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K 호스텔 마드리드
시작에 앞서 ,
[ 마흔의 정리여행, 마드리드 드림 ] 은 지난 2019년 9월부터 11월까지 마드리드와 일부 유럽 도시들에서 느리게 걷다 온 미쇼 씨의 이야기입니다. 코로나 19 대유행 전이었죠. 마드리드 숙소 근처라 자주 가던 콜론 광장에선 며칠 전 코로나 19로 공공장소에서 마스크 사용이 의무화된 것에 반하는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안타까움과 염려를 담아 스페인뿐 아니라 전 인류가 이 바이러스로부터, 돌이킬 수 없는 기후환경 문제로부터 안전해지길 바랍니다.
숙소를 옮기는 날이 되면 시원섭섭하다. 2060 The Newton Hostel은 정말 위트있고 편리하고, 세련된 공간이었다. 루프탑은 하루에 한 번 이상 올라갔는데, 밤이 되면 주정뱅이들이 많아 방문을 자제했다. 우리의 냉장고 도둑도 끝까지 많았다. 그러나 칸막이가 확실했던 침대와 깨끗 폭신한 침구, 미쇼 씨가 300% 활용한 공용 라운지 ‘벙커’는 정말 좋았다. 그곳에서 사람을 구한 기억도 잊지 못할 것 같다.
오늘의 이사는 무척이나 간단하다. 2060 호스텔을 나설 때 체크아웃 후 짐 보관을 부탁하고 2시경 돌아와 보관한 짐을 찾고 새로운 보금자리, OK HOSTEL MADRID로 걸어가면 끝. 도보 1분 거리다!! 체크인 시간까진 로비에서 조금 기다리면서 호스텔 분위기와 시설을 파악해둬야지 했는데 이미 청소도 끝났고, 방에 아무도 없으니 바로 체크인해주겠다는 천사 같은 스태프의 친절함에 고맙습니다. 무이 비엔, 그라씨아스, 땡큐쏘머치를 연타로 날렸다.
체크인 후 우리네 온천 리조트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고무 팔찌를 받게 됐다. 너무나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팔에 착용하자 스탭이 “너 뭘 좀 아는구나!”하며 웃었다. 그럼그럼, 난 온천 매니아거든 :) 이 팔찌에 방 번호와 침대 번호가 새겨져 있다. 칩도 심어져 있어 배정된 방 출입과 건물 출입, 라커룸 출입 카드로도 쓰인다. 어제까지 수고스럽게 2층 침댈 썼으니 혹시 가능하다면 1층 침대를 희망한다고 스탭에게 말해봤다. 그녀는 1층 창가 침대를 배정했다고 확인해줬다. 정말 고맙구려!!! 베리카인드. 땡스어랏~
배정받은 여성전용 6인실은 3층, 복도 끝쪽에 있었다. 여러 호스텔을 돌아다니며 6인실, 8인실 규모를 체감해봤는데 OK 호스텔은 객실 복도가 좁은 편이었다. 큰 기대 없이 문을 열자마자 깜짝 놀랐다. 다른 곳에서 10인실로 사용하고도 남을 만큼 광활한 면적에 시원하게 뚫린 창문, 거기서 쏟아져 내리는 햇볕의 양까지 어마어마했다. 문을 열면 좌측에 건식 세면대. (놀랍게도) 넓은 화장대와 전신 거울이 있고, 5번 6번 침대가 있었다. 전면 창을 사이에 두고 반대편 벽에 3번 4번, 1번 2번 침대가 나란히 붙어있다. 그리고 현관 우측에 화장실+샤워실이 있었다. 나는 창가 아래, 3번 침대를 사용하게 됐다. 홈페이지에서 본 것과 똑같이, 따뜻한 나무 프레임으로 만든 침대였다. 흔한 이케아의 철제 2층 침대보다 넓은 슈퍼 싱글 크기였다. 가로 세로로 마구 구를 수 있었다. 대자로 누워 팔다리 펼치기 놀이도 할 수 있었다. ㅋㅋ.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내가 특 6인실을 예약했던 거다. 4인실이나 6인실은 일반적인 호스텔들과 비슷한 크기였다고 한다.
