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에서 나오는 연예인에 대해선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자주 한다. 그만큼 출연하면 인기가 있든 없든 적당히 먹고 살 정도로 누군가 불러 준다. TV에 간혹 가다 나온다고 해도, 이미 수십만 명, 때로 수백만 명이 그를 알고 있으며 이로 인해 지방 강연이나 행사에 출연할 수 있는 명분을 마련한다. 한 달에 그런 행사에 두 세개만 나가도 수백만원은 벌 수 있다. 생활이 가능해 진다는 말이다.
잊혀진 가수나 배우가 다시금 케이블 예능에 나와 얼굴을 알리려고 고군분투하는 애처로운 모습도 어찌보면 다 접근성을 스스로 높이고자 하는 전략이다.
유튜브에서 채널뷰를 수백만 회 확보하고 일정 분량 이상의 영상을 업로드하면, 중간광고까지 추가 되어 기하급수적으로 수익이 늘어난다. '유튜브로 돈벌기'란 책까지, 읽어가며 크리에이터는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이 뿐만이 아니다. IT 업계의 화두는 얼마나 접근성이 좋은 플랫폼을 확보하느냐에 있다. 페이스북, 구글과 같은 세계적인 기업들도 역시나 얼마나 접근성이 좋은 플랫폼과 컨텐츠를 생성하느냐에 몰입한다.
상권 좋은 가게의 임대료가 비싼 것도 고객이 많이 찾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 댓가를 받자는 취지다. 신사동 가로수길에 가면 맛있는 음식을 팔고 가게의 상권이 확장되면 결국 월세를 버티지 못해, 세로수길에 또 다른 둥지를 마련하는 웃지 못할 풍경이 벌어진다.
‘노브랜드’로 제품의 순수한 혁신을 주장한 대형 마트 PB는 어느 새 ‘NO BRAND’ 자체를 새로운 브랜드로 내세우며, 편의점, 슈퍼까지 장악하고 있다. 많이 알려지면, 즉 브랜드의 접근성을 높이면 결국 많이 팔린다는 고전 마켓팅의 법칙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
접근성이 좋은 곳이 인기가 많고, 그만큼 돈이 벌리는 공간이 된다는 것은 전혀 새로운 법칙이나 사회현상이 아니다. 부동산에 열광하고, 은퇴한 직장인은 치킨집 운영을 한 번쯤 꿈꿔 본다. 무엇이든 새로운 메뉴와 여가가 인기를 끌면 우후죽순 관련 업종이 극단적인 쏠림 현상을 반복한다.
한국에선 접근성에 목말라하는 주변 사람을 늘상 경험한다. 남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자 하는 속내도, 인맥을 두루뭉술하게 넓혀가려는 욕구 또한 인간관계 접근성을 올리기 위함이다.
다만 씁쓸한 것은 그러한 접근성의 확보를 위해 모두가 열중하는 순간과 순간 사이에 도저히 여유란 건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접근성만 확보되면 옳고 그른 것에 대한 판단기준은 더이상 논의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이 씁쓸하다.
조회수만 높다면 자극적인 셀프 영상을 얼마든 지 촬영할 준비가 되어 있는 유튜버들. 컨텐츠 크리에이터란 명분하에 모든 시도를 다 해보는 사람들. 그리고 그걸 지켜볼 준비의 강도를 계속 높여가는 우리들.
자숙할 기간 따윈 아무도 정하지 않았고 누구도 환영하지 않는 문제 많은 연예인이 케이블에 슬그머니 화제성 프로그램을 들고 나와 주인공 행세를 하는 아이러니.
맛집 칼럼니스트로 활약하며 분식은 입에 대지도 않을 것 같이 깐깐함을 자랑하던 사람이 생글생글 웃으며 라면 CF를 찍고 있는 어색함.
결국 다 열심히 사는 것의 한 모습일테다.
모든 삶의 면면까지 정당성을 필연적으로 확보하고 윤리의식을 고도화 시킬 의무 따윈 어디에도 없다. 그냥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왜 그리 주관적인 잣대를 고매하게 드러내냐고 한다면, 그것 역시 알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어딘가 아쉬운 것 역시 솔직한 감정의 언저리다.
삶의 정답이 궁금하지 않을만큼 일상에 충실하기만 하면 충분했던 사람들까지 접근성에 최우선으로 뛰어드는 시대.
어느새 접근성을 높이는데만 혈안이 된 자신을 깨닫고 머릿 속이 먹먹해지지만 멈출 수 없는 묘한 상황.
우리는 정말 어디까지 타인에, 사회에 노출빈도를 높여가며, 접근성을 확보해야 하는 걸까. 그게 사회생활인가? 좀 더 어른스러워지는 걸까? 프로패셔널이 된 건가?
뭔가 허무해지는 기분이다.
오히려 오늘 하루를 사는 우리 마음을 자주 꺼내어 보는 ‘마음 접근성’을 스스로 높여야 할 때인 것만 같다.
‘접근성 최우선의 시대’에 조금이라도 더 자존감 있게 살아가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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