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란의 변신은 무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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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웃기려면 신에게 네 계획을 말해라.
- 유대인 속담 (feat. 우디 알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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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야심찬 오늘의 계획이었다.
1. 호스텔 출발, 살라망카 지역까지 걷기.
2. 스페인 한국 문화원 방문!
3. 단골 로스터리 Lots Coffee 들러 간식 잡숫고,
4. 12차선 중심에 곧게 뻗은 ‘Paseo’ 길 직진 후 레티로 공원 산책 1시간.
5. 태국 음식점에서 수프 커리 냠냠.
6. 마요르 광장 한치 튀김 + 감자범벅 포장 후 귀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2번까지는 성공적이었다. 그럼 3번부터는? 신이 너무 웃어서 대폭우가 쏟아졌다.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비를 피해 도망치다 기똥찬 곳을 발견했다. 자 그럼, 시작부터 다시 고고-!
오전 9시 30분, 호스텔을 나선다. 북쪽으로 걷다 보면 왕복 12차선 대형도로를 만나게 된다. 그 도로의 중앙 분리대는 다름 아닌 공원. 가로수가 잔뜩 있고, 중간중간 벤치도 있어 태양도 피하고 다리가 아플 땐 쉴 수 있다. 가끔 부랑자들도 마주치지만 겁내지 말고 냅다 빠르게 지나가면 된다. (미쇼 씨는 비둘기가 더 무서웠…) 대부분 마드릴레뇨(Madrileño, 단순히 ‘마드리드 사람’이란 뜻이지만 도시+낭만적 느낌도 겸비. ‘파리지앵’처럼.)들은 점심 씨에스타 전후로 동료들과 산책하거나 커피를 마실 때, 혹은 차분히 혼자 도시락 먹을 때 주로 이용하고 있었다.
남쪽 마드리드 왕립 식물원부터 프라도 미술관을 거쳐 북쪽의 레알 마드리드 경기장인 산티아고 베르나베우까지 쭉- 이어진 도로 중앙공원의 정확한 명칭은 나도 잘 모르겠다. >.< (아시는 분 계시면 댓글 좀!) 구글 지도를 보면 구획을 중심으로 ‘Paseo del OOO’라 돌림 이름을 붙인 것 같다. 오늘은 Paseo del Recoletos를 거쳐 Paseo del Castellana 초입에 위치한 주 스페인 한국문화원(Centro Cultural Coreano en España)을 찾아가는 날이다.
로비 층에 들어서자마자 무장한 여성 보안 요원이 근엄한 목소리로 방문 목적을 물어본다. “비씨따르. 비브리오떼카. 쏘이 꼬레아노(Visitar-방문하다, Biblioteca-도서관, Soy Coreano-한국사람이에요.)”라고 천천히 대답했다. 개떡처럼 말해도 찰떡처럼 이해해주신 보안 요원은 웃으며 위층을 가리켰다.
계단을 올라가자 이번엔 인포 데스크의 스페인 청년이 맞이해준다. 마침 한국 주재원 한 분도 지나가다 나를 보시곤 몇 가지 안내를 해주셨다. 특히 얼마 전 야심차게 갱신했다는 마드리드 한식당 지도를 주셨는데, 한줄기 빛이 내려오는 듯했다. 꼭 가볼게요!! 인포에서 인적사항과 여권을 확인하고, 화상 카메라로 얼굴을 찍어 회원 등록도 마쳤다. 마드리드 거주자(체류비자가 있는 사람)에 한해서만 도서가 대출되므로 미쇼 씨는 대출 불가. 그러나 도서 열람과 데스크 사용은 가능하기에 이따금 방문하기로 했다. 한글로 된 활자를 보고, 한국 사람과 한국말로 대화하는 것, 아니 자신 있게 생각을 단어와 문장으로 쫘라라 쏟아내는 자체가 너무 오랜만이라 생경한 기분도 들었다. 거의 묵언 수행자급으로 지내지 않았던가? 생각에 잠겼다 문득 허기를 느껴 이제 단골 카페 Lots Coffee로 간다.
