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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쇼 May 08. 2020

리스본 삼라만상

꽃이여 피거라

여름과 가을은 글자 그대로 일에 ‘치여’ 보냈다. 7월과 8월은 매 주말이 뮤직 페스티벌 특히 ‘밴드 음악’이 주목받는 락 페스티벌이 주구장창 열리는 극성수기! 9월은 단독 콘서트와 각종 행사가, 10월엔 대학 축제와 함께 역시 매 주말 전국 각지에서 재즈, 어쿠스틱, 일렉트로닉 등의 뮤직 페스티벌이 열린다. 고로 남의 가족 행복을 위해 내 가족은 잊어버린 채 뙤약볕과 치열하게 싸워가며 기미와 주근깨를 양산했을 뿐이다. 일하다 백스테이지에서 더위 먹고 쓰러진 적도 여러 번 있었고 각종 장비에 다쳐 여기저기 꿰매러 응급실도 갔더랬다. ㅠ 역시 공연은 내 돈 내고 관람만 하는 게 최고 >.<


그런데 올해는 비로소 완전히 업계를 떠나 자유의 몸(?)으로 유럽의 도시 리스본에서 여름의 끝자락과 가을을 맞이하고 있다. 리스본은 보면 볼수록 신기하다. 실로 엄청난 관광지임에는 분명하지만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곳이다. 굽이굽이 이어진 언덕과 작은 골목들, 옛 정취 물씬 풍기는 나무로 된 노면전차 ‘트램’, 벽마다 반짝이는 특유의 푸른 타일 ‘아줄레루’, 고소하고 달콤하게 풍겨오는 에그타르트 ‘나따’의 냄새, 거리 전면에 깔려있는 특유의 모자이크 돌바닥, 집집마다 내 걸려 흩날리는 빨래와 꽃 장식들. 바라만 봐도 살아있는 나의 로맨틱 심장에 꽃이 핀다. 응?? 익숙한 방금 한 문장은 한 편의 시 같은데.



맞네. 좀 전에 무심하게 흘려들었던 밴드 크라잉넛의 ‘양귀비’ 가사다. 3집 [하수연가]에 수록된 곡인데, 이 앨범엔 막강한 히트곡 ‘밤이 깊었네’도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팬들에겐 ‘양귀비’, ‘지독한 노래’,  ‘Honey’,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 등 숨어있는 보석 같은 곡이 많은 명반으로 기록된다. 3집 발매 후 크라잉넛이 출연한 독립영화 [이소룡을 찾아랏!]도 개봉하며 극장에서 영화+공연 쇼케이스가 진행되기도 했다. 예매 전쟁에서 승리한 나와 동호회 친구들은 자우림 공연에서 정서를 함양하고 크라잉넛 공연에서 정신줄을 놓고 폭도가 되어 난리 부르스를 추곤 했다. 양귀비의 노래 가사 “꽃이여 피거라~”를 떼창하며.


나의 지랄 같은 염병할 인생에

삼라만상에 꼬이고 또 꼬였던

돌아오지 않는 청춘의 여름날

살아있는 나의 로맨틱 심장에

정신 차려보니 태평양 한복판

에라 모르겠다 멋지게 다이빙

꽃이여 피거라 태풍아 불거라

꽃이여 피거라 그대여 춤춰요


홍대 3대 명절 <경록절>의 창시자, ‘캡틴록’ 한경록이 작곡, 작사한 곡이다. 악동적인 이미지와는 다르게 사려 깊은 노랫말을 쓰는 편인데 서사보다는 현장 중심의 나열이 탁월한지라 멜로디와 합세하면 우주 저편의 명곡이 창시되곤 한다. 어쨌든 홍대를 노닐며 마주치는 캡틴록은 늘 책을 읽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은 영어교재를 들고 있기도.


리스본의 마지막 풍경을 눈에 가득 담기 위해 숙소를 나와 시내까지 내리막길을 경쾌하게 뛰듯이 내려온다. 이젠 크라잉넛의 ‘양귀비’ 한 곡만 반복 중. 락 음악에 맞춰 창작땐쓰 추기가 일상이던 내 청춘의 여름날, 홍대 거리에서 보낸 시간들이 떠오른다. 지금은 큰 건물들이 지어지며 지형이 바뀌었는데 20년 전의 홍대는 꽤 언덕이었다. 작은 골목과 모퉁이를 돌며 옷가게, 액세서리 상점, 미술학원, 뮤직바, 라이브 클럽, 하숙집들이 자리했었다. 크라잉넛과 레이지본 등의 정기 공연이 있었던 ‘드럭’, 인디밴드들의 성지 ‘블루데빌’, 와우산 길을 책임지던 복합 문화공간 ‘쌈지 싸운드 스페이스’, 걷고 싶은 거리 쪽에는 아예 없어진 떡볶이 골목도 있었다. 야심한 밤에도 여기가 홍대임을 느끼게 해주는 음반가게 ‘레코드 포럼’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늘 설레곤 했다. 음... 점점 “라떼는 말이야” 분위기가 나니 이쯤에서 멈추기로 하고. 어쨌든 홍대와 무대를 넘나들며 치열하게 보낸 나의 여름날들을 소환하게 하는 리스본의 거리에도 ‘시간’이 담겨있다. 호시우 광장을 지나 200년 이상의 문화를 품고 있음에도 여전한 핫플레이스인 시아두 지역, 꼬메르시우 광장까지 이어질 마지막 산책길엔 음악과 추억을 소환 해 더욱더 경쾌한 스텝을 착착 밟아본다.



