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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쇼 Mar 26. 2020

언덕의 도시 리스본 대탐험

좀비처럼 되살아나는 도보여행의 매력

청춘은 여행이다. 찢어진 주머니에 두 손을 내리꽂은 채 그저 길을 떠나도 좋은 것이다.

- 체 게바라


어제는 30시간 만에 숙소에 입실했다. 깨끗이 씻고 빨래를 돌리고 집 앞 대형슈퍼에서 6개 세트인 에그타르트와 식료품을 수급했다. 해가 쨍쨍한 오후 7시쯤 넉 다운, 12시간 숙면을 취한 뒤 기상한 미쇼 씨. 새롭고 개운한 리스본의 아침을 맞이했다! 오늘은 이 도시의 명소와 골목들을 대탐험 하는 날. 그중에서도 트램과 서점 여행이 가장 기대된다. 관광객이 몰리기 전에 트램의 종착지이자 출발점인 마르팅 모니스(Martim Moniz)로 힘차게 걸어 내려가는 중이다.

언덕의 도시 리스본, 골목길 풍경



숙소는 호시우 광장에서 뒤편으로 올라가면 금방이었지만 상상 초월 메가톤급 비탈이었다. 알려진 바와 같이 리스본은 ‘언덕의 도시’가 아니던가! 숙소로 올 때는 집 앞까지 오는 버스를 타고, 시내로 갈 땐 걸어 내려가는 게 이득인 재미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관광지와 교통 중심지를 살짝 벗어난 그 비탈길들에서 현지 서민들의 생활도 엿볼 수 있었다. 게다가 그 길에 아시아 마트가 3개나 있다!! 부지런한 아시아 마트의 주인들은 이른 아침부터 상점을 열었다. 내려오며 하나씩, 세 곳을 다 들러보았는데 0.1 유로라도 저렴하고 상품 정리가 비교적 나은 곳이 있어 짜파게티를 구입했다.

* Chen, Wong 마트를 추천함. 미쇼 씨는 Chen을 두 번 이용하였음.

28번 트램 출발 지점. 마르팅 모니스 (Martim Moniz)



대망의 28번 트램(노면전차)이 노란색 차체를 빛내며 내 앞으로 왔다. 이른 아침부터 서두른 보람이 있었는지 창가 자리 겥! 낡은 나무 트램이 삐거덕삐거덕 힘겨워하는 소리가 나지만 소박하고 작고 귀여웠다. 역시 노인 관광객들은 더욱 신나 하는 모습이다. 마르팅 모니스에서 출발 해 반대편 종점인 공동묘지까지 쭉 가보기로 한다. 다시 돌아오는 길에는 내리고 싶은 곳을 점찍어두면서 작은 창틀 사이로 보이는 바깥 풍경에 푹 빠져든다. 마을버스처럼 좁다란 길을 기가 막히게 오르기도 하고, 마주 오는 트램과 인사를 나누기도 한다. 내가 트램 밖 풍경을 사진으로 담을 때, 마주 보이는 바깥의 사람들도 트램과 나를 함께 담는다.

트램 속의 트램. 마주오는 트램.



종점 찍고 되돌아오는 길, 그라사 전망대를 가기 위해 적당한 지점에 내렸다. 그리고 108 번뇌가 다 뭐냐 아주 그냥 계단 지옥을 오르고 올라 헉헉 거리며 그라사 전망대에 도착했다. 그런데 ‘아...,’ 풍경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죽겠다고 몸부림치던 발목도 여유를 찾는다. 어제 들렀던 포르타스 두 솔 전망대에 비하면 인구밀도가 현저히 낮아 한적하다 느껴질 정도. 광장의 나무와 노천카페가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한몫했다. 여기서 음료를 하나 마실까 하다가, 트램을 타고 올 때 봐 두었던 카페가 생각나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어쨌든 더 올라가진 않고 내려갈 일만 남았을 테니까!

그라사 전망대. Miradouro da Graça.



트램이 아슬아슬 지나는 곳에 위치한 ‘코펜하겐 커피랩’. 리스본에 있는 코펜하겐이라니, 비탈에 지어진 카페라 입구는 2층이고 실내는 1층인 구조도 재미있고 신박했다. 그리고 커피만 마셔보려 했는데, 데니쉬 롤이 딱! 빵님이 왜 이렇게 탐스럽게 보이는 거죠? 그래, 핸드폰 충전도 하고, 화장실도 가고,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을 것 같군. 자기 합리화에 성공한 미쇼씨는 결국 폭풍 흡입 성공!

코펜하겐 커피랩 알파마 지점. Copenhagen Coffee Lab.



카페에서 그렇게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조금 내려가니 리스본 대성당이었다. 18세기 리스본 대지진에서도 살아남은 유서 깊은 곳이다. 옛 성당에 들어서면 늘 벽에 매립된 파이프 오르간부터 눈에 들어온다. 이곳도 굉장히 멋스럽다. 교황이 사용하던 물품들이 전시된 곳도 있었고, 아름다운 리스본의 푸른 타일 아줄레주 (Azulejo)로 꾸며진 벽도 있었다. 천정이 높은 성당답게 자연 채광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는 스테인드글라스의 장미창이 참 예뻤다. 그 아래에 성모 마리아상도 너무나 인자해 보였다. 나 자신과 이 여행, 그리고 가족 모두의 안녕을 위해 초를 하나 켜며 기도를 하는데 꼬르륵꼬르륵, 성당에서 너무 노골적으로 배고픈 소리를 내는구나. 밥을 먹자!