살라망카(Salamanca)는 마드리드 명품 쇼핑과 미식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세라노 거리를 품고 있다. 바로 근처에 글로벌 명문 IE 비즈니스 스쿨이 드넓게 분포하고, 미국, 이탈리아, 일본을 비롯한 각국 대사관들, 글로벌 기업, 금융업계들이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Lots Coffee로 향하는 길엔 덩어리가 큰 건물들과 정장을 빼입은 사람들도 많이 만날 수 있는데, 이게 또 중심 관광지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인지라 더 구경거리였다. 바쁘게 움직이는 이 사람들 사이로 몰래 섞여 들 때가 내가 정리여행길에 오르며 바랐던 ‘이방인’이 되는 순간이었다.
오늘은 Lots Coffee에서 두유로 카페 꼰 레체를 만들어 달래야지. 아보카도 토스트도 잡솨야지. 그렇게 충당한 에너지로 레티로 공원의 1/4을 정복하는 거다! 흐흐. 두 주먹 불끈 쥐고 걷는데 갑자기 우르릉 콰광!! 구름만 꼈던 하늘이 시커메지더니 벼락과 비를 퍼부어댔다. 으악, 일단 건물 천막 아래로 몸을 숨겨 바람막이 점퍼에 달린 후드를 꽁꽁 동여맸다. (가방은 방수 기능성!) 한 블록 한 블록 건물 벽에 최대한 붙어 이동하며 카페가 없나 두리번거리는데 이미 사람들로 꽉 차 버렸거나 1시부터 영업하는 곳이었다. 아, 낭패네… 그냥 이 길로 쭉 내려가 저 모퉁이 돌아서 한국 문화원으로 갈까? 그 흔한 스타벅스도 없네. 하나. 둘. 셋. 달려~!
파파파 물을 지치며 달리는 데 귓가에 굉장한 인파가 깔깔 웃는 소리, 유리그릇들이 닿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고개를 돌려보니 시커먼 하늘 아래 외부의 위험요소로부터 모두를 강렬하게 지켜줄 것만 같은 빠알간 방벽이 떡하니 있는 게 아닌가! 그 벽 아래에서 사람들은 비를 피하고, 먹고 마시며 왁자하게 있었다. 순간 풍경에 슬로모션이 걸린 것처럼 나는 날쌔게 착-하고 멈추는 동시에 방향을 틀어 그곳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우와- 이게 다 뭐냐!! 나처럼 식탐 많은 어른들을 위한 마법 동화인가? 커다란 토마토 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빠알간 지붕 구조물의 색깔이 참 좋았다. 이곳의 이름은 ‘메르까도 데 라 빠스(Mercado de la Paz)’. Paz는 ‘평화’라는 뜻도 있으니 ‘평화시장’이구나. 빗속에 오갈 때 없는 미쇼 씨를 꿈과 환상, 평화의 멋진 신세계로 품어주시니 황송할 따름.
마드리드에서만 전통시장을 10곳 이상 둘러봤다. 대부분 정겨운 분위기지만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새롭고 편리하게 재정비한 곳도 있고(=비쌈), 박람회장 푸드 코트처럼 실속 없는 곳도 있었다(=화가남). 서민적인 동네에서 들쭉날쭉 영업하거나 암울한 분위기를 풍기는 곳도 있었다(=당황스러움). 하지만 이곳 빠스 시장은 내가 딱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동네의 활기참과 저렴한 먹거리 겸비했다. 규모도 너무 크지 않아 상인들끼리 겹치는 품목도 적었다. 실내 광장 공용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어떤 메뉴를 주로 먹고 있나 살펴보니 공통된 게 하나 있었다. 노오란 조각 케이크의 형상을 한, 내 사랑 또르띠야(Tortilla)였다. 보기만 해도 부드러움이 넘쳐흐르네. 대체 어딨니? 꼬수운 냄새를 따라 킁킁거리며 걸어보니 오오!!! 한쪽 벽에 자리한 오픈 주방이 보였다. 여기로구나, 풍악을 울려라~
정식 명칭 ‘또르띠야 데 빠따따스(tortilla de patatas)’는 스페인 오믈렛이라고들 흔히 표현한다. 반달 모양으로 납작 썰기한 감자와 채 썬 양파를 올리브유나 해바라기유를 두르고 중약불로 천천히 볶아 수분감을 잘 유지한 다음, 계란물을 듬뿍 씌워(볶은 감자양파를 식히고 계란물에 섞거나, 붕어빵처럼 계란물 + 볶은 감자양파 + 계란물로 쌓기도 함) 케이크처럼 두툼하게 부쳐 먹는 스페인의 대표 가정식 중 하나다. 마트, 시장, 식당, 술집을 총망라하고 기본적으로 만날 수 있는 메뉴다. 공산품일수록 뻣뻣하고 기술자의 손을 거칠수록 부드러워진다.
