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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쇼 Mar 24. 2020

비긴어게인 , 꼬메르시우 광장

그날의 바다는 퍽 다정했었지


풀파워 히터 덕분에 광란의 야간 버스 안에서 까무룩 잠든 미쇼 씨. 버스 속도가 줄어들며 크게 회전을 한 덕분에 잠에서 깨고 보니 리스본으로 진입한 후였다. 새벽 5시 50분, 우리의 캡틴은 내부 전등을 밝게 켜며 우렁찬 성악가 발성으로 ‘리스보아! 리스보아 세테 리오스, 나이스 드라이브!!’라 외치며 박수를 쳤다. 네, 좋은 운전이었어요. 짝짝짝. 버스에서 내리며 캡틴에게 ‘오브리가두(Obriado – 고맙습니다)’라고 첫 포르투갈어를 뱉어보았다.


대차게 기지개를 켠다. 하품을 하고 공기를 깊게 들이마신다. 포르투갈이구나, 리스본이구나!! 하지만 오들오들, 차다. 춥다. 바지 위에 츄리닝 바지를 한 겹 더 입으며 둘러보니 대합실은 아직 열리지 않았고 버스 앞 탑승 대기 좌석 몇 개에 방금 같이 내린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대중교통은 6시 30분쯤 첫 운행을 시작한다고 했으니 터미널에서 버텨보기로 한다. 그때 눈에 들어온 중년 여성이 있었다. 그녀는 우리의 캡틴에게 다가가 이름을 불렀다. 그는 그녀를 덥석 부둥켜안았다. 고된 운전을 마치고 돌아온 남편을 마중 나온 부인이었다.

그러고 보니 A, 나의 그대는 잘 지내고 있는가?


리스본 버스 터미널. Lisboa Sete Rios.



스마트폰 전원을 켠다. 배터리 잔량은 18프로 남짓. 모든 백그라운드 기능을 차단해도 1분에 1프로씩 사라져 가는 남루한 배터리는 나의 심장을 쫀쫀하게 만들었다. 어쨌든 목표는 Rossio(호시우) 기차역 앞 광장에 도착하는 것. 때마침 메트로를 향해 가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여 조용히 그들을 뒤따랐다. 도시 외곽이라 그런지 6시 30분이 다 됐는데도 새카만 거리는 가로등이 있어도 무서웠다. 버스터미널부터 뛰듯이 3분 정도를 걸어 메트로 Jardim Zoologico(동물원) 역에 도착했다. 굉장히 환하고 깨끗했다. 미리 검색해둔 24시간 대중교통 이용권인 Viva Viagem(비바 비아젱)을 발권하고 무사히 메트로 탑승! 호시우 광장과 연결된 Restauradores (헤스타우라도레스) 역에서 내려 출구로 나오니 이제 해돋이가 시작되고 있었다. 


바로 앞 호시우 광장엔 분주한 비둘기 떼와 출근하는 사람들, 캐리어를 끌고 기차역으로 뛰어가는 사람들이 보였는데 꼭 용산역 같았다. 그리고 막 영업을 개시한 카페테리아들도 눈에 띄었다. 어디가 좋을까 쓱 둘러보는데 익숙한 초록색의 간판이 똬악- 스타벅스였다. 그래 용산역 앞에도 스타벅스가 많지. 따뜻한 두유 라떼를 마시며 스마트폰과 태블릿이 충전될 사이 다음 할 일들을 계획했다. 


1. 오전 10시, 꼬메르시우(Comercio) 광장 이동 – 도보 10분

2. 관광안내소에서 리스보아 카드 (48시간) 구매

3. 트램 타고 Belem(벨렝) 지구 하차. 에그타르트 흡입.

4. 숙소 입실


1, 2, 3번은 큰일도 아니었다. 호시우 광장에서 직진으로 쭉 내려가면 꼬메르시우 광장(Praca do Comercio)이고 광장 한 편에 커다란 ‘i’ 또는 ‘t’ 간판을 찾으면 관광안내소였으니까. 나는 관광안내소에서 내일과 모레 사용할 리스보아 카드(리스본 교통 + 관광지 입장권)를 구입하고 작은 지도를 받았다. 덧붙여 트램 노선과 주요 정류장, 숙소로 가는 버스, 추천 에그타르트 집까지 상냥하고 친절한 안내를 받았다. 


꼬메르시우 광장의 아치. Praca do Comercio.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나니 긴장도 풀리고, 이제야 꼬메르시우 광장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대항해 시대를 향해 나아간 드넓은 북대서양에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웅장한 동상과 아치형 건축물이 멋져 보였다. 햇볕을 밭아 더욱 노오랗게 빛나는 건물들도 예뻤다. 동유럽 노부부 관광객들도 눈에 띄었다. 새하얀 머리카락만큼 느리게 걷지만 다정히 맞잡은 손이 참 따뜻하겠다고 느껴질 때 또 생각나는 A, 그대 잘 있는가?