리스본 대성당. Sé Catedral de Lisboa.



정한 곳이 없기에 구글맵을 켜고 인근에 별점이 높은 곳을 찾아가기로 했다. 그중 한 곳이 꽤 마음에 들었다. 일단 간판이 없었다. 문에 영업시간과 오늘의 메뉴만 붙어 있고, 아시아 사람 한 명 없이 현지인들로 북적이는 듯했다. 용기 내서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안경을 쓴 주인아저씨가 인사를 건넨다. 1명이라고 손가락을 들어 표시하고 서있자 벽 쪽 작은 테이블로 안내를 해주며 메뉴판을 놓고 가신다. 내가 미쳤는지 용감하게 샹그리아를 시켰다. 왜냐하면 ‘씨푸드 라이스 수프’ 즉 해물밥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리스본에서 해물밥을 먹으라고 추천도 받았는데, 유명한 집들을 검색해본 결과 1인분 불가, 엄청 대기, 불친절, 가격 대비 비쌈 옵션을 줄줄 달고 있어서 포기한 찰나였다. 그런데 이곳은 포르투갈 가정식을 판매하는 곳이었고 벽에 장식된 사진을 보니 2대 사장님의 남편이 나를 맞이해준 분으로 추정되었다. 그리고 내 앞에 놓인 대박적 음식 해물밥. 맵지 않은 짬뽕밥이랄까? 엄마 생각이 날만큼 속이 시원~했다. 포르투갈 특유의 그린 화이트 와인으로 만든 샹그리아는 말해 뭐해, 냠냠. 가성비 끝판왕이 여기 있구나!!

간판 없는 포르투갈 가정식 식당, 산타 리타. Santa Rita.



리스보아 카드는 리스본의 주요 관광지 무료 또는 할인 입장과 함께 메트로, 버스, 트램 등 교통수단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내가 개시한 시간으로부터 48시간 이용 가능하므로 (72시간권도 있음) 많이 돌아다닐수록 이득. 하지만 이미 8 천보 이상을 걸었다. 그럼에도 고장 난 두 다리가 씩씩한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중간중간 잘 먹고 쉬어서 그런가? 리스본 올드타운의 소박하고 아기자기한 모습들이 자꾸만 설레게 하는구먼, 허허. 마음은 아직 청춘인가 보다. 배도 채우고 다리도 힘을 내주고 있으니 그저 주머니에 손을 딱 넣고 다시 길을 나설 뿐이다. 왜냐고? 아직 1시밖에 안 됐어요 >.<


이번엔 피게이라 광장으로 간다. 어제 시간을 보냈던 호시우 역 근처다. 이곳에서 트램 15번을 타고 벨렝(Belem) 지역으로 간다. 세계유산으로 유명한 제로니무스 수도원 (Mosteiro dos Jerónimos)에 가장 먼저 들른다. 땡볕 아래 입장 대기줄이 무척이나 길지만, 리스보아 카드 소지자라면 무조건 줄 설게 아니라 앞쪽으로 가서 확인하면 별도로 입장하는 줄이 있다. 이미 리스보아 카드를 구매할 때 수도원 입장권을 구매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 고로 나는 즉시 입장할 수 있었다. 바깥의 대기줄에 비하면 내부의 인구밀도는 적었다. 수도원에 걸맞게 고요했다. <해리포터>의 작가 조앤 롤링이 포르투갈에서 영어교사로 일하면서 영감을 얻은 곳이 몇 군데 있는데 이 수도원 역시 눈여겨보았다는 카더라를 접한 적이 있다. 수도원 내부의 회랑, 계단들은 작품 속 기숙사의 모습들과 참 많이 닮았다. 회랑 안쪽 잔디밭은 삼총사가 뛰어다니던 교정과도 비슷했다. 빗자루 하나 있으면 살포시 타보고 싶었을 만큼. ^^*

제로니무스 수도원. Mosteiro dos Jerónimos.



이 수도원에서 처음 탄생한 에그타르트 ‘나따(Nata)’의 비법을 전수받아 나따의 성지가 된 ‘벨렝 빵집 (파스테이스 드 벨렝, Pastéis de Belém)’ 앞에 섰을 땐 멀리서부터 풍겨오는 고소한 빵 냄새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흑설탕 색처럼 그을려진 몰캉파삭촉촉따뜻한 나따를 한 가득 입에 물자 ‘흐홓어~’ 해괴한 콧소리를 자동 발사하는 미쇼 씨. 괜찮아, 아무도 못 들었을 거야. (=ㅂ=)//

벨렝 빵집의 원조 에그타르트, 나따. Pastéis de Belém.



