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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쇼 Aug 25. 2020

중세 시대의 환상과 현실의 교차점

알칼라 데 에나레스 2부

『돈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의 생일 주간을 맞아 그의 고향 알깔라 데 에나레스에서는 축제가 한창이다. 이름 하여 ‘메르까도 세르반티노 2019(Mercado Cervantino)’.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더 있었으니 이곳 알깔라 데 에나레스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고대 도시’이자 ‘학문의 도시’ 그리고 ‘대학의 도시’라는 사실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 고풍스런 외관이 풍성한 축제의 가판과 좌대와 깃발들로 가려지고 있다는 건데, 오히려 그렇기에 중세 시대로 훌쩍 넘어온 것 같은 환상도 심어주었다.


올바른 여행 선택의 뿌듯함을 느끼는 미쇼 씨. 이 축제의 한마당엔 동양인의 참여도가 적은 것 같다. 일단 한국인을 마주친 적은 아예 없고, 알깔라 대학생일 듯한 중국계 청년 두세 명은 봤다. 그래서일까? 이 축제를 찾은 스페인의 어린이들은 오히려 나를 구경하고 있다. 그렇게 신기하니? 많이 보렴, 난 신경 안 쓰니까.

세르반테스 광장 푸드 코트의 위엄. 숯불 직화!


10월 중순에도 구름 한 점 없이 뜨거운 날씨다.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퍼레이드를 놓치지 않으려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말 위에 탄 엄격근엄진지한 돈키호테와 당나귀를 이끌고 걸으며 쉼 없이 먹는 산초를 선두로 돈키호테 속에 나오는 모험의 세계를 재구성해 분장한 알깔라의 주민들이 멋진 퍼레이드를 보여줬다. (어제의 알깔라 데 에나레스 1부 연재를 통해 확인 가능)


신나서 그들을 쫓다 보니 배고픔은 잊었는데 당이 확 떨어졌다. 그래서 미쇼 씨는 아까 봐 둔 여러 간식 부스 중에 오로지 감자튀김만 파는 유쾌한 청년들을 찾아갔다. 거짓말 안 보태고 제주 월동 무 만한 왕 감자를 두툼하게 잘라 즉석에서 튀겨 팔았는데, 그냥 JMT. 존재 자체가 예술, 최고!! 근데 힘들어서 도저히 서서는 못 먹겠구나. 바로 옆 골목이 예약해둔 ‘파라도르’ 호텔이니까 가방도 맡길 겸 좀 쉬어야겠다.

세르반티노 축제의 명품 감자 튀김. 감튀는 언제나 옳다!!


알깔라 데 에나레스의 파라도르는 16세기부터 존재해온 학생 기숙사, 수도원을 복원하고 연결해 2009년 선보인 스페인의 국영 호텔이다. 임박해 예약한지라 그냥 방이 있는 것도 감지덕지였는데 도착해 시설을 보고는 넋을 놓아버렸다. 아픈 몸을 이끌고 모르는 사람 6-8명이 작은 방에서 떼로 잠드는 호스텔을 한달 간 전전하다 나 홀로 4성급 호텔의 문턱을 넘다니, 이것이 성공한 인생인가?! 눙물이 ㅠ. 드넓은 욕실은 호스텔 6인실보다도 넓었다. 욕조실이 따로 있고, 샤워실은 거울 반대편에 따로 있었다. 일단 욕조를 보니 무장해제. 안 들어갈 수가 없네! 체크아웃까지 두 번 정도는 몸을 지져줘야 뽕을 뽑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반신욕 후 푹신한 침대에 까무룩 잠들었다 일어난 미쇼 씨. 이게 바로 씨에스타의 미덕이구나. 잠깐이지만 꿀잠이었다. 솔직히 훔쳐갈 것도 없는 가방이지만 두껍고 튼튼한 객실 내 금고에 욱여넣으면서 엄청 웃었다. 갈아입을 옷과 양말까지 옷걸이에 싹 다 걸었는데도 공간이 한참 남아도네, 후훗. 이제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축제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어 볼까?! 우선은 세르반테스의 생가가 있는 마요르 길로 가자!

