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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려놓기 Aug 02. 2016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

산티아고 데 칠레 2015년 8월 16일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는 잘못된 일기예보가 반복된다.

일기예보가 아닌 쿠데타 개시를 알리는 신호였다.



'Rain over Santiago(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라는 영화가 있었다. 트레킹으로 유명한 스페인의 산티아고가 아닌 '산티아고 데 칠레(칠레의 산티아고)'의 이야기다.


1973년 9월 11일 아침, 칠레 국영 라디오는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는 일기예보를 반복한다. 하지만 그 시간 산티아고는 너무나 화창한 봄날이었다. 라디오의 목소리는 일기예보가 아닌 쿠데타 개시를 알리는 신호였다. 피노체트는 전투기로 대통령궁을 폭격했다. 세계 최초로 선거를 통해 사회주의 정권을 열었던 아옌데 대통령은 마지막 순간까지 저항하다가 생을 마감했다.


의사 출신인 아옌데의 공약 제1항은 15세 이하의 모든 어린이에게 하루 0.5리터의 분유를 무상 배급하겠다는 것이었다. 많은 아이들이 영양실조에 걸려 있던 칠레에서 이 문제의 해결은 시급했다. 하지만 칠레의 분유 시장을 독점하고 있던 스위스 회사 네슬레는 칠레 정부의 구매 협의를 거부한다.  

 

그 거부의 배후에는 미국이 있었다. 미국의 닉슨 정부는 외국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칠레의 자립성을 높이고 국내적으로 사회정의를 실현하려는 아옌데 정권의 개혁정책이 싫었다. 미국의 다국적 기업이 누려온 많은 특권이 침해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미국 정부는 갖가지 방법을 동원했다. 칠레에 대한 지원을 끊어버리고 운수업계의 파업을 뒤에서 조종하고 광산이나 공장의 태업을 부채질했다.


그 마지막 수단은 결국 피노체트의 쿠데타를 지원하는 것이었다. 그 후 17년간 이어진 피노체트의 군사 독재 기간 동안 칠레에서는 최소 3천 명이 납치·살해되었고, 2만 8천 명의 고문피해자가 생겨났다.


미국은 왜 그렇게 아옌데를 싫어했을까? 아옌데 정권의 출범에서 피노체트 군사독재에 이르는 시기의 역사를 소설 '미세레레'로 서술한 소설가 '카스단'은 소설에 이렇게 적는다.


"미국의 지배세력이 보기에는 아옌데에게 두 가지 잘못이 있었다. 첫째는 이데올로기적인 잘못이었다. 그는 사회주의자였다. 둘째는 경제적인 잘못이었다. 그는 구리 광산의 국유화를 추진했다. 구리 광산은 칠레의 주된 자원이지만 대부분 미국 기업들이 소유하고 있었다.‘엉클 샘’은 자기가 훔친 것을 남이 되찾아가려고 하면 아주 질색을 한다. 미국의 역사는 무장 강도의 역사일 뿐이다."


그 역사의 과정에 가장 비극적인 전설로 남은 이는 '빅토르 하라'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파블로 네루다와 함께 빅토르 하라는 아옌데 정권의 대표적 문화적 아이콘이었다. '기타는 총, 노래는 총알'이라는 슬로건으로 남미 문화운동인 ‘누에바 칸시온(새 노래)’의 중심에 서 있던 가수이다. 그의 공연장에 모이는 수십만의 군중들을 향해 아옌데가 연설을 하였다.


그를 두려워한 피노체트 정권에 의해 쿠데타 직후 체포되어 수용소로 개조된 경기장 에스타디오 칠레로 끌려갔다. 그리고 며칠 후 근처의 버려진 땅에서 44발의 총상을 입고 고문 흔적이 남은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기타를 치던 그의 손은 개머리판으로 맞아 으스러진 상태였다.


하라는 이후 피노체트 정권의 억압으로 희생된 5,000여 명의 정치범들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에스타디오 칠레 스타디움은 하라 사망 30주기인 2003년에 그의 이름을 따서 빅토르 하라 국립 스타디움으로 개명되었다.


증거 부족으로 진실을 밝히지 못한 하라의 죽음이 다시 주목받은 것은 2009년이다. 에스타디오 칠레 스타디움에서 정치범을 총살하는데 가담했다는 전직 군인의 증언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해 12월에는 하라의 장례식이 다시 열렸고 수천 명의 칠레인이 참석했다. 그리고, 2012년 칠레 법원은 빅토르 하라에 대한 살인 혐의로 전 군부 인사들을 기소했다. 하라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지 39년 만이다.


남미의 다른 나라들에 비하여 비싼 물가 때문에 가난한 배낭족들이 많이 들리지 않는 곳이지만 나에게는 꼭 가야만 하는 곳이었다. 그 이유는 '빅토르 하라의 흔적을 느껴 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대학 시절에 '아름다운 삶, 끝나지 않은 노래'라는 빅토르 하라의 평전을 읽었다. 우리가 알지 못하고 있던 남미에 대한 역사와 현실을 처음 깨닫게 해 준 책이다.


이곳 산티아고까지 왔지만 그의 흔적을 찾기에는 너무 부족한 시간이다. 멘도사에서 10일간의 정체가 불러온 결과이다. 한 번 연기한 비행기를 차마 또 연기하지는 못하고 서둘러야 했다.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국경이 열리자마자 출발했지만 오후 4시 반에 산티아고에 도착하고 다시 0시 5분에 비행기를 타야 하는 일정이다.


그가 끌려가 고문과 함께 죽어간 체육관은 그의 이름을 붙인 스타디움이 되었고 그의 이름을 붙인 거리들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라이브 카페들을 들러 아직도 그의 노래를 부른다는 산티아고의 음악을 듣고 싶었다.


시가 노래가 되고 노래가 연대가 된다고 믿는 칠레 민중들이다. 나는 그의 흔적을  느끼지 못하고 가지만 칠레 민중들의 삶에는 그가 함께 하기를 빌어 본다. 칠레는 지난 2015년 7월 23일 그를 죽인 전직 군인 10명에게 유죄 선고를 내렸다. 42년이 지났지만 칠레는 그를 잊지 않았다.


그가 남긴 노래 몇 곡과 그가 체 게바라를 위해 부른 노래를 적어 본다. 그의 총과 총알이다.


Victor Jara Manifiesto

Te Recuerdo Amanda

Cruz de Luz (Camilo Torres) - Victor Jara

Comandante Che Guevara - victor jara

빅토르 하라의 기념관이라 찾아간 곳인데 옮겼나 보다. 내 스페인어 실력으로는 찾을 시간이 없다.
벽의 낙서가 마음에 남는다. 빅토르에 감사한다는 칠레인의 마음
기념관 앞 광장
아르마스 광장
대성당
말을 탄 경찰이 눈길을 끈다.
산티아고에서의 유일한 한끼는 해물 스프. 칠레 와인은 결국 못 마셨다.
거리의 공연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국경
이 눈들이 국경을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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