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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려놓기 Aug 01. 2016

Don't cry for me Argentina.

부에노스아이레스 2015년 8월 5일

노동자들의 어머니인 에비타는 떠났지만 아르헨티나인은 그녀를 기억한다.

남반구의 파리는 항상 탱고가 함께 하는 곳이다.


'아르헨티나'라는 국가 이름은 '은'이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아르헨툼(Argentum)에서 유래되었다. 아르헨티나에 엄청난 양의 은이 있다는 소문이 나고 '은의 땅(La Argentina)'이라 불리게 되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시에 흐르는 강 이름도 '은의 강(Rio de la Plata)'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축구 클럽의 애칭이 '리버 플레이트 (River Plate)'인 이유이다. 


아르헨티나의 수도이며, 가장 큰 도시이다. 브라질의 상파울루에 이어 남미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고, 멕시코시티와 상파울루와 함께 라틴 아메리카를 대표하는 세 도시 중 하나이다. 세계적으로도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 중 하나로 꼽힌다. 인구가 1,200만 명이 넘는다. 한국의 거의 30배에 이르는 영토이고 인구는 4,000만 명인 나라에서 수도 과밀화가 너무 심한 편이다.


아르헨티나는 다른 남미의 여러 나라와 마찬가지로 정쟁과 내란, 혁명을 되풀이하였다. 쿠데타와 정권교체가 잦아 임기를 채운 정권이 거의 없었다. 그런 아르헨티나에서 주민들에게 가장 인기 있던 정치인은 '환 페론'이다. 아니 '에비타'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페론의 부인 '에바 페론'이다.


에비타는 노동자들의 어머니이자 노동자들이 진정 존경하는 성녀였다. 아르헨티나의 화폐 중 가장 큰 단위인 100페소 지폐에는 그녀의 얼굴이 있다. 그녀가 조금 더 살았다면 아르헨티나에는 다른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페론은 에비타의 인기에 힘입어 대통령이 되었고, 에비타가 죽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군사 쿠데타로 실각을 했다. 


1944년 지진 피해자를 돕는 자선 행사에서 에비타와 당시 노동 장관이었던 환 페론 대령이 처음 조우한 후 페론의 정치적 성공을 이룬다. 영화배우였던 에비타는 대중적 인기를 바탕으로 페론의 정치적 동조자가 되었고 1945년 시민 대혁명이 일어난다. 대혁명 5일 후에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린다.


에비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식량 배급, 위생 시설 등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한 번도 받아 보지 못한 수준의 지원을 해, 노동자들의 우상이 되었다. 에바 페론 재단을 설립해 새벽 6시부터 밤 12까지 일을 했고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든 그녀를 만날 수 있었기에 가난한 이들의 성녀로 불렸다. 

 

에비타의 이런 노동자를 위한 활동은 그녀가 죽고, 페론이 실각을 한 지 18년이 지난 후에도 망명 중이던 페론이 다시 대통령이 되도록 하는 힘이 되었다. 또, 1976년 군사정부 이후와 1983년 민주화 이후 또다시 페론당이 정권을 잡는 기반이 되었다. 


페론은 자신이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제3의 길을 걷는다고 믿었다. 1949년부터 1976년까지 아르헨티나의 국민총생산은 127% 성장했고, 개인소득은 232% 증가했다. 가장 많은 산업 투자를 단행했고, 아르헨티나가 농업국가에서 공업화로 변화시켰다. 페론의 집권 기간은 아르헨티나 역사상 처음 있는 부의 재분배 현상으로 개발도상국에게는 이례적으로 60%에 이르는 두터운 중산층을 형성했던 시기였다. 


페론주의에 대한 평가는 아직도 극과 극을 달린다. 특히 한국의 언론에서 대표적 포퓰리즘으로 불리며 '복지라는 이름으로 벌이는 무분별한 정부 예산의 확대가 멀쩡한 나라를 어떻게 파산시키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자주 인용된다.


아르헨티나의 경제 몰락과 1940년대 중반의 페론주의를 직접 연결 짓는 것은 무리라는 주장도 있다. 쿠데타로 페론을 다시 실각시킨 군사정권은 무분별한 외자 유치를 했고, 다국적 기업을 불러들였다. 80년대 초에 그  해외자본과 기업들이 한꺼번에 빠져나가 버린 후 천문학적인 외채와 살인적인 인플레이션로 인한 경제파탄이라는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외채는 1976년 78억 달러였으나, 1983년 450억 달러로 증가했다.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이 저임금 정책을 실행하며 중산층이 붕괴하고 국민의 생활수준이 급격히 하락했다. 아르헨티나의 빈곤율은 군사정권 초기 5%에서 군사정권 말기 40%로 급증했다.