이곳은 빠스 시장 내의 까사 다니(Casa Dani). 간단한 핀초(=타파스)와 가정식을 선보이는 서민식당이며 시그니처 메뉴는 또르띠야다. 한 판, 하프, 핀초(조각 형태)등 다양하게 주문할 수 있다. 오픈 주방엔 우묵하고 큰 프라이팬 앞에 비장하게 서서 감자와 양파를 볶아내는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반대편엔 계란물을 신명나게 쉐킷쉐킷 하고 계셨고, 여러 개의 화구 앞에서 다양한 사이즈의 프라이팬에 끊임없이 또르띠야를 완성시키고 있는 어머니도 계셨다. 마치 30년 전통 찌개백반 전문점에서 뚝배기 20개가 동시에 끓고 있는 듯한 진풍경이었는데, 사진을 찍으려 하니 인자하게 웃으며 사양의 제스처를 취하셨다.
그래 뭘 찍냐 일단 먹자!! 바 자리를 쟁취하는 건 정말 무리였다. 사람들이 줄도 서지 않고 우르르 몰려 경매하듯 돈을 손에 쥐고 흔들며 주문했다. 여기서 음식을 받아 들고 시장 내 공용 식탁으로 가는 사람이 많았다. 나는 속 편하게 테이블 이용료를 내고 매장 안에서 주문하고 먹기로 결정했다. 테이블 위에 코팅된 메뉴판이 있었다. 아름다운 가격 3유로의 핀초 데 또르띠야를 주문했다. 그리고 재빠른 속도로 내 앞에 등장한 또르띠야! 조각도 작지 않아, 한 판에서 딱 4등분 된 듯 90도 각도로 썰려 나왔다. 위·아래 계란물이 고소하게 익어있고 그 사이 자리한 감자와 양파 볶음이 커스터드 크림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호전적이게 포크가 작살처럼 떡 하고 꽂혀 나온 모습이 옛날옛적 돈키호테와 산초도 이렇게 먹었겠지 싶었다.
위장이 몸부림친다. 턱이 뻐근하게 침이 고인다. 얼른 한입 먹어보는데, 크와왕!!! 데스티니--- 스페인 전역에서 다양하게 맛 본 또르띠야 중 고민도 없이 최고의 맛이다. (그동안은 바르셀로나의 맥주 양조장에서 먹은 게 최고였음) 감자와 양파 볶음의 맛 자체도 달랐으며 쭈왑쭈왑 하는 촉감이 섹시하다 할 정도였다. 그리고 찐하고 고소한 계란의 맛이, 산란에 힘써주신 닭님을 만나 인사하고 싶을 정도로 엄청났다. 비도 오고 쌀쌀해져서 더 풍미를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뜬금없이 양평 지평막걸리 판매처에서 자주 사 먹었던 밀 막걸리가 마시고 싶어 졌다. 부드러운 또르띠야지만 계란과 감자라서 식도에서 정체현상이 일어났기 때문. 그래, 술 중의 술은 비 오는 날 낮술이 아닌가! 가장 작은 생맥주, 까냐 한잔을 곁들이자. 호호.
* 재방문 후 알게 된 사실인데, 이미 까사 다니는 또르띠야와 감자요리로 몇차례 수상했다 한다.
계란 요리는 정말 옳다. 영양학적으로야 말할 필요도 없고, 화려한 조리법 없이 노른자 하나만 봐도 최고의 소스다. 삶은 계란 반숙, 반숙 후라이, 온센 타마고, 포치드 에그 모두 노른자를 위한 요리다. 에그 타르트에 들어가는 커스터드 크림, 육회에 올려 먹는 노른자는 또 어떤가? 계란찜, 계란말이, 계란국 아… 생각만으로도 엄마가 보고 싶다. 정직하고 투박하고 따뜻한 재료다. 한국에 돌아가면 엄마의 뚝배기 폭탄 계란찜 예약이다!!
그렇게 빠스 시장의 까사 다니에서 최고의 계란요리와 생맥주도 마셨다(결국 좀 남겼음). 계획 따윈 필요 없는 세상이 내 앞에 펼쳐져 있었고, 나는 신과 함께 웃었다. 그리고 꼭 다시 오리라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