당분을 충전했으니 또 길을 떠나야지. 좀비 파워 퐈이팅! 수도원을 건너면 떼주(Tejo) 강변 해변 산책로를 만난다. 한참을 걷다 오렌지 모양의 가판대에 잠시 멈춰 눈앞에서 착즙 하는 오렌지 주스를 한 잔 마셨다. 전동 킥보드, 자전거로 시티투어 하는 사람들이 다 여기 있었다. 뙤약볕에 10여 분을 걷고 있자니 그들이 참 부러웠다. 드디어 저 앞에 동대문 DDP와 비슷한 느낌의 미래지향적 건물이 보인다. 건축·테크놀로지 뮤지엄인 MAAT였다. 먼저 경사진 오르막길로 이어진 전망대에 오른다. 그야말로 가슴까지 뻥~ 뚫리는 시원한 뷰였다. 강 건너편엔 그 유명한 ‘구세주 그리스도상’이 보이고 왼쪽엔 4월 25일 다리도 보였다. 사진만 잘 찍는다면 명작이 나올법한 전망이었다. MAAT 내부 전시는 리스보아 카드로 할인받아 입장했다. 현대미술, 다원예술 등을 감상하며 몸에 바싹 오른 열기를 식혔다. 이제 리스본을 떠나도 여한이 없..., 지 않아! 오늘의 마지막 하이라이트 LX Factory가 나를 부른다!!

MAAT 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경. 명작 사진에 도저-언!



19세기 떼주 강변 알칸타라(Alcantara) 일대에 대형 공장들이 들어섰지만 점차 잊혀지고, 방치되어 폐허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대략 10년 전부터 리스본의 디자이너들과 아티스트, 크리에이터들이 이곳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오래된 공장 건물의 외관과 골조는 살리되 자신들의 아이덴티티를 보여줄 수 있는 공방과 작업실을 만들고, 샵을 런칭하며 리스본의 또 다른 매력을 선보이는 핫스팟이 된 거다. 우리네 성수동, 힙지로, 문래동 정도가 비슷한 대상이긴 한데 LX팩토리는 타운 형태로 밀집되어있다. 갤러리, 편집샵, 초콜릿 가게인 줄 알았던 정어리 통조림샵(정어리는 리스본의 상징이기도 하다), 크고 작은 레스토랑, 유명한 햄버거집, 수제 맥주집, 기념품점, 코워킹 스페이스, 호스텔, 그리고 가장 보고 싶었던 서점 ‘레르 데바가르 (Ler Devagar)’가 있었다. “책의 뇌에 들어온 듯 기막힌 서점”이었다. 입구부터 2층, 3층 어마 무시한 서적의 양과 중고 음반들, 오래된 대형 인쇄기 사이로 꾸며진 공간들이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구성되어있었다. 인생 사진 찍기에도 그만인 곳이었다.

책의 뇌 속으로 들어온 듯한 서점 레르 데바가르. Ler Devagar.



혼자 서점 내부 사진을 찍고 있는데, 역시 혼자 여행 온 서양인이 자신의 사진을 하나 찍어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그녀도 내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한다. 오케이. 우리는 멋쩍지만 서로를 응원하는 마음을 담아 인생 샷을 찍어주려 애썼다. 결과물은 서로 대만족. 그래서 서점 밖에서도 몇 장 더 찍었다.

인생 샷 건지기 놀이. LX Factory.



지금 LX팩토리를 거니는 사람 중에 내가 가장 나이가 많은 건 아닐까? 관광객보다는 동네의 젊은, 멋쟁이들이 모여 있었다. 요목조목 상점 사이를 거닐다 다리를 쉬어주기 위해 펍에 들렀다. 바로 앞에서 버스킹 공연이 열렸기 때문이다. 앳된 보컬인데 내가 스물 시절 듣던 모던록 넘버들을 줄줄 이어 부르는 게 아닌가. 몇 곡 더 들으며 목을 축이러 무알콜 음료를 사러 갔다가 리스본 수제 맥주를 들고 나왔다. 왜죠? 250ml를 팔아서 망정이지. 다행히 머리가 아프거나 속이 뒤집어지진 않았다.

* 앞선 글들에서 말했듯 미쇼씨는 건강상의 이유로 금주중 ㅠ 

크래프트 비어 전문점, un!co on tap. LX Factory.



이제 오후 7시. 떼주 강변에 노을이 지려 한다. 내일도 이른 아침부터 움직여야 하기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 LX팩토리를 등지고 걷는다. 조금은 지친 걸음. 왁자한 청춘들의 웃음소리도 점점 멀어지더니 일순간 조용하다. 마치 투명한 벽을 거쳐 현실세계로 순간 이동한 것처럼. 그래도 뒤돌아보진 않으리라. 지나간 날들의 화려함만큼 소중한 내일도 기다리고 있으니까. 버스 정류장에 다다르니 숙소까지 한 번에 가는 760번 버스가 있었다. 럭키~


보람찬 하루의 마무리는 짜파게티로 당첨, 내가 조선의 짜파게티 요리사다!

LX Factory @ Lisb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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