽기만 하다. 편하고 안전하게 좋은 길만 걸었으면 좋겠지만 그것이 인생이 아닌 것을 알기에 그 나머지는 각자의 숙제로 남겨두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