# 여행의 묘미는 시장에서 꽃핀다.

피게이라(Figueira) 광장 앞에는 여러 버스가 정차한다. 숙소 앞에 가는 760번은 물론 공항버스도 있다. 다만 정류장이 광장 모퉁이를 둘러싸고 여러 곳이라 주의를 요한다. 버스 탑승까지 시간이 넉넉하게 남을 땐 정류장 바로 뒤에 있는 ‘바이샤 시장(Mercado da Baixa)’과 건너편 ‘피게이라 시장(Mercado da Figueira)’에 들러보길. 피게이라 시장은 규모가 아주 작지만 오래된 역사만큼 동네 주민들이 주로 이용한다. 그래서 식재료들을 주력으로 판매하는 곳이다.


바이샤 시장은 새로 정비된 곳답게 밝고 활기차다. 주전부리는 물론 한 끼 식사로 손색없는 메뉴들도 많다. 마드리드의 산미겔 시장, 바르셀로나의 보케리아 시장과 같은 성격을 띠고 있다. 스페인, 이탈리아와는 다르다는 포르투갈식 소시지와 생햄, 염장 대구를 활용한 다양한 바깔라우 요리들, 치즈, 샹그리아, 수제 맥주, 꿀 등을 맛볼 수 있었다.

바이샤 시장(좌) / 피게이라 시장(우)



# 로맨틱 심장엔 오래된 서점이 제격~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들이 리스본에 모여있다. 가는 날이 장날인지 골목 전체가 중고책 장이 선 날이었다. 자연스럽게 모퉁이를 꺾으니 그 유명한 베르트랑 서점(Livraria Bertrand)이다. 1732년 개업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서점이다. 최초는 아니겠으나 변함없이 한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엔 틀림없어 보였다. 몇 번의 내부 공사를 진행했다고 하지만 개점 시절의 원형이 잘 유지되어있었다. 벽 한쪽엔 기네스북 등재 인증서도 장식되어있다. 간판도 외부도 심하게 정갈해서 처음엔 여기가 맞나 싶었다. 내부엔 요즘 보기 드문 나무장으로 짜인 서가의 모습이 독특하며 아름다웠고, 아이들과 애어른이 놀 공간도 충분했다. 관광객으로 가득할까 했는데 책을 아끼는 독자들로 가득했다. 가장 안쪽엔 카페가 있는데, 벽에 페르난두 페소아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포르투갈의 대표시인 페소아 역시 이 서점의 단골손님이었다고. 그래서 ‘페소아 X 베르트랑’ 컨셉의 다회용 에코백을 하나 구입했다.

베르트랑 서점(Livraria Bertrand)


베르트랑 서점 옆 골목엔 1800년대에 문을 연 페린 서점(Librairie de A Ferin)이 있다. 더 고요하고 더 조용하다. 관광객은 없었다. 백발의 사장님이 눈웃음으로 마주해주실 뿐이다. 이 곳 역시 옛 가옥 특유의 동굴 구조로 되어있었다. 그래서 서가에 꽂힌 책에 손을 대면 책이 파르르 깨어날 것만 같은 혹은 밀서가 들어있는 암호를 발견할것만 같은 굉장히 굉장한 느낌을 받았다. 갤러리도 함께 운영하고 있어서인지 아트 서점으로 특화 된 분위기도 풍겼다. 독자와의 만남이나 싸인회 등 다양한 커뮤니티 활동을 하기에도 좋은 곳이었다.

베르트랑 서점이 광화문 교보문고와 같다면 페린 서점은 망원동에 있는 한강문고 같았다.

페린 서점(Librairie de A Rerin)




# 에라 모르겠다 에그타르트 폭풍 흡입!

베르트랑 서점과 함께 시아두 거리의 쌍두마차를 담당하는 카페 브라질레이라(Cafe a Brasileira)는 1905년에 개점한 리스본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이며 포르투갈 대표 간식이자 나를 이곳에 이끈 또 하나의 이유인 ‘나따(Nata, 에그타르트)’ 맛집 명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높은 악명도 있는터라 선뜻 들어가기보다는 밖에서 먼저 분위기를 훑어보기로 했다. 오! 내부 만석. 테라스도 만석. 킁킁. 냄새로 커피의 향과 고소한 나따의 풍미만 한 김 쐬고 이동하기로 한다. 포기하면 빠르니까. 그리고 나에겐 리스본 관광 안내센터의 직원이 추천해준 또 하나의 나따 맛집이 남아있으니까!


바로 만테가리아(Mateigaria)다.

