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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수희 May 17. 2016

승리의 맥주

맥주는 괴롭거나 슬플 때 마시는 술이라기에는 너무 시원하다.

세상에는 늘 책상 위를 깔끔하게 정리하고 스케줄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서랍 속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컴퓨터의 파일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일의 마무리를 깔끔하게 정리하고 인간관계를 깔끔하게 정리하고 일상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아니다. 


나는 마감이 다 되어야,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나서야 난리법석을 치는 인간형에 가깝다. 나도 이런 내가 당연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심지어 이런 책도 읽었다. 고이케 류노스케의 『생각 버리기 연습』. 번뇌가 책 한 권 읽는 걸로 사라진다면야. 


그는 이렇게 조언한다. 정해진 시간 내에 반드시 해야 할 일들을 순서대로 목록으로 만들고 그 순서를 꼭 지키려고 노력하라. 만약 일을 다 끝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정해진 시간이 되면 무조건 다음 순서로 넘어가는 것이 이 방법의 관건이다. 이대로 하면 ‘그 시간 안에 나름대로 마쳤다는 산뜻한 기분을 조금이라도’ 맛볼 수 있다고 한다. 


나도 그런 기분을 간절히 원한다. 산뜻한 기분. 그렇다. 내 인생에 없는 것은 그런 산뜻한 기분이다. 언제나 기한에 쫓기고 마감에 쫓긴다. 나는 지금껏 그런 식으로 살아왔다. 떠밀리듯이. 쫓기듯이. 마지못해서. 



밤마다 맥주를 한 캔 또는 한 잔씩 마시는 버릇이 들었다. 하지만 20세기 말에, 갓 성인이 된 나는 맥주의 맛을 전혀 몰랐다. 맥주를 시원하다며 들이켜는 나이가 많은 동급생들에게 투덜거리듯이 물었다.


 “도대체 맥주를 무슨 맛으로 마시는 거야? 쓰기만 한데.” 


그때 내 옆에 앉았던 나보다 나이가 한 살 많던 남학생이 마치 철없는 여동생을 어르듯 이렇게 말해 주었다. 


“처음엔 그래. 그런데 운동 같은 걸 하고 난 다음에 냉장고에서 막 꺼낸 시원한 맥주는 정말 끝내줘.” 


드물게 침착하고 드물게 사려 깊고 드물게 철이 들었던 그 남학생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나는 18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맥주를 마실 때마다 가끔씩 그 남학생이 했던 말을 떠올린다. 맥주 맛이 정말 끝내준다고 느낄 때는 다시 한 번 떠올린다. 


나는 이제 맥주의 맛을 아는 어른이 되었다. 기쁜 일이다. 



7월의 런던 사우스뱅크를 산책하다 펍의 야외 테이블에 앉아 마시는 맥주는 정말 최고였다. 플라스틱 컵에 따른 스텔라(Stella) 맥주였다. 태국의 후텁지근하고 시끄러운 밤거리에서 얼음을 부어 마신 씽(Singha) 맥주, 불친절한 숙소 여직원과 싸우고 화를 식히기 위해 거리를 헤맬 때 빨대를 꽂아 들고 다니며 마시던 창(Chang) 맥주, 광저우의 끝내주는 베트남 음식점에서 기름진 음식과 함께 먹었던 칭따오(Tsingtao) 맥주, 라오스에서 튜브 래프팅을 하다가 친구가 물에 빠졌다 극적으로 구조된 후 기진맥진한 채로 마셨던 커다란 라오(Lao) 맥주, 광활한 인도 고아 해변에서 마신 고아(Goa) 맥주. 모두 잊을 수 없다. 


특별한 기억이 있는 맥주만이 아니라 매일 저녁 마시는 평범한 맥주도 좋다. 나는 소맥 같은 건 좋아하지 않는다. 종이컵에 따른 맥주는 질색이다. 별 모양의 로고가 있는 삿포로 맥주를 보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눈 오는 삿포로의 라면집에서 마셔보고 싶다. 좋아하는 사천식 중국 식당에 가면 레몬을 넣은 깐풍기에 칭따오 맥주를 곁들인다. 집에서 별다른 안주 없이 마실 때는 클라우드나 칼스버그가 좋다. 


와인이 예민하다면 맥주는 무던하다. 그래서 새로운 맥주는 언제나 최고다. 다시 말하면 최고의 맥주는 언제나 지금, 오늘 마시는 맥주다. 


맥주는 괴롭거나 슬플 때 마시는 술이라기에는 너무 시원하다. 괴롭거나 슬플 때는 역시 소주가 어울린다. 아니면 위스키라든가. 겨울날에 마시기에는 너무 차갑다. 실연을 당한 뒤에 마시기에도, 실직을 당한 후에 마시기에도, 망신을 당한 후에 마시기에도 어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맥주는 승리의 술이니까. 그래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42킬로미터를 다 뛰고 난 뒤에 벌컥벌컥 단숨에 들이마시는 맥주 맛이란 그야말로 최고라고 말했던 것이리라.  



나는 그 정도는 바라지도 않는다. 나는 그저 오늘의 할 일만 산뜻하게 마무리했으면 좋겠다. 찜찜한 기분으로, 내일을 두려워하면서 잠들고 싶지 않다. 오늘의 할 일을 말끔하게 끝낸 후 승리의 맥주를 마시고 싶다. 남은 일이라고는 침대에 얌전히 들어가 이불을 덮고 발을 뻗은 채로 잠을 드는 것밖에 없다면, 그거야말로 오늘 나는 승리한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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