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기억이 없다고 배웠다. 물리학에서, 화학에서, 물은 단지 분자구조의 결합이고, 흐르고, 증발하고, 얼어붙는 단순한 성질의 집합일 뿐이라 배웠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의문이 들었다. 왜 물은 기억이 없어야만 하는가?
어느 날, 비가 오는 날이었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들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저 빗방울은 어디서 왔을까? 태평양의 깊은 바다에서 증발한 물이었을까, 아니면 오래된 빙하가 녹아내린 물이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물이 단순한 분자가 아니라, 세상을 여행하는 순례자처럼 느껴졌다.
몇 주 전 마셨던 물이 내 몸을 떠나 다시 강으로, 강에서 바다로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혹은 그 물이 하늘로 올라가 구름이 되어 지금 이 창문을 두드리고 있을지도. 이 세계에서 물은 끊임없이 순환하며, 사람들과 만난다. 우리 몸속을 지나가며 우리의 이야기를 흡수하고, 땅에 스며들어 흙의 역사를 기억한다. 물이 정말 기억이 없을까?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건 아닐까?
할머니의 집에 가면 항상 같은 맛의 된장국이 나왔다. 그 맛을 내는 물은 한결같이 오래된 우물에서 길어온 것이다. 할머니는 “이 물이 참 좋아. 된장 맛을 더 깊게 해줘.“라고 하셨다. 그 우물물은 아마도 오래전부터 이곳에 있었을 것이다. 할머니가 어린 시절 물을 길어 올렸을 때도, 그보다 더 먼 과거에도 이 물은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그 물이 할머니의 손맛을 알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기억이 없다는 말은 어쩌면 우리가 그 기억을 읽어낼 방법을 모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과학은 물이 분자 수준에서 기억을 남길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물이 만났던 곳들, 흘러갔던 길들, 스쳐갔던 사람들의 손길과 목소리를 어디에선가 간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삶에 다시 스며들지 않을까?
오늘 나는 물 한 잔을 마셨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마신 이 물은 아마도 수백 년 전 누군가의 손을 적셨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내가 태어나기 전 이 땅의 숲을 적셨던 비일지도. 물의 기억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
물은 흐르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남아 세상을 잇는다. 우리가 물을 마실 때, 그저 갈증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이야기를 마시는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