많은 이들은 페론의 실정은 경제나 사회복지라기보다는 정치에 있다고 본다.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군부와 노동자의 대결을 부추겼고 가톨릭 교회와도 갈등을 일으켰다. 그런 갈등이 결국 정책의 지속성을 유지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양극단의 평가를 받고 있지만 여전히 아르헨티나인들의 가슴속에 에비타는 살아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오랫동안 '남반구의 파리'로 불려 왔다. 영감을 찾아 북반구에서 날아온 예술가들의 보금자리였다. '남반구의 파리'는 일 년에 몇 달씩 실제로 '북반구의 파리'를 대체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유럽 예술가들의 겨울 휴양지 역할을 해왔고, 덕분에 이 도시는 공연 예술이 넘쳐흘렀다.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예술은 음악이자 춤인 탱고이다. 페론과 에비타의 시절은 탱고의 시대였다. 에비타의 탱고에 아르헨티나의 모든 이들이 열광하였다. 그러나 1955년 군사 쿠데타와 더불어 탱고의 황금기는 처절하게 끝난다. 30년간 이어진 군사 독재는 3명 이상의 모임조차 금지시켰고, 페론의 민족주의가 육성시킨 탱고는 더욱 엄격히 탄압되었다. 1983년 독재의 종식과 더불어 '탱고 르네상스'가 일어났다.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난 가장 유명한 세 사람으로 에비타와 축구 선수 마라도나, 그리고 탱고 가수 카를로스 가르델(Carlos Gardel)을 꼽는다. 카를로스 가르델은 세계의 여성들을 탱고의 마수에 빠져들게 한 장본인이다. 세계 투어를 통해 항구의 밑바닥 문화에 불과했던 탱고를 아르헨티나의 보물로 격상시켰다. 


언젠가 페이스북의 프로필로 썼던 사진이 있다. '이 몹쓸 그립은 사람아'라는 대학로에 있는 막걸릿집 화장실의 문구를 찍은 사진이다. 그 문구는 '어디 먼 데 가고 싶었다. 먼데가 어딘지 몰랐다'이다. 여행을 준비하며 바로 그 문구를 생각했다. 

 

서울에서 계속 땅을 파면 도착한다는 곳이 바로 이 곳이다. 서울의 대척점이며 지구의 정 반대쪽에 있는 도시가 부에노스 아이레스이다. (어린 시절 그렇게 배웠다. 정확하게는 우루과이 앞바다라고 한다. 우루과이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강 하나 건너에 있다.)


올 수 있는 가장 먼 곳에 왔다. 정말 멀리 왔다. 가장 멀리 왔으니 이제 어느 방향으로 가던지 서울에 더 가까워지는 것이다. 이 곳까지 오며 깨달은 것은 '결국 가장 먼 곳은 아마도 내 마음속에 있지 않나?'하는 생각이다.


'여행이란 떠나는 것'이다. 익숙한 공간을 떠나고, 자기의 성을 벗어나는 것이 여행의 가장 첫 번째 의미이다. 그다음이 '만나는 것'이다. 자기를 떠나지 않고는 새로운 것을 만나기도 어려운 법이다. 그리고 '돌아오는 것'이다.


이제는 '돌아가는 길'이다.



글 내용 중의 주요 수치는 https://ko.wikipedia.org/wiki/페론주의 를 참고하였습니다.

대통령궁 카사 로사다(Casa Rosada) - 에비타가 발코니에 나와 연설을 했다고 한다.
대동령궁 앞의 5월 광장은 군사독재시절 희생자들의 어머니들이 주최해 매주 목요일 오후 3시 30분 집회가 열린다. 3만여 명이 행방불명 되었다. 
오월 광장의 모습
독립 영웅 산 마르틴 공원 - 왜 우리나라는 항일 무장 투쟁을 가르치지 않는지?
대성당 - 독립 영웅인 산 마르틴 장군가 안치된 곳이다.
에바 페론의 무덤이 있다는 공원 묘지 레콜레타 (Recoleta) - 조각들이 많아 조각 공원 같다고 해서 갔는데 늦게 도착했더니 문을 닫았다.
대극장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 엘 아테네오 - 오페라극장을 리모델링한 것이다.
가장 좋았던 뿌에르사 브루따 공연 - 내한 공연의 입장료는 9만 9천원이었다지만 이 곳에서는 만원이 조금 넘는다.
춤, 노래, 무대장치들이 잘 조화된 공연이다. 허공에 비닐로 수영장을 만들고 그 위에서 춤을 춘다.
열광하는 관객들 - 좋은 무대장치가 없더라도 아이디어와 열정으로 대단한 공연을 만든다.
엄청난 무대장치가 있을 것 같지만 커다란 천에 바람을 불어 넣고 영상을 쏘는 것이다.
탱고 기본 스텝 - 연습하시라.
탱고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탱고가 시작되었다는 라 보까 거리
가장 유명한 아르헨티나인이라는 에비타, 마라도나, 카를로스 가르델
뱃사람들과 항구 노동자들이 상대적으로 숫자가 부족한 여자들에게 어필하기 위해 사창가와 술집에서 추던 것이 탱고다.
라 보까 항구
이 곳에서 팔리는 그림도 탱고가 대부분이다.
한인 타운 - 한국의 오래 전 또는 시골 마을 같다.
김치를 담기 위한 배추와 무가 보인다.
두꺼비 식당의 점심 - 남미 한식당 중 맛으로 유명한 곳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상징인 거대한 꽃이다.
플로리다 거리의 악사
거리의 공연들 - 가장 오래된 지역인 산 텔모는 일주일에 한 번 벼룩시장이 열린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
뿌에르사 브루따 공연이 있는 예술공간
마라도나 홈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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