융숭한 국영호텔 파라도르 알깔라 데 에나레스. 144호.


흡사 락 페스티벌에 출정하는 기분이었는데, 가는 길에 전통악기를 연주하는 악사들의 음악까지 울려 퍼지자 완벽해졌다. 눈앞의 중세 상인들과 물품들은 상상 이상의 풍경이라 여기를 봐도 우와! 저기를 봐도 우와! 향신료 마차, 가죽공예 마차, 치즈 마차, 저장용 햄 마차, 꿀 마차, 술 마차, 장난감 마차 하나하나 진풍경이었다. 사진을 찍기도 힘들 만큼 사람들로 가득했다. 시식도 많이 하고 박수도 많이 쳐주며 세르반테스 생가에 다다랐다.

세르반테스 축제의 흔한 풍경 4


그의 아버지가 외과 의사였다는 이야기를 기억한다. 그래서 뮤지엄에는 당시를 회상할 수 있는 옛 의료 도구들을 재현해두었다. 어린 세르반테스의 요람도 보였고, 가족의 다이닝룸도 있었다. 하지만 나에겐 '귀스타프 도레'가 그린 소설 돈키호테의 삽화들이 더 멋지게 다가왔다. 꼼꼼히 보기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떠밀리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오히려 뮤지엄 바로 앞에 있는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를 형상화한 의자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한 가족이 내게 핸드폰을 건네며 자신들의 가족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네, 기꺼이 얼마든지요." 문제는 역광! 사람이 다 시커멓게 나왔다. 다행히 가족도 그걸 알고 있었다. 괘념치 말고 찍어 달래서 열과 성을 다했다. 그러자 아이의 엄마가 나도 찍어주겠다고 한다. 음 그렇다면... 역광을 극복할 포즈가 필요하겠다 싶어 돈키호테의 품에 안겨 A에게 보낼 웃긴 사진 한방을 부탁했다. 내가 선빵을 날렸더니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 해괴한 포즈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래, 다시는 동양의 괴짜 아줌마를 무시하지 마라! 풉.

귀스타프 도레가 그린 돈키호테(좌) / 주접 사진의 달인 미쇼 씨(우)


그리고 바로 건너편에 관광 안내소 직원이 추천했던 가성비 좋은 레스토랑들이 보였다. 대부분 손님은 야외 테라스에 있어서 내부가 한산했다. 적당한 매장 한 군데를 골라 메뉴 델 디아(오늘의 정식)가 되는지 물어봤다. 시간이 좀 늦었기 때문이었는데 거의 “그러믄입쇼!” 같은 뉘앙스로 호쾌함과 친절함을 뽐낸 Panam의 직원이 고마워서 여기로 결정했다. 크레페와 버거 전문점이었지만, 11.80 유로에 판매하는 메뉴 델 디아도 아주 좋았다. 음료 한잔과 애피타이저, 정식, 디저트까지 남기지 않고 싹 먹었다. 물가가 저렴한 알깔라와 관광 안내소 직원님아, 그라씨아스~ 


이제 세르반테스 광장을 중심으로 한 바퀴 돌아볼 차례. 아까까지만 해도 비어있던 공원에 아랍상인이 자리를 잡았다. 뭔가를 세공하는 모습이 멋스럽군! 지역 맥주 판매와 함께 자신이 직접 깎아 만든 멋진 술잔을 판매하고 계신 분도 있다. 이야길 나누는데 마침 지역 방송국에서 이색적인 부스를 취재하려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사장님 파이팅~ 자리를 피하며 공원 쪽으로 나가보니  어르신들이 알록달록 꾸미고 나와 계셨다. 이런 모습은 전 세계 어디나 비슷한 것 같네. 

