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을 타면 익숙한 풍경이 펼쳐진다. 무표정한 얼굴, 스쳐 지나가는 광고판, 그리고 가끔씩 들려오는 기계음.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내가 앉은 자리 맞은편, 창가 쪽에 앉은 사람은 다른 세계에 있는 듯 보였다. 그는 작은 수첩을 펼쳐 놓고 뭔가를 그리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종이에 고정되어 있었고, 손끝은 숨도 쉬지 않는 듯 정확하게 움직였다.
호기심이 일어났다. 대체 무엇을 그리고 있는 걸까? 그의 손은 지하철의 흔들림에도 불구하고 매끄럽게 움직였다. 사람들의 시선은 그를 스쳐 지나갔지만, 나는 그가 그리는 세계에 매료되었다.
몇 정거장이 지나자 그는 수첩을 잠시 닫고 눈을 들어 내 쪽을 바라봤다. 순간, 나는 피하지 않고 그의 눈을 마주쳤다. 그의 얼굴은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 눈빛은 달랐다. 무언가를 창조해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눈빛이었다.
그는 내가 묻기도 전에 수첩을 내밀었다. 수첩 속에는 지하철 안 풍경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내가 지금 앉아 있는 이 지하철과는 달랐다. 각 사람의 얼굴에는 표정이 더해져 있었고, 광고판에는 낙서가 섞여 있었다. 누군가는 책 속에 들어가 있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창문 밖 하늘로 날아가고 있었다.
“이건 당신입니다.”
그가 내게 보여준 그림 속, 나는 상상도 못한 모습이었다. 내가 그린 것이 아닌데도 나였다. 그는 내 얼굴을 보고 내 안에 있는 무엇인가를 알아챈 듯했다. 그 순간, 나는 그가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그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창조하는 예술가였다.
다음 정거장에서 그는 일어나 조용히 내렸다. 그의 자리는 텅 비었지만, 그가 남긴 세계는 나에게 깊은 흔적을 남겼다. 그날 이후로 나는 지하철에서 사람들을 더 유심히 보게 되었다. 그들 각자의 이야기, 표정, 그리고 그 뒤에 숨겨진 세계를 상상하며.
예술가는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그는 단지, 우리가 지나치기 쉬운 평범한 일상에서 특별함을 발견하는 사람일 뿐이다. 그리고 그날 나는, 그 익명의 예술가 덕분에 나 자신을 다시 발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