침대 프레임엔 쑥색 암막 커튼이 달려있고, 1층 침대 하단에는 레일 형태의 커다란 사물함이 있다. 사물함에 침대 번호도 새겨져 있으니 쟁탈전이 일어날 일도 없다. 24인치 캐리어를 펼쳐서 놔둘 수 있는 크기와 깊이였다. 26인치도 들어갈 것 같으니 이용하실 분들은 참고하셔도 좋겠다. 머리맡에도 작지만 슬라이딩 도어로 수납공간을 마련했다.
OK 호스텔을 예약한 이유는 우선 이 지역, 티르소 데 몰리나 역과 라 라티나 역 인근에 좀 더 머물고 싶어서였다. 여러 후기를 종합해본 바 이용객 규모는 2060 호스텔과 큰 차이가 없지만 여유롭고 가족적 분위기가 있다고 해서 이곳을 선택했다. 물론 깔끔하기도 했고. 핫하고 힙한 이미지보다는 건물 외관부터 단단하고 견고하고 정갈한 느낌이 있는 곳이다. 이용객의 평균 연령도 조금 높아 보였고, 가족 단위의 여행객이 눈에 띄었다. 특히 2인실을 사용하는 백발의 노부부들을 보며 언젠가 A와 늙어서도 함께 여행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1층 로비와 라운지, 주방, 지하층은 공용 공간이다. 지하층은 라커룸과 플레이룸(당구, 보드게임 등) 용도로 사용되고 있었다. 활동적이고 이야기 나누길 좋아하는 사람들은 주로 여기서 모였다. 로비의 오른쪽은 라운지로 역시 나무로 높고 큰 Bar를 만들고 빨간색으로 멋을 냈다. 테이블과 의자도 나무로 만들었다. 쿠션과 등받이는 빨간색이다. 그렇다. OK 호스텔의 테마 컬러는 우드&레드였다. 나무와 로고 문양때문인지 와인처럼 내가 숙성되는 느낌도 들었다. 하하.
이 라운지에서 오전엔 저렴한 조식 뷔페가 준비되고, 이후 시간엔 맥주와 음료가 판매된다. 저녁엔 전속 요리사가 출근해 10유로 가격의 만찬을 제공한다. 근데 밤 9시부터 시작되므로 미쇼 씨는 패쓰~! 아무리 현지화가 되었어도 밤 9시 식사는 여전히 버겁다. 한편으로 여행자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라운지의 벽에 그려진 아트워크도 굉장한 볼거리다. 마드리드와 스페인의 아이콘들이 풍자되어 있어 하나하나 뜯어보는 재미가 있다. 그래서 2060 호스텔의 벙커 못지않게 지박령 자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호스텔에서 룸메이트들의 이야길 빼놓을 수 없겠다. 앞으로 등장할 숙소를 총망라해 조용한 걸로는 여기서 만난 친구들이 최고였다. 룸메이트는 온전히 복불복이지만 꽉 찬 6인실이 음식 냄새와 소음으로부터 차단된다는 건 믿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에겐 평화유지군 2인조가 있었다! 입실 첫 샤워를 깨운-하게 마치고 나오니 매력적인 두 명의 라틴아가씨가 들어와 1,2번 침대에서 짐 정리 중이었다.