Manteiga는 ‘버터’라는 뜻이다. 스페인어로 ‘버터’를 외워둔 탓에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상점의 이름은 그냥 ‘버터 가게’ 정도가 되는 걸 텐데 에그타르트 맛집일까? 일단 시아두 거리, 카페 브라질레이라와 아주 가까우니 직접 확인해보기로 하자. 만테가리아는 건너편 대각선, 28번 트램이 지나가는 곳에 위치해있으니까. 모퉁이에 사람들이 촘촘히 모여 연신 손에 들고 있는 걸 입으로 가져간다. 저기로구나! 맛집이구나!! 순간 흥분한 나는 음악에 맞춰 겅중겅중 큰 움직임을 취하며 길을 건넜다. 맛있는 빵님이 익어가는 향기가 유혹적이다. 상점은 매우 작았고 사람들로 가득했다. 앉아서 먹을 수 있는 자리가 있긴 한데 돌파가 어렵다. 순간 타르트 한 판이 새로 나와 옮겨지고 있었다. 일단 한 개만 먹어보자. “나따 우노!”를 외치며 5유로를 건넸다. 그리고 내 손에 돌아온 4유로와 나따. 이 얼마나 성스러운가!? 뜨거운 커스터드 크림을 흘리면 큰일 나니까 스읍~하고 숨을 들이쉬며 반을 깨물었다. “데스티니—— 유 아 마이 데스~티니이이——” 가 머릿속에 울려 퍼진다. 다시 들어가 4개를 포장해서 나왔다. 벨렝 지구의 제로니무스 수도원 관람을 하며 ‘파스테이스 드 벨렝’에 들러 원형의 나따를 맛보길 추천하지만 시간이 모자라 그곳까지 못 가고 리스본 시내만 둘러봐야 한다면 단연코 만테가리아에서 나따의 첫 정을 만끽하시길 바란다.

만테가리아(Mateigaria)



# 손 흔드는 리스본의 야경.

더 걷고 싶지만 너무 늦게 혼자 돌아다니면 행여나 위험할까 봐(해가 지고 나니 의외로 거리에 사람이 확 줄었다.) 숙소로 돌아가자 생각하고 있는데, 불현듯 머릿속에 스치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리스본의 야경을 구경하는 일! 피게이라 광장으로 가야 버스정류장이었으므로 그 사이에 있는 산타주스타 엘리베이터(Elevador de Santa Justa)가 떠오른 것이다. 게다가 나는 리스보아 카드를 가지고 있으므로 오늘은 무료 이용할 수 있었다. 영업시간을 확인해보니 아직 25분 남았다. 달려—!! 급하게 계단을 헉헉 올라 맨 뒤에 줄을 섰다. 내 뒤로 5팀 정도가 더 왔을 즈음, 스탭이 와서 마감 공지를 했다. 그리고 탑승한 산타주스타 엘리베이터. 엄청나게 엄청난 골동품 상자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1902년 완공되었다고 한다. 완강 장치를 제외하면 모두 오래된 나무 구조의 엘리베이터였다. 삐거덕삐거덕 불안한 소리와 석유 기름 증기관 냄새를 뿜으며 아주 천천히 엘리베이터가 움직이자 이윽고 전망대에 다다랐다. 이마를 때리며 바람이 강하게 불어온다. 인근 루프탑 레스토랑들과 리스본의 길들이 눈에 들어왔다. 관광지의 건물들은 영업을 마치고 불이 꺼져 깜깜했다. 골목마다 피어나는 가로등 불빛들만이 나에게 잘 놀다가라고 손짓하듯 흔들렸다.

리스본의 밤 feat. 산타주스타 엘리베이터


피게이라 광장에서 숙소로 가는 760번을 타려고 기다리는데 10분을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는다. 구글맵을 보니 아직 버스가 끊어지진 않았다. 옆에 있던 외국인 언니가 현지인을 제치고 나에게 길을 물어본다. 왜죠?? 어쨌든 나보다 한 정거장 앞에서 내리면 되는 것 같았으므로 말 같지도 않은 말로 같은 버스를 타면 된다고 말했는데 그녀는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그녀가 내릴 때 역시 온몸으로 말하며 롸잇나우를 연발했다. 그녀는 활짝 핀 웃음으로 화답했다.


숙소에 도착해 꼼꼼하게 짐을 꾸렸다. 면세점에서 사야 할 것도 차분히 정했다. 혼자라 먹어보지 못한 리스본 전통의 체리+술 비슷한 ‘진자(Ginja)’와 정어리 통조림 ‘사르디나(Sardina)’는 집에 돌아갈 때까지 잘 살려둬서 A와 같이 먹어야지. 그리고 마드리드로 돌아가 리스본을 추억하기 위해 나따를 한 상자 사야지.

빈 공간 없이 뚱뚱하게 배를 불린 작은 가방을 다독였다.

아, 떠나고 싶지 않은 밤이다.


BGM ㅣ 크라잉넛 - 양귀비

https://youtu.be/0anRQ6DcFv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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