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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월 Dec 02. 2024

한밤중에 서점에서


늦은 밤, 서울의 어느 구석진 골목길에 자리한 작은 서점이 있다. 이곳은 낮에는 평범한 독립 서점처럼 보이지만, 자정이 되면 비밀스럽게 문을 연다. 손님은 책의 냄새를 맡고 찾아오는 몇 안 되는 사람들뿐이다. 이곳에 처음 온 사람들은 대부분 이 서점의 규칙에 당황한다. 책은 살 수도, 빌릴 수도 없고, 단지 읽을 수만 있다. 그리고 한 가지 조건이 있다. 당신이 선택한 책은 무조건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읽어야 한다. 한 페이지라도 건너뛰면 서점의 주인은 말없이 당신의 앞에서 책을 닫아버린다.


어느 날, 나는 친구의 소개로 이 서점을 찾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느껴지는 차분한 공기와 낡은 종이 냄새가 묘하게 마음을 안정시켰다. 서가에 꽂힌 책들은 모두 제목이 없는 빈 표지로 덮여 있었다. 주인은 내게 고개를 끄덕이며 한 마디만 했다.


“책은 당신을 고릅니다.”


나는 우연히 손이 닿은 책 한 권을 꺼냈다. 제목도 없고, 작가의 이름도 없었다. 그저 표지가 따뜻한 감촉을 가지고 있었다. 책장을 넘기자 첫 문장이 나를 붙잡았다.


“우리는 모두 읽혀지는 존재다.”


읽는 동안 나는 점점 책에 빠져들었다. 이야기의 배경은 낯설지 않았다. 마치 나의 삶 한 조각을 뜯어낸 것처럼 익숙했다. 책 속의 주인공은 내 어린 시절 친구를 떠올리게 했고, 그의 실수와 후회는 내 지난 선택들을 상기시켰다. 이상한 점은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그 내용이 나의 기억과 점점 더 일치했다는 것이다. 마지막 장에 다다랐을 때, 나는 충격으로 몸이 얼어붙었다. 책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쓰여 있었다.


“당신은 이미 선택했다. 이제 당신 차례다.”


책을 덮는 순간, 서점 주인이 조용히 다가와 말했다.

“그 책을 읽었다면 이제 당신이 여기에 한 권을 두어야 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요.”


나는 멍한 상태로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지금, 내 책상 위에 놓인 빈 공책을 바라본다. 이곳에 어떤 이야기를 남겨야 할까? 내 과거일까,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일까? 아니면 이 서점에서의 경험을 써야 할까?


이 서점은 단순히 책을 읽는 곳이 아니다. 이곳은 당신의 이야기를, 당신의 선택을 기록하는 곳이다. 그리고 나 역시 나만의 책을 남길 준비를 해야 한다.


밤이 깊어갈수록 나는 펜을 들어 첫 문장을 적는다.

“당신은 이 이야기를 읽고 무엇을 느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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