광장을 관통해 작은 도로를 건너면 바다로 이어지는 선착장이 나온다. 유럽의 청소년들은 그룹을 지어 수학여행을 다닌다더니 이 아이들일까? 이들은 바다에 뛰어드는 시늉을 번갈아 하고 깔깔거리며 기념사진을 찍는데 여념이 없다. 물이 너무나 무서운 미쇼 씨는 경사진 선착장 어귀에 앉아 바다와 아이들을 바라 볼뿐이다. ‘가만있어봐, 여기가 거긴 가?’ 자우림이 ‘비긴어게인 2’에서 라이브를 했던 리스본의 바닷가 말이다. 슝슝 고개를 돌려 살펴보니 여기가 맞네! 같은 횡단보도를 건너 같은 광장을 걷고 자리한 곳이었다.


꼬메르시우 광장 앞 선착장.



자우림과 나의 관계는 ‘뮤지션과 성공한 덕후’로 설명할 수 있겠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자우림의 콘서트를 보러 대학로를 다녔다. 대학에 입학한 99년부터 다음 카페 ‘자우림 매니아’를 운영했다. 공식 팬클럽을 제외하면 가장 활발했던 팬 동호회였다. 자연스레 자우림 멤버들과 교류를 하게 되었고 이후 음반사, 음악포털 사이트에서 일을 하다가 2010년 당시 자우림의 소속사인 ‘사운드홀릭’에 정식 입사하며, 어린 팬에서 비즈니스를 함께하는 성공한 덕후로 거듭난 것이다. 새 음반이 나왔을 때 스태프 이름에서 내 이름을 발견한 동호회 친구들에게 오랜만에 연락을 받았다. 특히 부산 친구의 말이 기억난다. “갸가 갸가?”. 응 나야 ㅎㅎ. 알고 지내는 친한 사람이 아니라 그들의 음악과 공연을 서포트하고, 투어를 다니는 건 엄청난 경험이자 행운이었다. 


자우림의 음악을 좋아하는 첫 번째 이유는 밴드 음악이라는 것. 두 번째는 노랫말에 있다. 나에게 있어 ‘밴드(Band)’란 여러 사람(=악기)이 공통된 메시지를 음악으로 전달하는 집단이다. 그 수단으로 록, 재즈, 인디-댄스, 알앤비 등의 장르가 따르는 거고. 결국 중요한 알맹이가 ‘메시지’인 것이다. 그리고 메시지는 대부분 보컬을 통해 ‘노랫말’로 전달된다. 내 질풍노도의 시기를 함께 해준 자우림의 노랫말은 언제나 시적으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혹자는 자의식 과잉이라며 깎아내렸지만 나에겐 늘 와 닿았고,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늘 아끼는 음악이며 동지이다.


꼬메르시우 광장의 동상



이 널따란 리스본의 꼬메르시우 광장 앞바다에서, 작은 해변도시 카스카이스의 밤거리에서, 해변 전망대에서 윤아 언니는 노래하고 선규 옹은 연주했다. ‘스물다섯, 스물하나’, ‘샤이닝’, ‘Going Home’, ‘이런데서 주무시면 얼어 죽어요’, ‘봄날은 간다’ 등을. 그저 팬으로 열심히 좋아하며 동호회 친구들과 공연장을 신나게 뛰어다니던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내가 또렷이 떠오른다. 강과 바다가 합쳐져 흐르는 이 바다를 보며 나직하게 흥얼흥얼 가사를 뱉어본다.


“그날의 바다는 퍽 다정했었지. 아직도 나의 손에 잡힐 듯 그런 듯해”


불러볼수록 정말 주옥같네. 그날의 친구들아, 다들 잘 지내지? 


자연스레 스마트폰 음악 어플을 열어 비긴어게인의 라이브 버전을 몇 곡 틀어본다. ‘샤이닝’이 연주된다. 선규 옹의 어쿠스틱 기타에 윤아 언니의 목소리가 밤의 공기를 오롯이 품고 있다. 곡 후반부, 윤아 언니가 울컥하는 게 느껴진다. 나도 덩달아 울컥한다. 떠오르는 얼굴이 있어서다. 사운드홀릭에서 함께 일하던 Y 매니저다. 그녀는 자우림을 오랫동안 담당한 의리의 아이콘이었다.  내가 먼저 퇴사를 한 이후엔 공연 스케줄이 겹칠 때 현장에서 인사를 나눴고, 퇴사 이후에도 자우림 섭외 전화가 내게 오면 Y에게 연락처나 사항을 알려주려 통화를 했었다. 그래, 과거형이다. 그는 몇 년 전 너무나 외롭게 세상을 떠났다. 당시 나는 독립해 1인 음반사를 운영하며 나만 힘든 줄 알고 있었다. 우리 민효, 글래머 지선과 넷이 몇요일에 밥 먹자고 딱 약속할 걸. 그에게 어떤 힘도 되어주지 못한 채 전화를 끊었다. 


“지금이 아닌 언젠가 여기가 아닌 어딘가 나를 받아줄 그곳이 있을까..”


샤이닝이, 노래가 끝난다. 

그리고 나도 비로소 너를 보낸다. 

영난아. 안녕,



BGM ㅣ 자우림 - 스물다섯, 스물하나

https://youtu.be/KAiK_1h1DDg?t=8m11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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