세르반테스 광장 가운데에 자리한 아랍 상인


이제 다른 골목으로 꺾어본다. 광장을 둘러싼 적벽 건물들은 대부분 알깔라 대학 부지다. 법대, 기숙사, 재단 등 각 학부마다 조금씩 건물을 나눠 사용하고 있었다. 대리석 건물은 관공서 들이다. 시의회, 문화재 관리부, 우체국, 극장 같은 것들이다. 그때 아주 잠깐, 착시 현상이 일어났다. 한 바디클리닉 센터의 광고였는데 마치 돈키호테가 늘 찾아다니던 환상 속의 그녀 ‘둘시네아 (dulcinea)’와 간판 철자가 절묘하게 비슷해 혼자 껄껄 웃었다.

도르씨아 클리닉과 둘시네아를 착각한 그 순간!


정신없이 구경하다 보니 해가 졌다. 그렇담 밤 9시가 넘었겠구나! 하지만 스페인의 밤은 늘 9시부터가 진짜다. 수업을 마친 학생들까지 가세한 세르반테스 광장의 푸드 코트는 클럽을 방불케 했다. 여기저기 EDM이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흥 많은 젊은 청춘들은 빼곡하게 서서 술을 마셔댔다. 대형 화덕에서 구워지는 바비큐와 소시지 냄새는 축제를 더욱 북돋웠다. 


살짝 허기를 느낀 나는 광장 중앙의 중동 음식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진짜 후무스와 진짜 팔라펠을 먹어 볼 기회였다. 가격도 저렴한 5유로! 근데 아줌마 그만 담아요. 너무 많아요 >.< 그렇게 김밥 3줄을 합친 것보다 크고 두꺼운, 소스 마저 넘쳐흐르는 팔라펠을 받게 됐다. 한 입, 두 입 먹는데 너무 맛있어 ㅠ 하지만 음료가 절실히 필요해져 아까 봐 둔 500ml 생맥주를 무려 1유로의 은혜로운 가격에 파는 곳으로 갔다. 생수도 그 집이 저렴해서 정말 생수를 살 작정이었는데 별안간 내 앞 청년이 1리터짜리 대왕 맥주를 사는 게 아닌가? 휘둥그런 눈으로 “저건 얼마예요? (¿Cuánto cuesta?)”하고 물었다. “도스! (Dos)” 아주 명확환 2유로란다. 생수보다 싸잖아... 저걸로 하나 주세요!!

은혜로운 생맥주 부스(좌) / 맛있는 팔라펠 요리 전문점(우)


최홍만 선수가 1리터 우유갑을 손에 들면 200ml처럼 보이듯 그들에겐 평범한 1리터 잔이 내겐 버겁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미쳤구나. 급 현자 타임! 분명 다 못 마실 거다. 그런데 왜 이렇게 신이 나지? 흐. 관광 안내소 앞 광장이 비어있어 그리로 가 앉았다. 피쳐 잔에 가까운 큰 맥주와 팔라펠을 한입씩 번갈아가며 꼭꼭 씹는다. 마침 축제의 공식 악단이 미지의 사운드를 옆에서 연주하기 시작했다. 오늘 밤을 잊는다는 건 죽어서나 가능한 일이 분명했다.

세르반티노 축제의 공식 악단


나를 이곳으로 이끌어 준 세르반테스 옹과 돈키호테, 그리고 수백 년의 문화유산을 그대로 간직한 알깔라 데 에나레스에 무한한 영광을 돌리며 숙소로 돌아간다. 그리고 4성 호텔이 제공하는 내일 아침의 조식은 과연 어떤 모양새일지! 기대하며 잠을 청해 본다. 아스타 루에고!(=씨유~)

영험한 기운 뿜뿜. 사주팔자를 맡겨보고 싶었음.


지역방송국과 인터뷰 개시! 맥주 판매 부스


세르반테스 공원의 실버 라운지


팔라펠과 1리터 맥주를 음미하던 야간의 관광 안내소 앞.


세르반티노 축제의 흔한 풍경 5


세르반티노 축제의 흔한 풍경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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