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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쇼 Aug 08. 2020

종이의 집과 아시안 뷔페

열심히 쓰겠습니다

결국 몸살이 났다. 서울을 떠나오기 전, 수술 후 20개월 추적 검사에서 이상세포나 전이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다고 의사 선생님이 말씀해주셨지만 이미 내 몸의 면역체계는 일반인들보다 한 두 단계 내려간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차곡차곡 걸음 수 늘이는 훈련을 한 덕에 이제 하루 1만 보 걷는 건 가뿐하다 (feat. 발바닥 힐링패치).


그래도 몸살이라고 마냥 누워있을 순 없으니 뜨신물 샤워를 마치고 근처 약국(Farmacia, 파르마씨아)에 가보자. 인터넷 강의에서 예씨 선생님께 배운 ‘나 아파’, ‘나 안 좋아’, ‘나 감기야’를 현지에서 바로 써먹을 수 있는 좋은 기회!! 단어장에 미리 조사해 둔 내 전형적인 증세에 관한 용어도 확보해 약국으로 향했다. (약국 몇 군데 다녀보니 관광지 인근 약사들은 영어가 유창한 편입니다.)


“ Hola Qué tal? ” 어서오세요

“ Hola, estoy resfriado. ” 네, 저 감기예요


약사님은 스페인어를 쭈르륵 쏟아내셨다. 당황했지만 눈치껏 증세에 관해 물어보는 거겠지 싶어 엉망진창 스페인어와 영단어를 섞어 판토마임에 가까운 연기까지 선보인 미쇼씨. (=ㅂ=)// 약사님은 웃으며 차근차근 증세를 되짚어 확인한 후 알맞은 약을 주셨다.


스페인에서 구매한 기침+두통 감기약들

* 구매한 약들은 기침 감기 전용. 오른쪽은 기침+두통 기능성 약. 모두 물에 타서 마셔요. *



오늘의 점심은 굉장히 굉장한 곳으로 간다. 간밤에 A에게 ‘내일은 아플 예정’이라고 톡을 보내 놨더니 그에 대한 답으로 아시안 뷔페 레스토랑 위치와 링크를 보내왔기 때문이다. 가격도 런치타임에 아주 합리적이라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다만 미쇼씨의 섭취량은 뷔페에 강한 타입은 아닌지라 ‘현명한 먹부림’을 펼쳐야 했다. 우선 가보면 알겠지! 라스벤타스 숙소에서 구글맵으로 도보 18분이라 하니 이제 15분 산책하듯 걸으면 나올 테다.


이름하여 [ WOK Garden ]. ‘웍’이란 단어에서 중식당의 향기가 물씬 풍겨온다. 뭐라도 좋으니 마음껏 잘 챙겨 먹고 빨리 나아야지. 짬뽕 국물은 없으려나? 웍가든은 오후 1시부터 손님을 받는데, 정확히 5분 빨리 도착했다. 내부를 보니 큼직큼직 모던한 인테리어가 돋보이는 전형적 뷔페식당이었다. 입구 바로 안쪽에 편하게 앉아 대기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고 중국계 커플 한 팀과 스페인 현지인 세 사람, 그리고 나까지 6명이 있었다. 런치타임엔 음료를 뺀 뷔페 가격이 11.50 유로. 그래 안에 뭐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다려! 정확히 1시가 되자 동양인 점원이 나왔다. 중국어를 기본으로 사용하지만 스페인어 그리고 영어도 사용할 수 있는 직원들이었다. 라틴계, 아프리카계 등 넓은 매장만큼 다양한 인종의 여러 점원들이 근무하고 있었다.


심장아 나대지 마!! 음식을 담기 전 뷔페 코너를 한 바퀴 둘러본다. 아. 여긴 해산물 전문 뷔페였구나. 대하, 갑오징어, 바지락, 맛조개, 각종 생선과 어패류가 싱싱한 자태를 뽐낸다. 먹고 싶은 걸 챙겨 그릴 존 1에 가져다주면 맛있게 익혀주는 게 압권이었다. 그릴 존 2에서는 스페인식 바비큐와 모르씨야(순대)가 나를 기다린다. 가벼운 수프, 볶음밥 두세 가지와 소∙닭∙돼지∙해산물 볶음과 튀김이 각각 있었고, 김밥∙초밥∙롤도 있었으며 회도 몇 종류 있었다. 그 밖의 샐러드와 과일, 면, 딤섬도 쫘-악 깔려있다. 음식을 조금씩 먹어본 결과 나의 1 점사는 그릴에 구운 갑오징어+가지+호박 콤보. 신선한 연어 회, 닭고기 볶음으로 결정되었다. 2시가 되어 갈 무렵엔 그 넓은 곳이 꽉 차 버렸고 현지인들 가운데서도 파견 근무 중인 일본인들이 꽤 눈에 띄었다. 그들은 역시 회와 초밥 에 강했다. 나는 탄산수(Agua con Gas, 아구아 꼰 가스)를 한 병 주문했다. 맘 같아선 까바(스페인의 스파클링 와인)를 마시고 싶었으나 몸이 아프니깐 참아야지, 암. 길게 보자. 천천히 한 시간 반을 후식 멜론까지 꼭꼭 씹어 삼키고 빵빵한 배를 두들기며 계산대로 향한다. 15유로가 안 되는 금액, 우리 돈 1만 8천 원 정도를 들여 융숭한 대접을 받았구나. 근처 숙소에 또 오게 되면 또 만나, 웍가든! (마드리드 내 여러 지점 운영)


