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를e Mar 12. 2021

여행이라는 보험

두 번째 효도라면


2006년이었다.

나에겐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한 첫 해.

동갑인 부모님에겐 환갑을 맞이하는 해이며, 자식을 독립시켰다는 홀가분한 해였던 것 같다.

그리고, 그 해는 엄마와 아버지 그리고 나까지 세 식구가 가족이라는 공동체 수립 이후 처음으로 가족 여행을 갔던 가족역사적인 해였다.


남들 다가는 가족여행을 가지 못했던 이유는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여름휴가 때마다 혼자 여행을 가셨다. 혼자 가는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휴가가 언제인지 어디로 가는지 가르쳐 주지 않는 데 있었다. 그래서 휴가철이 되면 엄마와 나는 마음을 졸였다. 반면 휴가철이 되면 자유인이 되는 아버지는 기차역에서 밤기차를 타기 전에 연락을 하곤 했다. 그나마 연락을 하면 다행이고, 연락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여름철 아버지의 부재가 3일 이상 지속되면 엄마는 전화기를 만지작거렸다. 실종신고를 해야 하니까.


첫 가족 여행지는 제주도였다.

유독 바람이 많이 불던 5월의 제주 바닷가에서 나는 한 마리 나비를 보았다.

이제 만 60세인 엄마는 마치 모든 굴레를 벗어던진 듯 제주의 푸른 바닷가를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처녀 적 사진을 보면, 전문 등산가 수준의 장비를 착용했던 사진이 주를 이루었는데

그렇게 활동적인 엄마가 30년 만에 봉인 해제되었던 것이다.

나비처럼 폴짝거리며 날던 엄마의 모습은 푸른 바닷가를 배경으로 내 뇌리에 선명하게 저장되어 있다.


그 뒤로도 매해 여행을 다녔으면 어땠을까?

아버지가 본인의 온전한 휴식?을 위해 가족여행을 후순위로 미루었다면, 나는 2006년 이후로 나의 직장, 나의 비전, 나의 아이들 때문에 엄마를 나비로 만들어줄 여행은 가지 못했다.   


그리고, 약 10여 년 뒤.

나비처럼 폴짝 거리며 여행의 기쁨을 만끽하던 엄마는 지금 중환자실에서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뇌 수술 직후 경과가 좋아 보였던 엄마는 의사의 예상대로 뇌부종(출혈 후 뇌가 붓는 현상)이 시작되었고, 이내 의식을 잃었다. 더불어 몸의 기능도 하나씩 잃어갔다. 매일 면회 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엄마의 몸이 부서져 가는 것을 보고 듣는 것뿐이었다.


엄마를 다시 못 볼지도 모르겠다.

엄마가 손가락 조차 까딱하지 않고 아무런 의식도 없이 30일째 누워있던 그때쯤에야 이 상황을 조금은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나의 마음은 몇 가지 질문이 적힌 상당한 액수의 청구서를 내밀었다.


'너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엄마에게 너는 무엇을 했는가?'

'엄마와 어떤 추억을 가지고 있는가? 떠올려 보라.'


엄마에게 잘했던 순간들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핸드폰을 아무리 뒤져봐도 사진에는 손주들 뒤에 배경처럼 서있는 엄마 모습밖에 없었다. 엄마와의 시간은 다른 식구와 일상에 묻혀서 또렷하게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나마 기억이 선명한 것은 제주도 바다에서 나비처럼 폴짝거리던 엄마의 모습. 여행은 그만큼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


마음이 내민 청구서에 그나마 맞서 내밀 수 있는 보험 같은 기억은 10여 년 전 그 여행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고스란히 가슴에 빚으로 남았다.


중환자실에서 짧은 면회 후에 아버지와 나는 병원을 나섰다.  

가슴의 빚으로 몸도 마음도 무거웠다. 밥 생각은 없었지만 매끼 혼자 드실 아버지가 안쓰러워 병원 앞 기계 우동 집엘 갔다. 우동을 시켜놓고, 이 빚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메모장에 적어보았다.

다시 한번 기회가 돌아온다면 이 가슴의 빚을 청산할 수 있는 방법들을...늦었지만 들어놓을 수 있는 마음의 보험들을 하나씩 써 내려갔다.


1. 좋아하는 음식 찾아 당일치기 식도락 여행

2. 6개월에 한 번 손주들과 추억 여행 다니기

3. 제주도 일주일 여행

                    :

PS. 사진은 꼭 찍기....동영상도

                    

어느 정도 리스트를 적어갈 무렵 우동 나왔다.

아버지와 말없이 후루룩 후루룩 콧등 치기를 하며 혼자 엄마에게 마음속 메시지를 보내본다.


엄마, 미안해ㅠㅠ
리스트에 적힌것들 어느 것 하나 어려운게 없는데 해본게 하나도 없어.

엄마, 일어나...한 번만 기회를 줘...




작가의 이전글 집밥의 또 다른 기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