스페인 북쪽 산간지대 우에스카(Huesca)에서 왔다는 두 사람은 마드리드 방문이 태어나 처음이라고 했다. 둘은 다른 사람들이 일정 시간 이상 큰 소리로 대화하면 정중하게 조용히 해달라고 부탁했다. 자신들도 소곤소곤 대화를 나눴으니 얼마나 모범적인가! 외출 후 새벽에 들어올 때는 잠든 사람이 깨지 않도록 문 열기 전부터 신발과 외투를 벗고 살금살금 들어와 바로 잤다. 새벽 2시건 3시건 쩔어서 기어들어와 샤워하고 떠들고 헤어드라이어까지 이용 해 헬게이트를 오픈하는 사람이 호스텔엔 늘 있었기에, 우리의 평화유지군 2인조에게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공용 냉장고에 보관할 음식들을 정리하고 라운지에서 시간을 보내고 오니 내 위층 4번 침대에 동양 여성이 입주해있었다! 호스텔에서 만난 첫 동양인은 아쉽게도 한국인은 아니었지만 익숙한 일본인이었다. 왜 익숙하냐고? 우리의 미쇼 씨는 제2 외국어로 일본어를 배웠기 때문!! 음반사에서 일하던 시절에도 일본 뮤지션들과 소통을 담당했다. 한자를 읽는 건 무리지만 간단한 대화, 음식 주문, 전화 예약은 가능했다. 스페인을 돌아다니며 관광 오디오 가이드에 한글판이 없다면 일본어판을 이용해 반 이상 알아듣는 정도. 영어보단 훨씬 나았다.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보는 그녀의 이름은 리카. 도쿄에서 살고 있지만 3개월 후 결혼하고 후쿠시마(!!)로 이사를 간다고 했다. 회사를 옮기기 전에 공백이 생겨서 마지막 솔로 생활을 즐기기 위해 3주 일정으로 유렵에 왔으며, 어제까진 바르셀로나에 있었고 며칠 뒤 포르투갈로 간다고 했다. 그녀는 자기도 호스텔 돌아다니며 동양인과 함께 지내는 건 처음이라고 했다. 그리고 일본어로 신나게 떠드는 게 2주 만이라 속이 후련하다고 덧붙였다. 나는 오가며 봐 둔 근처의 일식당 위치들과 까르푸에 있는 아보카도 연어회덮밥, 아지노모토의 사발면 판매 위치 정보를 리카에게 알려줬다. 그녀는 2층 사다리를 뛰듯이 내려와 달려갔다.
모두가 잠든 새벽 5시. 누군가 계속 방문을 열려고 시도한다. 삑삑삑삑. 덜컹덜컹. 살벌한 소리가 반복된다. 무슨 일이지? 방을 잘못 찾았나? 술 취했나?? 일어나 보니 1,2,4번 침대는 모두 곯아떨어져 코도 골고 있다. 부러울따름... 문에 귀를 대봤다. 전혀 못 알아듣는 언어로 여성 두 명이 소곤소곤 싸운다. 뭐야??? 다시 삑삑삑삑 경고음이 반복되며 난리가 났다. 아… 5,6번 침대에 들어 올 친구들인가? 목욕탕 팔찌 사용법을 모르나 보네. 쩝. 뭐 큰일이 있으랴 싶어 안에서 문을 열어주었다. 깜짝 놀란 두 사람을 보니 뭐라도 말해야 되나 싶어 “음… 헬로우..???” 라고 하며 화장대 보조등을 켜줬다. 히잡을 두른 두 명의 여성이 큰 트렁크와 함께 서 있었다. 키가 큰 친구가 땡큐땡큐 라고 속삭였고, 아담한 체격에 안경을 쓴 친구는 문이 왜 안 열리는지 모르겠다며 목욕탕 팔찌를 흔들어댔다.
“으음, 오오케에이. 접수.“ 나는 잠결이지만 문을 닫고 복도로 나갔다. 당황한 그녀들의 동공에 지진이 났다. 웃기기도, 미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알려주는 게 나중을 위해 좋을 것 같았다. “여기, 히어, 디스 플레이스”라고 말하며 칩이 인식되는 부분을 동그랗게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그 위치에 목욕탕 팔찌를 딱 갖다 댔다. 철컹, 하고 안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나자 그녀들은 와우! 하며 박수를 쳤다. 짐이 많은 그녀들을 대신해 문을 잡아주고 “레이디스 퍼스트”라는 아재 개그를 날리며 손을 펼쳤다. 히잡을 두른 두 여인은 고맙게도 웃어주었다. 그리곤 자기 침대를 찾아 조용히 짐을 풀고 잠들었다.
근데 나는? 난 잠 다 깼는데?? ㅠㅠ 침대 머리맡의 불을 켜고 사기당한 기분으로 멍하니 있다가 어제저녁 라운지에서 챙겨 온 쿠폰 하나를 떠올렸다. 초콜라떼만 시키면 추로스 2개가 공짜라는 ‘초콜라떼리아 1902 (Chocolatería 1902)’의 쿠폰이었다!! 검색해보니 산 히네스(San Ginés) 바로 앞이라 멀지도 않구나. 동은 트기 전이지만 새벽 영업을 개시하는 곳이니 조식을 빨리 먹는 셈 치고 일찍 나서자. 룸메이트들이 깨지 않도록 조용히 옷을 갈아입고 수건과 칫솔을 에코백에 넣어 공용 샤워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