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오전, 갑자기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안내방송이 나왔습니다. 단수가 되었다고요. 전기계통 문제라고 했습니다. 관리사무소 앞에서 생수를 1통씩 나눠주기 시작했고, 저도 황급히 내려가 생수를 받아 들었습니다. 다행히 몇 시간 만에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제 일상은 완전히 멈춰버렸습니다.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화장실 용변 처리도 할 수 없었습니다. 손을 씻을 수도, 설거지를 할 수도 없었습니다. 커피 한 잔 내리는 것조차 사치가 되어버렸죠. 수도꼭지를 돌리면 당연히 나올 거라 믿었던 물. 그게 멈추자 모든 것이 정지했습니다. 문명이라는 게 이렇게 약한 거였나 싶었습니다.
그때 문득 떠올랐습니다. 올해 초 가뭄으로 단수를 겪었던 강릉 이야기를요. 뉴스로 보면서 "저기는 심각하네" 했던 그 사건이, 갑자기 남의 일이 아니게 느껴졌습니다. 강릉은 며칠이었습니다. 저는 고작 몇 시간이었을 뿐인데도 이렇게 당황스러웠는데, 며칠을 그렇게 버텨야 했던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왔습니다.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나오고, 스위치를 누르면 불이 켜지고, 가스레인지를 돌리면 불이 붙는 것. 이 모든 게 24시간 언제든 작동한다는 믿음 위에서 우리의 삶이 굴러갑니다. 그런데 그중 하나만 멈춰도, 도미노처럼 모든 게 무너져버립니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도시는 놀라울 만큼 취약합니다. 정전이 되면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인터넷이 끊기고, 신호등이 꺼집니다. 단수가 되면 화장실을 쓸 수 없고, 요리를 할 수 없고, 씻을 수 없습니다. 난방이 끊기면 추위에 떨어야 하고, 가스가 끊기면 따뜻한 음식을 먹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에 의존하며 살고 있고, 그 의존성은 날이 갈수록 더 깊어지고 있습니다.
기후위기는 이제 뉴스 속 이야기가 아닙니다. 가뭄도, 폭염도, 한파도 점점 더 자주, 더 강하게 찾아옵니다. 그때마다 우리의 인프라는 흔들립니다. 전력망이 과부하되고, 상수도가 말라가고, 도로가 침수됩니다. "설마 우리 동네는 괜찮겠지"라는 막연한 믿음이 점점 더 위태로워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자기 전에 물을 받아두는 것, 정전에 대비해 배터리나 양초를 준비하는 것. 웃기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첨단 아파트에 살면서, 무슨 조선시대도 아니고 물동이에 물을 받아두고 양초를 준비하냐고요.
하지만 강릉의 단수 사태를 겪은 사람들은, 정전을 경험한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그게 얼마나 절실한 준비인지를요. 물 2리터 페트병 몇 개, 손전등 하나, 보조배터리 하나가 위기의 순간에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를요.
준비한다고 해서 재난이 오지 않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준비하지 않으면, 재난이 왔을 때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관리사무소가 나눠주는 생수 한 병에 의지하며, 언제 물이 다시 나올지 불안해하며,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더 중요한 건, 이런 준비가 단순히 개인의 생존 문제를 넘어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취약한 시스템에 의존하며 살고 있는지 인식하는 것, 그것이 첫걸음입니다. 인식이 있어야 변화가 생깁니다. 물을 아껴 쓰고, 전기를 절약하고, 기후위기에 관심을 갖는 것. 거창해 보이지만, 결국 우리 자신을 지키는 일입니다.
몇 시간의 단수가 제게 남긴 것은 생수 한 병이 아니라, 이 깨달음이었습니다. 당연한 것은 없다는 것. 언제든 멈출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는 그 멈춤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
오늘 밤, 자기 전에 물 한 대야라도 받아두는 건 어떨까요. 서랍 한 켠에 손전등 하나 챙겨두는 건요. 귀찮고, 과하다 싶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날이 오면 알게 될 겁니다. 이게 과함이 아니라 상식이었다는 걸요.
물이 끊긴 그날 이후, 저는 수도꼭지를 틀 때마다 잠깐 멈칫합니다. 정말 물이 나올까? 오늘도 괜찮을까? 이 불안은 부정적인 게 아닙니다. 오히려 감사하게 됩니다. 오늘도 물이 나온다는 것에, 전기가 들어온다는 것에, 이 작은 일상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에요.
당연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 준비합시다. 조금 불편하더라도, 조금 귀찮더라도요. 그게 우리가 이 취약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법입니다.