마드리드 웍가든 WOK Garden 뷔페 런치타임


이제 다시 숙소로 돌아가야지. 오늘 저녁은 굶어도 될 것 같으니 천천히 15분씩 나눠 걸으며 돌아가자. A가 알려준 것처럼 넷플릭스 화제의 드라마이자 스페인 최고의 드라마 [ 종이의 집(La Casa de Paper) ] 시즌 1, 2에 나온 지역이 이곳이었다. 주인공 ‘교수’ 세르히오의 정체를 눈치챈 ‘경감’ 라켈이 서로를 쫓고 쫓을 때 등장한 지도의 한 복판이자 CCTV 수거를 위해 라켈이 성큼성큼 걷던 바로 그곳이었다.


음악 일을 접는다는 건 내 안에 자리한 39년 정체성을 송두리째 내 버리는 것과 같았다. 건강상의 이유로 더 이상 뮤지션을 서포트하는 현장 일을 할 수 없었고 사무실에 앉아 일하자니 업무 자체가 돌아가지 않았다. 모두가 아는 이유로 또는 풀리지 않은 이유로 음악 동료들을 갑자기 세상에서 떠나보내야 했다. 글자 그대로 줄초상이었으니까. 한동안 그 좋아하던 음악도 듣지 않았다. 귀를 닫고 정보를 차단했다. 그렇지 않으면 속에서부터 자꾸 내가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으니까. 자연스레 밖에도 나가지 않았다. 몸이 아프니까 가만히 있었고 더욱 무기력해진 거다. 그것을 극복하는 데엔 결국 또 다른 매개인 ‘글’이 도움을 주었다. 엄청난 양의 음반 발매 설명 자료와 보도자료, 공연과 앨범 리뷰, 국내외 아티스트 인터뷰, 특집 기사, 라디오에 5년 간 출연하며 쌓아 올린 대본 등 분량은 짧지만 글 작업을 지속적으로 해 온 내가 아니던가.


능력을 발휘하게 도와준 건 역시 A였다. 그는 출판 편집자, 시나리오 작가, 소설가를 넘나드는 스토리텔러의 길을 걷고 있으니까. 다만 나는 A4 기준 2~4장의 글을 써왔으니 긴 호흡의 장편은 쓸 수 없었다. 글쓰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음악 업계에선 그 바닥에서 쭉- 버티고 있는 게 승자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스토리텔러들 사이에선 키보드 앞에 앉아 있는 게 승자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정말 그랬다. 모든 작가들의 엉덩이 힘에 경의를 표하며 어쨌든, 마드리드에 오기 전 한 편의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주인공의 직업은 음악블로거로 유명한 사람으로 설정했으니 그래, 어쩌면 떼어 놓았다고 생각한 음악일이 끝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종이의 집 La Casa de Paper 영상캡쳐


시나리오를 쓰면서부터는 어떤 영상물을 보아도 내가 저렇게 생각할 수 있을까? 세계관을 만들 수 있을까? 생각하며 감탄하곤 하는데 [ 종이의 집 ] 역시 그랬다. 일단 제목에 함축된 여러 갈래의 의미부터 압권이다. 드라마 시작과 함께 등장인물들을 하나하나 소개하고 사건을 전개시키는 것이 아닌, 강렬하고 신박한 방법으로 큰 사건을 폭탄 투하하듯 던져 두고 극의 중심이 될 10명의 인물들을 보여줬다. 종이의 집을 함께 보며 A에게 여러 가지를 물었다. 처음부터 계획하고 쓴 건가? 쓰다 보니 작가랑 감독이나 제작팀이 씬 구성을 그렇게 나눈 건가? 발암 캐릭터 도쿄에게 왜 스토리를 끌고 가게 하는 거지? 내 사랑 베를린은 처음부터 그렇게 설정한 캐릭터였을까? 나는 마치 A가 종이의 집 제작자라도 되는 양 폭풍 같은 질문을 쏟아냈었다. “ 왜 나한테 묻니? ” 곤란해하면서도 가정 하에 성실히 답해준 A. 나 오늘 뷔페 짱 많이 먹었어!


나에게서 [ 종이의 집 ] 같은 작품이 나올 리 만무하지만 이렇게 여행자의 글쓰기를 쌓아가다 보면 필력은 올라가겠거니… 하는 생각을 하며 숙소로 돌아간다. 그리고 내일은 또 이사다. 매우 아주 베리 레알 스페셜한 세계 힙스터 여행자들이 방문한다는 새로운 호스텔, 2060 The Newton Hostel로 옮기게 된다. 어디 얼마나 힙한지 그래, 내일 만나자!


종이의 집 시즌 1, 2의 주인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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