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 전통의 엘 라스트로 플리마켓
미쇼 씨가 손꼽아 기다리던 특별한 일요일 아침이 밝았다! 오늘은 500년 이상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벼룩시장 ‘엘 라스트로 플리마켓(El Rastro Flea Market)’을 찾는 날. 매주 일요일, 공휴일 오전 9시에서 오후 3시까지 열리는 이 플리마켓은 인파와 역사, 문화를 탐험하는 또 다른 재미를 준다. 마드리드 생활 중 이곳을 지나친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각 잡고 본진에 뛰어든 건 오늘이 처음이다. 방문객을 위해 팁을 드리자면, 본격 인파는 11시쯤 몰리고 오후 1시부터 일부 가판은 영업 마감을 한다. 많은 인파가 부담스러우면 옆 골목으로 빠지자. 나는 그쪽 풍경이 더 좋더라.
# 엘 라스트로 플리마켓 El Rastro Flea Market
마요르 광장 남쪽, 라 라티나(La Latina) 역부터 시작되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골동품, 벼룩시장이다. 시작 이후 완만한 경사길을 쭉- 내려가는 느낌으로 상점들과 가판, 좌대들이 빼곡하게 늘어서 있다. 중요한 것은 소지품 관리! 전 세계 여행자들과 숨 막힐 듯 다닥다닥 붙어 걸어야 한다. 발도 여러 번 밟힌다. 실제 스웨덴 가족 한 팀이, 자기 아이의 손을 잡는다고 내 팔목을 잡았다. >.< 결론은, 마드리드 근교의 소매치기까지 싹 모이는 만남의 장(場)이니 주의하자는 말씀. 특히 사진 찍을 때 방심하지 말자.
(지금부터는 전해 들은 ‘썰’인데,) 14세기 이전부터 유럽과 아랍 상인들이 집결했던 마드리드는 도시 전체가 거대한 시장과 같았다. 그중에서도 현재의 엘 라스트로 플리마켓 길은 대형 소 도축장이 유명해 육류 거래는 물론 소가죽, 세공 장인들이 상권을 형성했다. 사람이 몰려들자 음식, 생필품을 총망라한 노점과 무허가 상인, 훔친 물건을 거래하는 장물아비까지 날뛰면서 솔 광장 너머까지 어마어마한 상권을 이뤘다고 한다. 훗날 국왕이 도축으로 인한 악취, 강의 오염, 무법천지가 되어버린 라스트로를 강력하게 몽둥이질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췄다(라고 한다). 이날 내가 방문한 라스트로 플리마켓은 체감 상 황학동 풍물시장의 10배 이상 규모로 느껴졌다.
# 플리마켓 vs 프리마켓
플리마켓(Flea Market)과 프리마켓(Free Market)은 영어도 한글도 발음은 참 비슷하지만 성격은 다르다. 플리마켓은 ‘벼룩시장’, ‘중고시장’, ‘골동품 · 빈티지 · 앤틱 시장’으로 생각하면 쉽다. 프리마켓은 ‘직거래 장터’, ‘자유시장’, ‘아트 마켓’ 정도면 이해가 빠를 것 같다. 국내에선 거의 혼용되고 있는 분위기지만, 해외에서는 워낙 ‘빈티지 · 앤틱’ 애호가들이 많아서인지 구분해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엘 라스트로 플리마켓 역시 규모가 방대해서 꼭 골동품만 있는 건 아니다.
* 통상적으로 빈티지(vintage)는 30년, 앤틱(antique)은 100년 이상 수명이 지난 물건을 말한다.
2060 호스텔은 엘 라스트로 플리마켓이 시작되는 ‘라 라티나’ 역과 엎어지면 코 닿는 거리다. 그래서 바로 앞 ‘티르소 데 몰리나’ 역 광장에 들어선 꽃시장부터 사실상 플리마켓이 시작된다. 딱 봐도 무허가임이 분명한 아프리카인들의 짝퉁 가방 좌판을 시작으로 잡스럽고 꼬질꼬질한 집시들의 물건도 골목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 자체가 하나의 관광 상품이므로 여행자들에겐 또 새로운 경험이 된다.
이제 마드리드 지름길도 꿰고 있는 미쇼 씨는 한눈팔지 않고 엘 라스트로 플리마켓을 향해 쭉쭉 나아간다. 평일에는 가죽공방과 식당이 늘어서 산책하기 좋은 일방통행 길, Plaza de Cascorro에 다다르자 어떻게 해 볼 틈도 없이 앞 · 뒤 · 옆 사람에게 둘러싸여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동으로 걷게 됐다. 등에 있던 가방을 겨우 앞으로 돌려 메고, 자물쇠를 단단히 잠갔다. 카메라고 핸드폰이고 지갑이고 꺼내면 없어질 것만 같은 어마어마한 위압감과 광기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다행히 가판과 가판 사이 틈을 비집고 나가 겨우 보도블록 위로 올랐을 때, 헉헉. 오 놀라워~라 환생한 기분이 다 들었다. 가판대는 인도 상인들의 코끼리 양탄자, 향신료, 티셔츠가 압도적으로 많아서 여기저기 풀떡거리는 먼지와 함께 오래된 곰팡이 냄새, 사람들의 체취로 가득했다. 무엇보다 시야 확보가 전혀 되지 않았다. 키 크고 덩치도 큰 서양인들이 장승처럼 나를 둘러싸고 눌러댔기 때문이다. 진짜 ‘엄마-’ 소리가 절로 나오네.
보도블록에 올라 상점과 가판 사이의 모습을 보며 다시 걸어 내려간다. 이쪽은 아티스트가 많았다. 작은 보자기를 펼치고 자체 제작 CD를 들려주며 판매하는 뮤지션, 작은 이젤을 펼치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 가죽 제품과 작은 액세서리를 전시한 상인들, 집 농원에서 직접 재배한 꿀과 치즈, 농산물을 파는 상인도 있었다. 벼룩시장의 꽃인 빈티지 의류도 남녀별로 엄청나게 많았다. 아 훨씬 좋네! 그때 조금 넓어진 길 위에 사람들이 원형을 그리고 서 있었다. 뭐지? 빼곰 고개를 밀어보니 한 밴드가 공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버스킹이라면 내가 또 봐줘야지. 밴드와 함께 한 세월이 얼만데.
거리의 악사들은 ‘JINGLE DJANGO’란 이름의 6인조 밴드다. 튜바(트럼펫 같은 관현악기), 까혼(의자 형태의 타악기), 아코디언, 바이올린, 클라리넷, 클래식 기타로 스페인 민속음악과 발칸 반도 특유의 음악정서를 현대적으로 재치 있게 들려줬다.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기에 잘 알려진 곡들을 리메이크하는 전략을 택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어쨌든 이들 덕분에 드디어 가방을 열고 핸드폰을 꺼내 사진과 동영상을 조금 남길 수 있었다. 그들의 음악을 한껏 즐긴 뒤 나는 CD 구매 대신 1유로를 기부했다.
이제 길 따라 정처 없이 걷는 건 그만하고(끝이 안나!!) 정갈한 상점에도 들어가 본다. 일단 에어컨이 나와 시원해- 공기 쾌적해- 그라씨아스~, 무이비엔!! 황금빛 나는 골동품과 퀴퀴한 냄새는 나지만 유서 깊은 역사를 간직한 중세의 문 한 짝, 파란색 잉크로 예쁘게 쓰인 서신, 낡아 색이 바랜 동양 그림도 구경했다. 중국 작품 같았다. 뒤이어 상점을 통해 이어진 다른 골목으로 나가는 문을 열었다. 너무나도 매력적인 아프로 헤어(폭탄 머리)에 가죽 코트를 입은 모델이 플리마켓 인파들을 배경으로 화보 촬영 중이었다. 나도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한 장 찍고 싶었지만 관계자들이 통제하고 있어서 구경만 했다.
2060 호스텔로 돌아가는 길, 담장을 가판 삼아 오래된 책과 살림살이들이 나와 있다. 진짜 벼룩(Flea)이 둥지를 틀고 살 것 같은 신발도 보인다. 구리로 된 묵직한 컵이 눈에 띄어 들여다보는데, 기다렸다는 듯 집시들이 나를 둘러싼다. 그래, 늬들도 열심히 산다. 하지만 내 가방은 지퍼가 안 보이지롱~ 칼로 그어도 안 찢어지지롱~ 쫄바지 위에 롱 티 한 장 입고 있으니 털어갈 주머니도 없었다. 당황해 물러나는 집시들을 보며 뭔가 해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계속 주의해야지. 구매하긴 어려우니 구리 컵과 상상 속의 대화를 펼쳐본다.
“안녕, 구리 컵아. 넌 어디서 왔니?”
“어, 나 톨레도에서 왔어.”
“우와, 그럼 너도 중세시대 물건이야?”
“아니, 그 정돈 아니야. 한 50년 됐어. (으쓱)”
“맥주 시원하게 말아먹기 좋게 생겼다, 너.”
“이 몸 끝까지 채워 벌컥벌컥 들이켜면 최고지!!”
사람이 쌓아 온 시간만큼 물건에도 시간이 쌓인다. 쌓인 시간은 곧 이야기가 된다. 오래된 책방에 들어서면 내 손이 닿을 때마다 책이 깨어나진 않을까 환상에 사로잡히면서, 내가 갖고 있는 물건들에선 왜 그런 감정을 못 느낄까? 아마 외면하고 있었나 보다. 한국에 돌아가 본가에 가게 되면 시집올 때 챙겨 오지 못한 음악 CD들을 돌봐줘야지. 그땐 앨범 한 장 사 모으는 게 취미를 넘어 성스러운 일과 같았다. 대단한 컬렉터는 아니지만 내 취향을 반영할 만큼의 음반은 가지고 있다. 희귀 음반을 찾기 위해 사냥터 가듯 출정하던 날들도 떠오른다. 그렇게 모아둔 너희들의 음악을, 목소리를 다시 깨워 들어볼게. 그리고 유물로 남기지 않고 아껴줄 새 주인도 만나게 해 줄게. 환경을 생각해도 그게 맞는 것 같아.
두 다리로 힘껏 걸어 낸 플리마켓 원정. 아무것도 사고팔지 않았으나 뿌듯한 기분이었다. 이제 3시 30분. 청소 후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깨끗한 객실 샤워장에서 오랜만에 그리운 노래들을 소환해 흥얼거리며 파워 샤워를 만끽해 본다.
BGM ㅣ 클라우드 쿠쿠 랜드 - 나의 이름을 불러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